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기경 김수환 이야기 49]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대회
사제단 입장 때 하늘에 십자가... 등져서 못봐
<사진설명>
여의도 행사장 상공에 나타난 십자가 형상 빛. 빛이 자로 잰듯 가늘고 또렷하다.
조선교구 설정 150주년 기념 전국 신앙대회(1981년 10월 18일).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여의도 상공에 십자가가 나타나서 한동안 화제가 됐던 행사라고 하면 대부분 기억할 줄로 안다.
이날 신앙대회는 말 그대로 교황청이 150년 전 조선 포교지를 대리감목구(代理監牧區)로 설정한 것을 기념하고 우리 신앙의지를 새롭게 다지는 행사였다. 조선교회는 그 전까지만 해도 중국 북경교구에 속해 있었다. 조선교구(대리감목구) 설정은 박해로 풍비박산이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려는 교황청 의지가 작용한 것으로, 정식 교계제도를 갖추고 걸음마를 시작했다는 데 의미가 있다.
그건 그렇고 막상 행사 준비작업에 들어가니까 모든 게 막막했다. 교구 차원에서야 여러번 신앙대회를 열었지만 전국 규모 행사는 처음이라서 걱정부터 앞섰다. 한국교회은 그처럼 큰 행사를 치러본 경험이 아예 없었다. 더구나 행사 장소가 여의도광장이라서 외부 사람들 눈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행히 모든 주교님들이 한마음이 되어 협력해 주셨다. 신부들과 평신도들이 밤을 새워가면서 일한 덕분에 준비를 순조롭게 마칠 수 있었다. 30만~40만명쯤 참석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 도와주지 않으시려는지(?) 전날부터 가을비가 줄기차게 쏟아졌다. 당일 새벽에 비가 그쳐 천만다행이었다.
전국 신자들이 이른 아침부터 대회장으로 집결하는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사방에서 모여드는 신자들 행렬이 끝이 없었다. 대회장 주변까지 인산인해(人山人海)였다. 그 넓은 여의도 광장이 행사 2시간 전에 꽉 차서 준비위원회측에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밤새 기차를 타고 올라온 영호남 지방 신자들은 영등포역 대합실에 쪼그려앉아 아침 도시락을 먹고 여의도로 줄지어 걸어왔다.
준비위원회는 참석인원을 80만명이라고 공식 발표했다. 새벽까지 내린 비로 인해 대회장 바닥이 축축하고 날씨마저 쌀쌀해서 신자들 고생이 무척 컸을 게다.
오전 10시 기수단과 사제단을 앞세우고 중앙 제단으로 입장할 때였다. 사제단에 이어 주교단이 막 단상에 오르는 순간 양 옆에 있는 3000여명 성가대석이 갑자기 웅성웅성거렸다. 사람들이 목을 빼고 하늘을 쳐다보는 것 같았는데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제단에 오르다 말고 뒤를 돌아볼 수도 없는 노릇이고. 잠시 무슨 소동이 일어났겠거니 생각했다.
그때 구름 속에서 십자가가 나타났다는 얘기는 행사를 마치고 주교관에 돌아와서 들었다. 어느 수녀님이 흥분한 어조로 "대회장에서 구름을 뚫고 나온 십자가를 보았다"고 말했다. 난 "무슨 헛것을 봤길래 그러냐"며 대수롭지 않게 받아 넘겼다. 그날 저녁 롯데호텔에서 열린 150주년 기념 리셉션에서도 화제는 온통 십자가 얘기였다. 평소 허튼소리 안하는 사람들까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똑같은 얘기를 하니 안 믿을 수도 없고….
얘기를 종합하면 이렇다. 행사가 시작되자 신자들은 뒤로 돌아서서 사제단과 주교단을 영접하고 있었다. 중앙 제단 양 옆에는 수녀들과 성가대원들이 서 있었다. 그때 주교단 뒤편 동남쪽 하늘에서 구름 사이로 십자가 형상 빛이 1분 가량 나타났다가 사라졌다. 누군가가 용케 그 십자가를 찍은 사진을 나중에 보니까 빛이 자로 잰듯 가늘고 선명했다. 누가봐도 영락없는 십자가였다.
글쎄다. 하늘이 개는 과정에서 우연히 나타난 형상인지, 아니면 정말 하느님의 어떤 뜻이 담긴 십자가 발현인지 누가 알겠는가.
그런데 왜 하필 십자가가 그 순간에 나타나 나는 보지 못했단 말인가. 정말 십자가 발현이라면 난 일생 일대의 순간을 놓친 것이다. 사람들이 한동안 "추기경님도 그 십자가를 보았느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너는 나를 보고야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 29)는 성구를 읊으면서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난 그 십자가를 하느님 축복이라고 믿고 싶다. 하느님은 조선 말엽 중국에서 들여온 신앙의 씨앗이 박해의 비바람을 이겨내고 풍성하게 열매맺은 것을 보시고 무척 기쁘셨을 것이다. 대견스러운 어린 아들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버지 마음 그 자체였을 것이다. 걸음마를 떼기도 전에 불어닥친 박해의 광풍(狂風)을 이겨내고 어엿하게 성장한 한국교회가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대견스러웠겠는가.
한국교회 역사는 수난의 역사요, 순교의 역사다. 불모지에 뿌려진 신앙의 씨앗이 싹트고 꽃피는 과정에서 수많은 신앙선조가 피를 흘렸다. 인간에게 죽음보다 더 두려운 것은 없다. 그런데도 신앙선조는 배교를 거부하고 피를 흘리면서 죽어갔다. 하느님을 위해서 목숨까지 기꺼이 바쳤던 신앙선조의 순교혼이 바로 한국교회의 얼이다.
한국교회는 일제시대에도 여러 형태로 탄압을 받았다. 북한교회는 해방 직후부터 말살되다시피하는 고난의 길을 걸었다. 내 소신학교 동기생 3명도 북한 땅에서 순교했다. 6·25 전쟁 후에는 가난과 싸우면서 시대징표를 읽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리고 협박과 편견에 굴복하지 않고 이 나라 민주화운동의 선두에 섰다.
한국교회가 걸어온 길은 2000년전 예수 그리스도께서 걸으신 길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도중에 과오(過誤)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충실히 따랐다(마태 10, 38)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미래다. 사람이건 조직이건 위험신호는 자만심에 도취되어 있을 때 나타난다. 150주년 기념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교회사를 기릴뿐 아니라 민족의 현재를 변혁시키는 누룩이 되고, 민족의 미래를 밝히는 빛이 되고자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세상의 빛과 땅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날 행사가 끝난 여의도광장에는 휴지 한 조각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신자들이 식전 공동 고해성사 때 받은 보속을 실천하느라 쓰레기를 모두 가져간 것이다. 이 또한 내내 화제가 되었다. "천주교는 뭐가 달라도 다르다"는 얘기가 심심찮게 들려왔다. 사람들이 천주교에 대해 호감을 갖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평화신문, 제772호(2004년 5월 9일), 정리=김원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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