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1] 가난한 이들과 살고 싶었는데
"꺼칠한 손 잡아 줄 땐 위로하기보다 위로 받아"
<사진설명>
현장체험을 하기 위해 강원도 태백 사북탄광에 찾아간 김수환 추기경(1985년 8월 27~29일).
1981년 작고하신 기후고(메리놀외방전교회) 신부님 병문안을 갔을 때 일이다.
병간호를 하는 아주머니가 기 신부님이 평소 입으셨던 속옷 바지를 옷장에서 꺼내 보여주었다. 구멍이 숭숭 뚫린 데다 신부님이 직접 바느질을 하셨는지 엉성하게 꿰맨 흔적이 여러 군데 있었다.
그 속옷은 내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복음적 청빈의 표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몹시 부끄러웠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한국의 어느 신부가 그처럼 낡은 속옷을 입어 본 적이 있겠는가.
서울대교구장으로 있으면서 내 신앙과 생활이 과연 복음적인가 하는 질문을 스스로 던져보곤 했다. 대답은 '아니다'에 가까웠다. 특히 사제로서 지향해야 할 복음적 청빈생활에는 분명하게 '아니다'였다. 내가 좋아하는 설교 주제 가운데 하나가 복음적 청빈인데도 말이다.
주교관 집무실에 앉아서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주교관을 떠나서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살 수는 없을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은 열망에 몸살을 앓았던 본당신부 시절이 그리워서 더 그랬을 게다. 높은 자리라는 게 간혹 창살없는 감옥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가난한 사람들과 웃고 울었던 본당사목 시절을 떠올리면서 답답한 마음을 달랬다.
그러나 가난한 동네에 들어가 사는 게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적어도 비서신부와 끼니를 챙겨줄 식복사는 따라와야 한다. 여기 저기 다니려면 승용차도 필요하다. 수시로 내방하는 손님들을 맞이하려면 응접실이 넓어야 하고 주차장도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집이 커야 한다.
결국 가난한 이들과 함께 살고 싶은 소망은 실현 불가능한 꿈에 불과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내 꿈은 물거품처럼 꺼지고 다시 추기경 일상의 자리로 돌아왔다.
70년대 중반쯤 빈민촌에 뛰어든 정일우(예수회) 신부님과 고(故) 제정구 의원이 양평동 철거민들을 이끌고 경기도 시흥시 신천리라는 곳에 이주했다. 철거민 집단이주는 마치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가나안 땅을 찾아가는 여정과 같았는데 그 과정에서 내가 도움을 줬다.
정 신부님은 정착촌 복음자리에 내 방을 마련해 주었다. 그러나 그곳에 여러번 가 보기는 했으나 자고 온 적은 한번도 없다. 공동 화장실을 사용해야 하는 등 불편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라서 자고 가라고 할 때마다 슬금슬금 꽁무니를 뺐다.
동대문 평화시장에 있는 준본당을 사목방문차 가본 적이 있다. 그곳 신부님과 신자들이 시장구경을 시켜준답시고 나를 반시간 남짓 끌고 다니는데 정신이 없어서 혼났다. 비좁고 공기가 탁한 시장통에서 삶을 꾸려가는 상인들, 또 시장을 성당처럼 여기고 사목하는 신부님이 정말 대단해 보였다. 나라면 사목은커녕 한달도 못가서 병이 나 쓰러졌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가난한 사람들과 살고 싶은 꿈을 실행에 옮기지 못한 이유는 추기경 직책 때문이 아니라 용기가 없어서라는 게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을 낮추고 비우지 못했음을 자책하지 않을 수 없다. '사랑'이란 단어를 입에 달고 살고, 그토록 자주 사회복지시설을 방문했으면서도 나는 왜 스스로 몸을 굽혀 장애인들 수발 한번 들어줘 보질 못했는가. 조금 후회스럽다. 지금은 그런 봉사를 하고 싶어도 누가 이 힘빠진 늙은이에게 일을 맡기겠는가.
그러나 잠시라도 가난한 사람들 속에 들어가 머문 시간은 행복했다. 성탄 전야에 산동네와 소규모 사회복지시설 같은 곳에 기쁜 마음으로 찾아간 이유이기도 하다. 또 그들에게 보탬이 될 것 같으면 어떻게 해서든지 도와주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
정일우 신부님이 철거민들을 이주시킬 부지를 물색할 때도 내가 정부 모처에 시쳇말로 '빽'을 좀 썼다. 어느날 정 신부님이 "대한민국이 어디 있습니까? 이 나라에 국민이란 존재가 있기나 하는 겁니까?"라며 분노했다.
자초지종을 들어보니까 정 신부님은 발품을 팔면서 땅을 물색하러 다녔지만 쓸만한 땅은 전부 힘있는 사람들이 차지하고 팔지를 않아 애를 먹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정부측에 "도시개발에 쫓겨난 힘없는 서민들은 내팽개치고 과연 누굴 위해 일하겠다는 정부냐"고 항의했더니 금방 일이 성사됐다.
그 즈음에 예수의 작은 자매들의 우애회 수녀들이 가난한 사람들과 쓰레기를 주우면서 살아가는 난지도 쓰레기장에도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그 척박한 삶의 현장에서 살아가는 수녀들 얘기를 들으면 '나도 한번 가봐야지'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더구나 내가 가서 가난한 사람들 손 한번이라도 잡아주면 큰 힘이 된다고 하기에 늘 기쁜 마음으로 그런 현장을 찾아다녔다. 나 역시 그들의 꺼칠한 손을 잡아 줄 때는 내가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위로받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 삶 속에 하느님이 머물러 계셨기 때문일 것이다.
사북탄광 현장체험(1985년)은 색다른 경험이었다. 아시아 사회주교연수회(BISA) 프로그램에 따라 주교들이 현장체험을 하기로 했는데 나는 '인생 막장'이라는 탄광을 선택했다. 그때만 해도 탄광 붕괴사고가 툭하면 발생해 구조현장에서 울부짖는 가족들 모습이 TV 뉴스에 자주 비쳤다. 또 탄광촌 부인들 사이에 춤바람이 나서 사회 문제가 될 때였다.
막상 갱까지 기어들어가서 탄을 캐는 척 해보니까 이건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몸을 곧추세울 수도 없이 좁은 탄구덩이에서 도시락을 까먹으며 하루 7시간, 8시간씩 일한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독일 유학 시절에 한국인 노무자들과 막장에 가본 적이 있지만 한국 탄광은 작업환경, 특히 안전 면에서 너무나 열악했다. 나 같은 사람은 한나절은 고사하고 한시간도 못 버티고 뛰쳐나올 정도였다.
갱에서 나와 부인들을 만난 자리에서 "남편은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저 고생인데 부인들이 춤이나 추러 다니면 되겠느냐"며 야단(?)을 치고 돌아왔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슬퍼 우는 사람들을 수없이 찾아다녔지만 그들과 삶을 나누지는 못했음을 부끄러이 고백한다. 돌아보건대 난 인간 문제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깊었다.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인간에 대한 사랑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인간을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몸과 피까지 내어주셨는데 난 그 흉내도 내보지 못했다.
내가 죽어 하늘나라에 가면 하느님한테 꾸지람들을 잘못이 그 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평화신문, 제774호(2004년 5월 23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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