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토릭 성지

서울 관악구***신림동 삼성산ㅡ한국 천주교 순교자 聖地 순례ㅡ삼성산(三聖山) 순교자 성지

문성식 2022. 2. 20. 08:13

신림동 삼성산 천주교 순교자 성지(三聖山 天主敎 殉敎者 聖地)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유해가 1836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이다.


본래부터 삼성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던 이곳은 앞날을 예고하듯 세 분의 순교 성인이 묻힘으로써 명실공히 삼성산(三聖山)의 품위를 갖추게 되었다.


삼성산이라는 명칭은 신라 때의 명승 원효(元曉) ·의상(義湘) ·윤필(尹弼) 등 3명이 수도한 곳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고 하는 설과 고려 말기에 불교계를 이끌던 나옹(懶翁-1320∼1376), 무학(無學-1327∼1405)과 인도승려 지공(指空-?∼1363) 스님 등이 이곳 삼성산에 올라가 각기 자리를 잡고 수도, 전진했다는 연고로 삼성산(三聖山)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삼성산 천주교 순교자 성지 위치도


▲새남터에서 순교한 세 분 성직자 순교 성인의 유해가 모셔져 있던 곳


서울 관악구에 있는 삼성산은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고 순교한 세 명의 성직자인 앵베르(Imbert, 范世亨, 1796~1839, 라우렌시오) 주교를 비롯하여 모방(Maubant, 羅伯多祿, 盧, 1803-1839, 베드로) 신부와 샤스탕(Chastan, 鄭牙各伯, 1803~1839, 야고보) 신부가 순교 후 20여 일간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다가 마포구 노고산을 거쳐 약 60년간 안장되었던 거룩한 곳이다.


삼성산의 유래 또한 설이 구구하다. 보통 원효, 의상, 윤필의 세 고승이 신라 문무왕 17년(677년)에 조그마한 암자를 짓고 수도에 전진하던 곳이 삼막사의 기원이며, 아울러 삼성산의 산명도 이 세 고승을 승화시켜 삼성산(三聖山)이라 칭했다는 설이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다.


삼성산은 1901년에 위의 세 순교자의 유해가 발굴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1970년에 사적지로 조성되었다. 1836년 이래 조선에 들어와 활동하던 모방 신부와 제2대 조선교구장 앵베르 주교, 그리고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은 기해박해가 일어나면서 앵베르 주교가 8월 10일에,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가 9월 6일에 각각 자수하여 포도청과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은 후 1839년 9월 21일(음 8월 14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순교 후 선교사들의 시체는 20여 일간 새남터 모래사장에 버려져 있었는데, 그동안 신자들은 이들의 시신을 찾기 위해 여러 차례 노력하였고 몇 명의 신자들은 체포되기까지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바오로 등 몇몇 신자들은 마침내 세 순교자의 시신을 거두어 노고산(마포구 노고산동)에 안장할 수 있었다. 이로부터 4년 뒤인 1843년에 그들의 유해는 박 바오로 등에 의해 다시 발굴되어 과천 땅이던 관악산의 한 줄기인 박씨 선산에 안장되었는데, 이곳이 곧 지금의 삼성산이다.


이때 신자들은 훗날을 위해 그 이장 연도와 세 순교자의 이름을 아직 마르지 않은 회 반죽에 글을 써서 자연스럽게 마르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1886년경에 시복 판사를 맡았던 푸아넬 신부가 이 무덤을 확인하였고 1901년 10월 21일에는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 아우구스티노) 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유해가 발굴되어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로 옮겨졌으며, 같은 해 11월 2일에는 다시 명동 성당 지하 묘지로 옮겨지게 되었다.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교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 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데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 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성지 입구 표지석 


▲삼성산 성령수녀원, 청소년 수련관, 피정의집



▲예수성심상


▲두번째 표지석


서울대교구 삼성산 성지의 두 번째 표지석이다. 초입에 설치된 표지석 조금 위에 있는 삼성산 성령 수녀원 정문 바로 앞에 설치된 표지석으로, 이곳에서부터 산길을 약 7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성지가 나온다. 이 표지석 또한 삼성산 본당 설립 2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2012년 10월 12일 설치 · 축성한 것이다


▲약수터에서 성지로 오르는 표지석 


▲삼성산 순교자 성지


한국 천주교회사상 처음으로 이 땅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성직자인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1801년 신유박해로 순교한 후 30년만인 1831년 조선의 천주교회는 중국 북경교에서 독립해 '조선 교구'로 설정된다.


