소재지 : | 김제시 금산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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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20091001촬영 |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母岳山)에 있는 절.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본사.
〔역 사〕
≪금산사사적 金山寺事蹟≫에 의하면 600년(무왕 1)에 창건되었으며, 백제 법왕이 그의 즉위년(599)에 칙령으로 살생을 금하고, 그 이듬해에 금산사에서 38인의 승려를 득도시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이 때는 그 규모나 사격(寺格:절의 품격)으로 볼 때 별로 큰 사찰이 아니었으며, 1492년(성종 23)에 쓴 〈금산사오층석탑 중창기〉에 의하면 과거불(過去佛)인 가섭불(迦葉佛) 때의 옛터를 중흥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는 금산사의 터전에 오랜 불연(佛緣)이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금산사가 대찰의 면모를 갖추게 된 시기는 진표(眞表)가 중창을 이룩한 경덕왕대 이후로 보고 있다. 중창주 진표는 12세에 금산사의 순제(順濟)에게 가서 중이 되었고, 그 뒤 금산사를 떠나 선계산 부사의암(不思議庵)에서 참회법(懺悔法)을 닦아 미륵보살과 지장보살로부터 계법(戒法:계율을 엄수하는 수행법)을 전해받은 뒤 금산사로 돌아와서 중창을 시작하였다.
762년(경덕왕 21)에 시작하여 766년(혜공왕 2)에 중창을 끝낸 진표는 미륵장륙상(彌勒丈六像)을 조성하여 주불(主佛:법당의 중심이 되는 부처)로 모셨고, 금당(金堂:법당)의 남쪽 벽에는 미륵보살이 도솔천(兜率天)에서 내려와서 그에게 계법을 주던 모습을 그렸다.
이 절은 미륵장륙상을 주불로 모심으로써 법상종(法相宗)의 근본 도량이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도 법상종에 속해 있으면서 ≪법화현찬 法華玄贊≫·≪유식술기 唯識述記≫ 등의 법상종 관계 장소(章疏)들을 간행하였다.
진표의 중창 이후 후백제 견훤의 보호를 받아 부분적인 보수가 있었으며, 법상종의 대종사이자 왕사인 혜덕(慧德)이 1079년(문종 33) 금산사 주지로 부임하여, 퇴락한 절을 보수하고 새로운 법당을 증축하여 대찰의 면모를 갖추었다. 현존하는 금산사의 중요 석물인 석련대(石蓮臺)·오층석탑·노주(露柱) 등은 모두 이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또 절의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여 간경(看經:경전을 읽음)·법석(法席:법회) 등을 주관하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금산사는 창건 이후 가장 규모가 큰 대도량이 되었다.
그러나 1598년(선조 31) 임진왜란 때 왜병의 방화로 모든 건물과 산내의 40여 개 암자가 완전히 소실되었다. 1601년 수문(守文)은 복원공사를 시작하여 1635년(인조 13) 낙성을 보았다.
그 당시 수문을 도와서 역사에 참석했던 승려는 지훈(智訓)·덕행(德行)·석준(釋俊)·천정(天淨)·응원(應元)·학련(學蓮)·태전(太顚)·운근(雲根) 등이었다.
1725년(영조 1) 금산사에서 남악(南岳)이 화엄대법회를 열었다. 고종 때에는 총섭(摠攝:주지)으로 취임한 용명(龍溟)이 가람을 일신하여, 미륵전·대장전(大藏殿)·대적광전(大寂光殿) 등을 보수하였고, 1934년 성렬(成烈)이 다시 대적광전과 금강문(金剛門)·미륵전 등을 보수하였으며, 1998년 방등계단 앞에 적멸보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절에 머물렀던 고승으로는 진표와 혜덕을 비롯하여 문종의 여섯째 아들로서 중이 된 승통(僧統) 도생(導生), 원나라 왕실로부터 깊은 존경을 받았던 유식학(唯識學)의 대가 해원(海圓) 등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이 절을 중심으로 임진왜란 때 승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전투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운 처영(處英)과 서산의 선지(禪旨)를 이어받았던 태능(太能), 편양파(鞭羊派)의 후계자인 남악·태우(泰宇) 등이 머물렀다.
