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내가 만난 마더 데레사 수녀

문성식 2011. 2. 11. 23:39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48] 내가 만난 마더 데레사 수녀
 
"사랑의 등불을 켜서 어두워가는 세상 밝혀야"
 
 
<사진설명>
김 추기경이 한국을 처음 방문한 마더 데레사 수녀에게 뭔가를 열심히 설명하고 있다.(1981. 5. 3~6)
 
 
'살아있는 성녀의 보디가드 김 추기경'
 
1981년 5월3일 마더 데레사 수녀님이 방한하셨다. 그날 오후 공항으로 수녀님을 마중 나갔는데 어찌나 인파가 많이 몰렸던지 팔자(?)에도 없는 경호원 노릇을 해야 했다. 수녀님을 감싸 안다시피하고 인파를 헤치면서 공항을 빠져 나가는 내 모습을 보고 한 신문기자가 '보디가드 김 추기경'이라고 썼다.
 
물밀듯 밀려드는 기자들과 환영객을 막지 않으면 70세가 넘은 150㎝ 단신 수녀님이 다치실 것만 같아 보디가드로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한국에 머문 3박4일 동안 우리 가슴에 '사랑의 불'를 놓았다. 가는 곳마다 감동적 연설로 헐벗고 굶주린 이들에 대한 사랑을 역설하셨다. 1979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후부터 '살아있는 성녀', '빈자(貧者)의 어머니'로 추앙받는 터라 신문방송사 취재경쟁도 대단했다. 기자들은 수녀님 말씀을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보도하면서 전국에 사랑의 메시지를 전달했다.
 
다음날 서강대 강연장으로 가는 도중 신자들이 몰려드는 바람에 수녀님이 하마터면 다칠 뻔했다. 그래서 마이크를 잡고 "오늘 우리는 데레사 수녀님 사랑에 취한 것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면서 열기를 식혔다. 그때 사람들이 며칠 동안 수녀님을 모시고 다닌 나를 꽤나 부러워했을 게다. 어디를 가건 신자, 비신자 가릴 것 없이 그분 옷자락이라도 만져보고 싶어 아우성이었으니 말이다.
 
데레사 수녀님은 본래 카메라 플래시를 무척 싫어하는 분이다. 그런데도 기자들이 몸을 부딪히면서 플래시 세례를 퍼부어도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으셨다. 언제 어디서건 주름 패인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가까이서 뵙건대 누구에게 보일려고 짓는 미소가 결코 아니었다.
 
들은 얘기지만 수녀님은 "카메라 플래시를 거부하지 않을 테니 그때마다 연옥영혼을 한명씩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청했다고 한다. 대구 희망원에 내려가셨을 때 그 얘기가 화제에 올랐는데 수녀님이 "연옥영혼을 위해 기도를 너무 많이 해서 연옥이 텅텅 비었을 것"이라고 농담을 던져 한참 웃었던 기억이 난다.
 
데레사 수녀님은 한국 첫 방문이셨다. 그러나 난 이미 그 전에 호주 맬버른 세계성체대회에서 그분의 명성과 열정을 확인했다. 그때 야외 강연회에서 들은 생명존중 메시지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하늘에는 별이 많아서 아름답습니다. 들판도 꽃이 많이 필 때 아름답습니다. 인간 세상도 어린이가 많을 때 아름답습니다. 하늘에 별이 많다고, 들에 꽃이 많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인간은 왜 어린 생명이 우리 삶을 더 어렵게 만든다고 불평하면서 낙태를 합니까?"
 
데레사 수녀님은 정말 그리스도의 사랑을 깊이 사신 분이다. 가난·불평등·전쟁 등 인간 사회가 안고 있는 온갖 문제의 궁극적 해답을 갖고 계셨다. 사람들이 수녀님을 보고 열광한 이유도 그 해답, 다시 말해 그리스도의 사랑을 갈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녀님은 서강대 강연회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굶주림은 먹을 것에 대한 굶주림만을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헐벗음은 옷을 걸치지 못한 헐벗음만을 뜻하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에 대한 굶주림과 인간 존엄성이 벗겨진 상태의 헐벗음이야말로 현대를 사는 우리 모두가 걱정해야할 중요한 과제입니다."
 
데레사 수녀님은 굶주리고 헐벗은 사람들 속에서 가난하게 사셨다. 가난한 이들 가운데 계신 하느님을 보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나도 독일 유학에서 돌아온 후 가난한 이들과 부대끼면서 살고 싶은 열망에 몸살을 앓았으나 하느님께서 그 길로 이끄신다는 확신을 갖지 못했다. 오랜 번민 끝에 결정을 내리려는 순간에는 내가 과연 가난한 사람들보다 더 가난하게 살면서 그들의 눈물을 닦아줄 자신이 있는가 하는 의문이 들어 주춤했다. 그러다 주교로 임명돼 망설임은 흐지부지되어 버렸다. 주교직도 하느님의 부르심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은 데레사 수녀님이 증거한 그리스도의 사랑이 어떤 사랑인 줄 어렴풋이라도 알고 있다. 그분이 들었던 '사랑의 등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안다. 문제는 그 사랑을 얼마나 충실하게 실천하느냐이다. 모든 사람이 데레사 수녀님처럼 사랑을 실천할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랑은 큰 사랑만 있는 게 아니다. 고통 중에 있는 이웃을 위해 기도해주고, 옆 사람에게 따뜻한 미소 한번 지어 보이는 것도 사랑이다. 마음에서 미움을 털어버리고 화해하는 것도 사랑이다. 그런데 작은 사랑이라도 실천하려면 기도해야 한다.
 
나 역시도 일본에 대해 미움 정도가 아니라 적개심을 품었던 때가 있다. 외국에 그렇게 드나들면서도 일본항공(JAL)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고 일제 물품은 방에 들여놓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한 국가를 그토록 미워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기도하기 시작했다. 내 마음에서 미움과 증오를 씻어 달라고 말이다. 하느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사람들에게 상처 준 일도 많고, 누군가를 미워해 본 적도 있다. 인간이기에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그래도 고해성사나 기도를 통해 잘못을 뉘우치면서 살아왔기에 사랑을 잃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생각나는 신부님이 한 분 있다. 교회 음악가로 이름을 날린 고 이문근 신부님이다. 이 신부님이 병원에 입원하셨을 때 병문안을 간 적이 있는데 그날따라 나를 반기면서 말씀을 잘 하셨다. 한때 나를 만나기도 싫어하셨던 분이다. 이 신부님은 "이제 누구를 미워하는 마음이 사라졌다"면서 옆방에 입원 중인 양기섭 신부님을 일부러 찾아갔다고 하셨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두 분은 서로 얼굴조차 마주보기 싫어하는 사이였다. 난 이 신부님을 통해서 용서와 화해의 참 모습을 보았다.
 
데레사 수녀님은 "기도는 신앙을, 신앙은 사랑을, 사랑은 가난한 사람을 위한 봉사를 낳는다"고 말씀하셨다. 각자 사랑의 등불을 켜서 어두워가는 이 세상을 밝히라는 것이 그분이 남긴 메시지다. 등불 크기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옆 사람과 화해하고 용서하는 것도 아름다운 사랑이다.  
 
[평화신문, 제771호(2004년 5월 2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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