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시성식

문성식 2011. 2. 11. 23:44
[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52] 200주년 기념 신앙대회와 시성식
 
한국교회 최대 경사..가슴 벅찬 감동
 
 
<사진설명>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절두산 순교성지에 들러 순교자 유해를 참배하고 있다.(1984년 5월 3일)
 
 
교황님이 한국을 첫 방문하신 때는 1984년이지만 주교단은 이미 4년전부터 바티칸에 방한을 요청해 놓고 마음 속으로 준비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대리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 한국교회 창립 200주년(1984년) 기념행사에 참석하시고, 그 자리에서 순교복자 103위까지 성인 반열에 올려 주신다면 200년 역사의 최대 경사요, 가슴 벅찬 감동의 순간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교황 방한과 시성식이 최종 결정되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애썼다. 특히 장익 신부(현 춘천교구장) 노고를 잊을 수 없다. 마침 로마에서 공부하고 있던 장 신부는 유창한 외국어 실력으로 내 명의의 긴급 서한과 공문을 수시로 작성해서 바티칸에 보냈다. 내가 장 신부를 하도 요긴하게 부려먹어서 "장 신부가 지금 로마에서 공부하는 건 하느님 섭리야"라고 위로한 적이 있다.
 
장 신부는 또 방한을 앞둔 교황님에게 한국어를 직접 가르쳐 드렸다. 그 덕분에 교황님은 지금도 한국 순례단을 만나면 우리말로 "찬미예수", "감사합니다"라고 인사하신다.
 
사실 교황 방한 얘기는 전임 교황 바오로 6세 재임시에도 잠깐 나왔다. 필리핀 방문을 준비 중인 바오로 6세에게 한국에 들러주실 것을 요청했더니 교황님은 "마음은 간절하지만 남북대치 상황에서 정치적으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다"면서 아쉬워하셨다.
 
교황님이 어느 나라를 가시건 상징적 의미는 클 수 밖에 없다. 또 사목적 방문이라고 강조해도 어떤 사람들은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정치적 해석을 하려고 한다.
 
다행히 84년 방한에 그런 문제는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200주년 기념사업으로 역점을 둔 103위 시성 추진건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시성절차 가운데 기적심사라는 것이 있다. 시성 대상자의 기도나 행위 등으로 인해 어떤 사람의 병이 나았다던지 하는 기적이 있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혼란한 박해시대에 무슨 기록이나 증언이 남아 있어 기적을 증명할 수 있겠는가. 내가 기적보고 관면 청원서를 교황님께 직접 올렸다.
 
"하나뿐인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신앙을 증거한 신앙 선조들 사이에서 왜 기적이 일어나지 않았겠습니까. 다만 구체적으로 증명하지 못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순교자들로 인한 기적은 지금도 계속 일어나고 있습니다. 100년에 걸친 박해 잿더미에서 교회가 다시 일어서고, 복음이 퍼져나가 한해 성인 영세자가 10만명에 달하는 것이 기적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황님은 그 영적 기적을 인정하시고 기적심사를 면제해 주셨다.
 
5월 3일 오후 2시 11분. 드디어 교황님이 김포공항에 도착해 모습을 드러내셨다. 교황님은 비행기 트랩에서 두 팔을 활짝 벌리시고 순교의 피로 얼룩진 한국교회, 고난한 역사의 땅 한국을 품에 안으셨다. 공항뿐만 아니라 TV로 생중계된 전국에서 "VIVA PAPA!(교황 만세!)" 환호가 물결쳤다.
 
교황님의 4박 5일 순례여정은 서울 시내로 진입하는 길목에 있는 절두산 순교성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순례의 발걸음은 광주, 대구, 부산으로 계속 이어졌다. 교황님을 수행하는 동안 감동적 장면을 여러번 목격했다.
 
교황님은 대구로 내려가는 비행기에 올라 몇 마디 말씀을 나누시고는 곧바로 성무일도를 펴고 기도에 들어가셨다. 뒤칸에 앉은 수행원들은 뭘 하는가 돌아보았더니 마찬가지로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 비행기가 아니라 성당 같았다. 기도하면서 순례하는 교황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전남 소록도에서도 나환우들을 껴안고 위로해 주셨다.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하려는 순례였다.
 
교황님도 한국 방문이 무척 기쁘셨던 것 같다. 5일 저녁 늦게 숙소(주한 교황대사관)에 돌아와 식사를 하시던 교황님은 "내일은 103위 성인이 탄생하는 기쁜 날이니 행사가 끝나면 점심때 잔치를 벌이자"면서 주한 교황대사에게 점심식사를 특별히 잘 차려달라고 주문하셨다.
 
교황 방한의 최대 하이라이트는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된 200주년 기념행사와 시성식이었다. 교황님은 6일 아침 행사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광장 인파가 눈에 들어오자 "정말 100만명이 모였군요"라며 놀라움을 표시하셨다. 100만명이 모였다는 아침뉴스를 누군가 귀뜸해 준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가 사전에 수용가능 인원을 추산해 본 바로는 광장에 100만명이 들어갈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100만명은 안되고 80만명쯤 될 겁니다"라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교황님은 "아닙니다. 뉴스에 나온대로 100만명은 됩니다"라고 하시는 게 아닌가. 그 순간 '이크! 내가 괜한 말씀을 드렸구나'라는 생각이 들어 입을 닫았다. 교황님은 그 장면이 감격스러웠던 게다. 여의도 광장 열기는 한국교회가 장차 '동방의 빛'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주고도 남을 만큼 대단했다.
 
교황님은 시성식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00년에 걸친 치명(致命)의 기반 위에서 성장하는 한국교회를 보고 감탄했습니다. 이는 틀림없이 순교자들의 영웅적 증거의 열매입니다…"
 
행사는 완벽하게 끝났다. 교황님도 "이번 행사는 행사라기보다 하나의 사도적 실천이고 증거였다"면서 행사 준비·진행 관계자들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나는 행사 두달 전부터 담배를 끊었다. 만일 그러지 않았더라면 교황님을 수행하는 동안 담배가 피우고 싶어 무척 고생했을 게다. 고 김남수(전 수원교구장) 주교님은 그것도 모르시고 "담배 안 피우시는 교황님 옆에서 얼마나 고생이 많냐"면서 놀렸다. 그러나 금연 결심은 시성식 직후에 무너졌다.
 
그날 대사관에서 점심식사를 하고 나오는데 시성식 전례를 맡았던 최윤환 몬시뇰이 담배를 피우면서 한 개피 권하는 게 아닌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오늘 같이 기쁜 날 안 피우면 언제 피겠어. 한대 줘요."라고 말하고 다시 담배를 입에 댔다.
 
난 많이 필 때는 하루에 두갑을 피우는 골초였다. 그날 다시 입에 대기는 했지만 그해 9월에 아는 의사 선생님 말을 듣고 완전히 끊었다. 그분이 알려준 대로 담배 끊는 방법은 간단하다. 요즘 금연 때문에 고생하는 흡연자들에게 좋은 정보가 될 것이다.
 
그게 뭐냐면, "끊는 것이다". 결심하고 끊으면 된다. 나처럼 책상에 담배와 라이터를 그냥 놔두고 금연에 성공한 사람도 드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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