또한 포광(包光)이 지은 ≪금산사지≫에 의하면, 금산사에서 처음 주지라는 칭호를 사용한 것이 신라 문성왕 때부터라고 하였으며, 그 이전까지는 화상(和尙) 또는 사주(寺主)라고 불렀고, 1592년에는 총섭, 1902년에는 섭리(攝理)라고 불렀다고 한다.
〔당우 및 중요 문화재〕
유물·유적 중 일부 석조물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임진왜란 후의 조형들이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거대한 사역에 대사(大寺)·봉천원(奉天院)·광교원의 3곳으로 나뉘어 있었다. 총 86채의 당우가 임진왜란의 참화로 없어진 뒤 40년 만에 대사지역의 건물만 재건되었고, 나머지 사지(寺址)는 절의 동북쪽 넓은 지역에 유지만 전해지고 있다.
근년에 월주(月珠)가 주지로 취임한 이래 모든 당우와 도량을 정비하여 수도처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약 500m 밖에 위치하는 일주문을 비롯하여, 금강문·보제루(普濟樓)·미륵전·대적광전·대장전·명부전·승당(僧堂)·서전(西殿) 등의 건물을 중수 또는 중건하였다.
또한 문화재로 지정된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22호인 노주, 보물 제23호인 석련대, 보물 제24호인 혜덕왕사진응탑비(慧德王師眞應塔碑), 보물 제25호인 오층석탑, 보물 제26호인 석종, 보물 제27호인 육각다층석탑, 보물 제28호인 당간지주, 보물 제828호인 석등, 보물 제827호인 대장전 등이 있다.
이 중 국보 제62호로 지정된 미륵전은 신라시대부터 미륵본존을 봉안했던 금당이다. 신라 때의 형태나 규모는 알 수 없지만, 현존하는 거대한 불상의 좌대 아래에 있는 철수미좌(鐵須彌座) 등의 형태로 보아 임진왜란 전에는 거대한 미륵존상을 봉안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보물 제476호였던 대적광전은 금산사 내에서 단층 건물로는 가장 웅장한 건물 수계(受戒)·설계(說戒)·설법(說法) 등의 법요를 진행했던 곳이다. 이 법당은 정유재란으로 소실된 뒤 1635년(인조 13)에 중건하여 총 28칸의 큰 불전을 이루었으나, 1986년 12월에 화재로 소실되어 1992년 복원하였다.
대장전은 본래 미륵전의 정면 우측에 위치하여, 미륵전을 장엄하게 하던 정중(庭中) 목탑이었다. 1922년 이 건물을 현 위치로 옮겨 지었지만, 지붕에는 전대 목탑의 잔영이 그대로 남아 있어 복발(覆鉢)과 보주(寶珠) 등의 모습을 살필 수 있다. 전 내에는 석가모니불과 가섭·아난(阿難)의 제자상이 봉안되어 있다.
명부전은 명부시왕(冥府十王)을 봉안한 당우로서 1857년(철종 8)에 비구니 만택(滿澤)이 재건하였으며, 나한전은 방등계단(方等戒壇) 바로 옆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에서 계단을 참배할 수 있으므로 일명 계단예배전(戒壇禮拜殿)이라고도 한다. 나한전의 내부 중앙에는 석가여래삼존불과 16나한상(十六羅漢像)을 봉안하였다.
방등계단 앞에는 1998년에 적멸보궁을 지었다. 일주문은 1975년에 고평용이 건립하였으며, 금강문은 절로 들어가는 두 번째 산문으로서 절을 수호하는 금강역사의 화상을 안치한 곳이다. 보제루는 절로 들어가는 세 번째 문루 구실을 하는 건물로서 법요(法要:법회의식)와 강설당(講說堂)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 밖에도 현존하는 당우로는 성렬이 1939년에 신축한 종각과 1940년에 신축한 중향각(中香閣), 1943년에 신축한 칠성각, 연대 미상의 송대향각(送大香閣)이 있다. 또한 1999년에 금산사 내의 성보문화재를 보관 전시하는 성보박물관을 경내에 지었다.
석조유물 중 미륵전 우측에 있는 방등계단에는 석종부도가 있다. 이 계단에 부도가 있으므로 탑으로 잘못 아는 경우가 있지만, 이는 수계의식을 집행하는 계단이라는 데 특징이 있다.
