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신 뜻은(혼인 갱신 미사) 제 1 장 14
친애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미 아시는 바대로 올해 1994년은 하루밖에 남지 않았습니다만 UN이 정한 `가정의 해'입니다. 그것은 오늘날 사회와 나라, 인류 공동체의 기초인 가정이 세계 도처에서 가치관의 전도, 윤리와 도덕, 특히 성 윤리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무너져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을 바로잡지 않으면 모든 사회와 인류의 미래는 암담합니다. 그 때문에 본래 가정을 인간의 생명과 사랑의 보금자리로 가장 소중히 보는 우리 교회는 이에 뜻을 같이하여 `가정의 해'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이 해를 마감하는 이 시기, 오늘 성가정 축일에 여기 명동 성당에서 이 본당뿐 아니라 교구 내 약 700쌍이 되는 부부들이 함께 혼인 서약 갱신을 하는 것은 대단히 뜻 깊습니다. 오늘의 혼인 서약 갱신은 직접적으로는 여러분 부부의 혼인 갱신입니다만, 그 의미는 단지 여러분에게만 국한되지 않고 우리 교구의 모든 가정, 또는 우리 나라의 모든 가정을 대표하여 여러분이 서약 갱신을 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부부 관계는 삼위 일체이시고 사랑이신 하느님을 반영하는 사랑의 관계이어야 합니다. 부부간의 사랑은 실로 모든 인간의 사랑의 근원입니다. 부부가 사랑할 때 부모 자식 사이에 사랑이 있고 형제와 일가 친척 이웃간에 사랑이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 안에 사랑이 메마르면 이것은 근본적으로 가정에 사랑이 없고 부부 사이에 사랑에 금이 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결심이며 의지이다 몇 해 전의 보고에 의하면 서울에 있는 가정 법원을 통하여 합의 이혼으로 헤어지는 부부가 매일 30쌍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하루에 30쌍이면 1년에 1만 쌍이 넘습니다. 그 밖에 재판에 의해 헤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 우리 교회 법원에도 신자인데도 부부간 불화가 극에 달하여 혼인 무효 소송을 제기하는 건수가 날로 늘어 가고 있습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바라는 것이 사랑이 아닙니까? 가장 좋은 것이 사랑입니다. 그리고 서로 사랑할 수 있는 사이가, 또 사랑해야 하는 사이가 인간 관계 중에서는 부부 관계입니다. 하느님은 바로 이 때문에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되어서 모든 인간 관계의 근본이요 모든 인간의 사랑의 근원이 되는 부부 사이에서 이렇게 사랑에 금이 가고 있습니까? 저는 이것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사탄의 유혹에 빠져서 이기주의에 물들고 눈이 어두워 사리 판단을 제대로 할 줄 모르고, 그리하여 사랑이 무엇인지 사랑이 얼마나 인간 생활과 가정을 위해 소중한지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은 결코 감정이나 느낌이 아닙니다. 사랑은 의지에 속하는 것입니다. ME에서 "사랑은 결심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사랑은 결코 감정에서 시작되고 감정이 식으면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참으로 사랑하겠다는 결심에서 출발하여 이 결심을 지키는 의지로써 지속되는 것입니다. 부부가 본시 혼인 서약을 할 때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하거나 병들거나 평생토록 사랑하고 존경하고 신의를 지키겠다고 한 약속은 각자 자기 의사로 자유로운 선택 판단에 의해 결심함으로써 하느님과 일가 친지 앞에서 엄숙히 밝힌 서약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누군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혼인에 있어 사랑이 혼인 서약을 지켜 주기보다도 혼인의 서약이 혼인의 사랑을 지켜 준다." 이 말은 서로간에 사랑이 느껴지지 못할 때일수록 부부는, 나는, 우리는 서로 사랑하기로 서약했다는 것을 잊지 않고 이를 지키려고 노력하면 자연히 부부 사이에 식어 가던 사랑도 다시 살아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즉 부부는 자유 의사로써 사랑하기로 결심했고 사랑하기로 약속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도리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랑입니다. 어느 정도 사랑할 것인가? 즐거울 때나 괴로울 때나, 성할 때나 병들거나 종신토록 사랑한다고 약속했습니다. 전적이요 조건 없는 사랑입니다. 결코 내 마음이 내킬 때에만 사랑하겠다, 기분이 좋을 때에만 사랑하겠다 그런 식이 아닙니다.
상대를 그리스도 보듯이 해야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서 5장에서 부부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 관계에 비교하여 말하면서 "남편 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몸을 바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또 아내 된 사람들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고 섬기듯 남편에게 순종하고 섬겨야 합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내 되는 이에게 남편에 대한 순종과 섬김을 요구하는 표현은 현대 여성에게는 귀에 거슬리는 말일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말씀하신 전체 취지는 남편이나 아내나 다 같이 우리를 위해 죽기까지 하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 사랑하고 서로 존경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참으로 전적인 사랑으로, 조건 없는 사랑으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도 남을 그렇게 사랑하여야 합니다. 특히 부부 사이에서 그러합니다. 이렇게 전적인 사랑을 위해서는 자기 자신을 전적으로 비워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본래 하느님의 이들이요 하느님과 같으신 분이신데 당신을 전적으로 비우시고 낮추셨습니다. 죽기까지 하셨습니다. 부부 관계에도 같습니다. 부부 사랑은 이같이 그리스도처럼 사랑하는 것이요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 제2 독서 골로사이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을 다스리게 되기를 빕니다. 그러려고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아 한몸이 된 것입니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십시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는 모든 이-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면서, 특별히 부부에게 해당되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부부 사랑의 모범이요 거울입니다. 부부를 위해 그리스도는 성체 성사 안에만 현존하지 않고 남편 안에 현존하시고 아내 안에 현존하십니다. 서로가 상대 보기를 그리스도 보듯이 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기 위해, 또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기 위해 그리스도처럼 자기 자신을 완전히 떠나야 합니다. 자신을 완전히 비워야 합니다. 여러분이 오늘의 혼인 서약 갱신을 이런 믿음과 사랑의 정신으로 하여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으로 서로 사랑함으로써 여러분 부부 사이가 참으로 행복되고 자녀들 역시 그 사랑 속에 자람으로써 여러분의 가정이 성가정이 되어 참으로 행복한 삶을 살게 되기를 빕니다. 동시에 여러분을 본받아서 모든 가정이 그렇게 사랑으로 성화되기를 빕니다. 주님은 언제나 여러분 부부와 여러분 가정을 당신의 은총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1994. 12. 30. 명동 대성당)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