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형님 김동한 신부

문성식 2011. 2. 11. 23:42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0] 형님 김동한 신부
 
"한 인간으로서 느끼는 정은 형님만한 분 없어"
 
 
<사진설명>
서울대교구장 착좌식을 마친 김수환 추기경이 명동성당 앞마당에서 형 김동한 신부(왼쪽)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1968년 5월 29일)
 
 
1983년 9월 말 세계 주교대의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로마에 도착했다.
 
그곳에 체류 중인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가 공항까지 마중을 나왔길래 저녁식사를 하러 바티칸 근처 중국집에 들어갔다.
 
식사를 막 마쳤을 때였다. 장 신부는 평소보다 나를 더 어려워하는 자세로 머뭇거리더니 "저…긴히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라며 말문을 무겁게 열었다.
 
"무슨 얘긴데?"
"말씀드리기 송구스럽습니다. 오늘 서울에서 형님 신부님이 돌아가셨다는 기별이 왔습니다"
"……."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푹 파이는 것 같았다. 머리와 가슴이 텅 비어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먼 길을 왔는데 식사라도 제대로 하라고 장 신부가 배려해 준 모양이었다. 부음(訃音)을 공항에서 들었더라면 육신마저 허기져 바닥에 주저앉았을 것이다.
 
형님 김동한(가롤로) 신부님. 이 세상에서 내 마음에 가장 큰 빈자리를 남겨 두고 가신 분이다. 나와 어머니 사이의 천륜지정(天倫之情)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뭐라 그럴까, 한 인간으로서 피부로 느끼는 정은 형님만한 사람이 없었다.
 
형님은 참으로 정이 깊은 분이다. 어린 시절, 어머니가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행상을 나가시면 나는 빈 집에서 세살 터울인 형님하고 늘 같이 지냈다. 형님이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먼저 소신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떨어져 본 적이 없다. 사내 아이들은 싸우면서 큰다고 하는데 형과 싸운 기억도 없다. 
 
그리고 15살 때까지 형님한테 "야, 너"하는 식으로 반말을 했는데도 워낙 유순한 성격이라 그 점에 대해 별 말이 없었다. 형님이라기보다 단짝동무였다.
 
형님의 소신학교 첫 방학 때였을 게다. 오랜 만에 집에 온 형님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예전같이 형님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서 방학 내내 뛰어 놀았다. 그런데 어느날 학교에 갔다오니까 형님이 집에 없었다. 형님도 개학에 맞춰 소신학교로 돌아간 것이었다. 마음이 휑하니 뚫린 것 같은 공허함을 그때 처음 느껴 보았다.
 
부음을 들었을 때도 어린 시절에 느꼈던 공허함이 엄습했다. 회의 때문에 로마에 한달 머물면서 낮이건 밤이건 형님 생각을 한시도 떨치질 못했다. 고작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회의를 마치고 숙소에 돌아와 형님과 친했던 분들에게 부음을 전할 겸 편지를 쓰는 것이었다. 형님에 대한 정을 글로 옮길 때면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그런 식으로라도 애달픈 마음을 달래야 했다.
 
출국 전 병원에서 뵌 게 마지막이 될 줄이야…. 형님은 지병인 당뇨병이 악화돼 다리 절단수술을 받아야 했다. 몸이 성치 않은데도 당신 몸은 돌볼 생각을 않고 결핵환자들을 위해 뛰어다니시느라 병이 그 지경까지 악화된 것이다.
 
형님은 당뇨 합병증으로 결핵에 걸려 마산 국립요양원에서 치료를 받는 동안 결핵환자들의 비참한 생활을 보고 그쪽 방면으로 뛰어들었다. 천성이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외면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특히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을 돕는 일에는 앞뒤를 가리지 않으셨다.
 
형님이 1976년 운영난에 허덕이는 대구 결핵요양원을 인수할 때만 해도 사회복지사업에 대한 교회 관심은 매우 미약했다. 그런 여건에서 빚에 쓰러져 가는 시설을 맡아 운영했으니 고생이 오죽했겠는가.
 
언젠가 요양원에서 들렀는데 형님이 요양원 확장 계획을 말씀하셨다. 내가 "건강도 안 좋은데 무모하게 일을 벌이는 것 아닙니까? 수용 환자들 숫자를 줄이세요"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형님은 "오갈 데는 고사하고 그냥 두면 죽을 게 뻔한 중환자들이 도와달라고 하는데 어떻게 외면하겠느냐"며 내 조언을 일축하셨다.
 
형님 약점은 바로 이 착한 마음에 있다. 남의 사정 다 들어주고, 때로는 사람을 너무 믿어서 속기도 하셨다. 이런 선한 어리석음 때문에 교회 어른들과 주변 친지한테서 진짜 어리석은 사람으로 오해를 받아 소외당하는 시련을 겪기도 하셨다. 그럴 때마다 형님은 묵주를 돌리면서 성모님께 의탁하셨다.
 
형님은 당뇨병을 다스리지 못해 시력이 점점 약해지고 두 다리가 마비되어 갔다. 그런 몸으로 사방팔방 후원자들을 찾아다녔으니 그 걸음이 얼마나 무겁고 고달팠을까. 그런데도 그런 심경을 한번도 내비치질 않으셨다.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련해진다.
 
내가 주교가 된 후부터는 형님과 접촉도 뜸했다. 어떤 해에는 한두번 스쳐 지나가는 정도였다. 주교관 출입이 행여나 이 동생에게 누가 될까봐 일부러 피하신 것이다.
 
형님은 나와 얼굴이 무척 닮았다. 사람들이 거리에서 "아이고, 추기경님!"하며 반갑게 인사를 하면 주위 시선이 모두 쏠리는 터라 여러 번 당황한 적이 있다고 말씀하신 기억이 난다.
 
하지만 공부는 형님이 훨씬 잘하고 마음도 착했다. 형님은 학교성적이 늘 '갑(甲)'이었는데 난 '을(乙)'에서 맴돌았다. 어린 마음에 그런 형님이 자랑스러웠다.
 
내가 학병에 끌려갈 때 형님은 전장으로 나가는 이 동생의 손을 잡고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셨다. 전쟁이 끝나 귀국선을 타고 돌아왔을 때도 그러셨다. 여러 날 굶은 채 부산항에 내려 밥 한 그릇 얻어먹으려고 찾아간 범일동성당에서 기적적으로 형님을 만났을 때의 감격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형님은 그때 범일동성당 보좌신부였다.
 
로마에서 돌아오자마자 형님을 모신 대구 남산동 성직자 묘역으로 내려갔다. 소박한 분묘 앞에 작은 나무 십자가가 꽂혀 있었다. 그때서야 형님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리고 요양원에 들러 형님이 쓰시던 방에 가보았다. 방은 내 마음처럼 텅 비어 있었다. 그날 밤 형님의 체취가 남아있는 그 방에서 잠을 잤다.
 
참으로 고마운 것은 지금도 많은 분들, 특히 당시 형님 복지사업을 후원해 주었던 '밀알회' 형제자매들이 기일(9월28일)이 돌아오면 한데 모여 형님을 추모하는 것이다. 나도 매년 기일에 내려가 미사를 함께 봉헌하는데 그토록 많은 이들이 20년을 한결같이 한 사제를 기억해주는 게 놀랍고 고마울 따름이다.
 
형님은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치는 것보다 더 큰사랑은 없다"(요한 15, 13)는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다 가신 분이라고 믿는다.
 
[평화신문, 제773호(2004년 5월 16일), 정리=김원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