방등계단 앞에는 오층석탑이 있다. 일반적으로 계단 앞에는 석등을 안치하는 것이 통례로 되어 있으나, 이곳에 석탑을 건립한 것은 불전의 정중탑(庭中塔:법당 앞 뜨락의 탑)을 건립하는 방식으로 불탑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산내 암자〕
① 심원암(深遠庵):금산사에서 동북쪽으로 1.5㎞ 지점에 있다. 창건 시기는 명확하지 않으나 1635년(인조 13)에 수문대사가 금산사를 중창할 당시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인법당과 산성각으로 이루어진 소규모 암자이기 때문에 연혁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심원암의 북쪽 산정 0.5㎞ 지점에는 보물 제29호로 지정된 북강삼층석탑(北崗三層石塔)이 있다.
② 용천암(龍天庵):금산사의 동쪽 기슭 1.8㎞ 지점에 있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지금의 본당인 관음전과 요사는 1974년에 중건한 것이다. 산세가 용이 비천하는 것과 같다고 하여 용천암이라 하였으며, 지금의 법당 자리는 용의 혀에 해당하는 자리라고 한다.
③ 청련암(靑蓮庵):금산사에서 1.5㎞ 거리에 있다. 창건 연대는 미상이나, 정유재란 이전에는 청사굴(靑社窟)이라고 불렀다. 1959년 극락전과 삼성각, 그리고 두 동의 묘사(廟祠:제사를 모시는 사당)로 구성되어 있는데, 1962년 대법화보살이 중창했다.
④ 부도전(浮屠殿):금산사의 동쪽 0.2㎞ 지점에 있다. 이곳에는 혜덕왕사의 탑비를 비롯하여 남악당선사(南嶽堂禪師)의 부도 등 모두 12기의 부도와 2기의 비석이 있다.
지정문화재 목록 및 해설
금산사미륵전(국보 62)
금산사노주(보물 22)
금산사석련대(보물 23)
금산사혜덕왕사 진응탑비(보물24호)
금산사오층석탑(보물 25호)
금산사방등계단 (보물 26호)
금산사육각다층석탑(보물 27호)
금산사당간지주(보 물28호)
심원암북강삼층석탑(보물29호)
금산사대장전(보물827호)
금산사석등(보물 828호)
관련인물
원명대사(圓明大師, 1262~1330)
고려후기의 고승으로 금산사 중창주이다. 속성은 조(趙)씨이며 완산주 함열군에서 대호군 조혁(趙奕)의 이들로 태어나 12세에 금산사의 석굉(釋肱) 법사 문하에서 출가했다. 1294년(충렬왕 20) 승과고시인 오교대선에 응시하여 상상과(上上科)에 합격한 후 불주사(佛住寺)의 주지를 맡았다.
l305년 원나라 안서왕(安西王)이 스님의 계행이 매우 높다는 말을 듣고 사신을 보냄에 따라 원나라로 초빙되어 건너갔으며, 1311년(충선왕 3) 원나라 인종이 원무제의 원찰인 숭은복원사(崇恩福元寺)를 창건하였을 때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제치고 초대 주지로 임명되었다. 스님은 원 황실의 존경을 한 몸에 받게 되어 그 명성이 고려에도 널리 퍼지게 되었다. 이에 충숙왕은 1328년(충숙왕 15) 원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어 스님을 돌려보내줄 것을 요청하였고, ‘혜감원명편조무애국일대사(慧鑑圓明遍照無碍國一大師)’라는 법호를 내려 스님을 귀국하게 하였다. 귀국한 스님은 금산사에 머물면서 절을 중창하게 되었다.
이후 다시 원나라로 건너가 1330년(충혜왕 원년) 2월 28일 숭은복원사에서 입적하였는데, 당시의 세수는 79세였다. 남은 것이라고는 발우와 남루한 가사가 전부였다고 할 만큼 검소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스님의 묘탑과 비석은 중국의 숭은복원사에 전하고 있으며, 행적에 대해서는 『동문선(東文選)』의 「대숭은복원사고려제일대사원공비(大崇恩福元寺高麗第一大師圓公碑)」에 자세히 실려있다.
혜덕왕사(慧德王師, 1038~1095)
고려시대의 고승으로 금산사의 2대 중창주이다. 법속성이 이씨(李氏)이며, 1038년(정종 4) 7월 3일 개성의 남쪽 불령리에서 중서령 이자연(李子淵)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민(民)이고 자는 범위(範圍), 법명은 소현(韶顯)이다. 11세 때 출가하여 진표율사의 법상종을 계승한 해린(海麟) 국사의 제자가 되어 『금광명경』과 『유식론』 등을 배우면서 법상종을 익혀나갔다. 12세 때 부흥사(復興寺)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1061년(문종 15년) 왕륜사(王輪寺)에서 열린 오교대선장(五敎大選場)에서 대덕(大德)의 칭호를 받았으며, 1069년에 중대사(重大師), 1071년에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었다.
1079년 금산사의 주지로 부임하면서 진표율사의 중건 이래 가장 큰 규모로 금산사를 중창하였다. 당시의 자세한 규모는 알 수 없지만 가람의 남쪽에 광교원(廣敎院)을 설립하여 법화현찬(法華玄贊), 유식술기(唯識述記) 등을 비롯한 장소(章疏) 32부 353권을 간행하기도 하였다.
이후 1083년(순종 1)에 개국사(開國寺)와 자운사(慈雲寺)에서 열린 승가고시 시험에서 화주를 맡았으며, 그 해에 승통(僧統)에 임명되어 잠시 현화사(玄化寺)에서 머물기도 하였다. 이후 다시 금산사에 돌아와 주석하다 1096년(숙종 1) 12월 18일 금산사의 봉천원에서 입적하니, 세랍 59세, 법랍 48세였다.
그의 문하에는 도생(導生) 승통을 비롯하여 1천여 명이 넘는 제자들이 있었다고 한다. 숙종(肅宗)은 혜덕왕사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호를 진응(眞應)이라 하여 탑비를 세웠다. 현재 이 탑비는 금산사의 부도전에 있다.
진표율사의 출가 동기 관련 설화
버들가지에 꿰인 개구리
진표스님은 어려서부터 활쏘기를 매우 좋아하였고 뛰어난 활솜씨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늘 활을 들고 들과 산을 누비며 사냥을 하는 것이 그의 일과였다.
그러던 어느 봄날 사냥을 가던 스님이 논둑에 앉아 쉬다가 개구리를 잡았는데, 사냥을 하고 내려오는 길에 가져가리라 생각하며 개구리를 버들가지에 꿰어 물에 담가둔 채 산으로 올라갔다. 사냥을 한 뒤 개구리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그대로 집으로 돌아왔다.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 이듬해 봄이 되었을 무렵, 예나 다름없이 사냥을 하러 가던 스님은 논두렁에서 구슬프게 우는 개구리 소리를 듣게 되었다. 문득 지난해의 일이 떠올라 걸음을 재촉하여 그 자리로 가보았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개구리가 버들가지에 그대로 꿰인 채 울고 있는 것이었다.
‘내가 어찌 해가 넘도록 개구리에게 이런 고통을 받게 했단 말인가!’
스님은 크게 놀라 뉘우치면서 탄식하였고, 이 일로 큰 깨달음을 얻게 되어 금산사로 출가하여 스님이 되었다.
출전 : 『송고승전(宋高僧傳)』「진표전(眞表傳)」
현지교통
1)(시내버스) 김제-금산사행 / 35분 간격 / 50분 소요 김제-금산사경유-청도리행 / 6회 운행 / 50분 소요
2)(시내버스) 전주-청도리 경유-금산사(79-1,2,887,776번 / 22ㅡ30분 간격 / 40분 소요 김제 안전여객 전화 : (063)547-6121 전주시내버스 공동관리 위원회 : (063) 282-8104
도로안내
1)전주 - 712번 지방도로 - 귀신사 입구 - (2.9km) - 삼거리(좌회전) - 200m 지점에 금산사 주차장
2)호남고속도로 금산사IC(또는 김제시) - 712번 지방도로 - 원평 - 금산파출소 앞에서 좌회전 - (4.6km) - 금산사 입구
주변관광지
입 장 료
주차시설
도움전화
금산사 063-548-44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