이어서 1836년과 1837년 사이에 프랑스 선교사인 앵베르 주교와 모방. 샤스탕 신부가 입국함으로써 조선의 교우들은 주문모 신부 이후 한 세대가 훨씬 지나서야 목자에 대한 갈증을 풀게 된다. 이들 세 성직자는 상복(喪服)으로 얼굴을 가리고 각 지방에 흩어져 있는 교우들을 찾아 밤낮으로 험한 산길을 걸으며 복음 전파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그 결과 불과 1년 사이에 신자수가 9천 명으로 늘어났다. 그러던중 외국 선교사의 입국 사실이 알려짐에 따라 교우들에 대한 탄압이 가열되고 가엾은 어린양들의 희생이 늘어나자 목자들은 가슴 깊이 피눈물을 흘린다.


앵베르 주교는 수원의 한 교우집에 피신하던 중 모방, 샤스탕 두 신부를 불러 중국으로 피신할 것을 권하였으나 사정이 여의치 않아 단념하고 몸조심을 당부한 다음 각자 소임지로 돌려보냈다.


바로 이즈음 한 배교자의 책략으로 인해 거처가 알려져 포졸들이 들이 닥친다. 그는 화(禍)가 여러 교우들에데 미칠 것을 염려해 스스로 잡힌 몸이 되고 두 신부에게도 자헌 치명(自獻致命), 곧 스스로 관헌에 나아가 신앙을 고백한 후 순교하기를 권했다.


▲야외 제대


▲야외 예배처


▲야외 예배처


▲야외 예배처


▲성인 묘자리


▲순교자 묘자리


1839년 기해박해 때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軍門梟首)의 형을 받고 순교한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범(范) 주교와 성 베드로 모방 나(羅) 신부, 성 야고보 샤스땅 정(鄭) 신부의 유해가 1836년부터 1901년 11월 2일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이다.


기해박해(1839년)가 시작되고 세 명의 외국인 사제는 38년 전, 주문모 신부가 그랬던 것처럼 새남터에서 희광이의 칼 끝에 이슬이 되고 만다. 이 때 앵베르 주교의 나이 43세, 모방 신부와 샤스탕 신부는 35세로 동갑이었다. 이들의 시체는 사흘 동안 버려져 있다가 한강변 모래톱에 묻힌다.


교우들이 유해를 거두고자 애쓴 지 나흘째 되는 날 세 명의 교우가 시체를 훔쳐 내려다 그중 한명이 붙잡혀 옥에 갇히고 만다. 그 후 스무 날 가량 지난 뒤 7-8명의 교우가 죽음을 무릅쓰고 감시의 눈을 피해 유해를 거두는 데 성공한다. 교우들은 유해를 큰 궤에 넣어 노고산(老姑山)에 임시로 매장하였다.


그리고 4년 후, 당시 파수를 피해 유해를 훔쳐 낸 교우 중 하나인 박 바오로가 가문의 선산인 관악산 줄기 삼성산에 유해를 이장한다. 박 바오로는 이 사실을 아들인 박순집에게 알려 주고 그 자신도 일가들과 함께 병인박해의 와중에서 순교하게 되니 1868년 3월 절두산에서의 일이다.


이 때 가까스로 화를 면한 박순집은 신앙의 자유를 얻은 후 이 묘소를 고증해 명동 성당 지하묘소로 옮길 수 있도록 하는 산 증인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순교한 가족들의 시신을 찾고 베르뇌 주교를 비롯해 브르트니에르·볼리외·도리 신부 등의 시신을 새남터에서 찾아내 용산 왜고개에 이장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하기도 했다.


1866년 병인박해 때부터 4년간 박순집의 가문은 16명의 순교자를 배출했고, 자신은 1982년 82세를 일기로 선종하기까지 인천 교회의 창설에 여생을 바쳤다. 16세 때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원에 들어가 우리 나라 최초의 수녀가 된 박 사베리오(1872-1966년)는 박순집의 막내딸이기도 하다.


한편 박순집 일가를 기념하기 위한 비가 절두산 순교 기념관 정원에 세워져 있어 순례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삼성산에 1834년부터 1901년까지 58년간 묻혀 있던 세 성직자는 1925년7월 25일 시복되었다.


▲1984년 축성기념비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


▲명동 성당 지하 묘소로 모셔질 때까지 묻혀 있던 묘자리


성모상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성인 묘자리


▲성 라우렌시오 앵베르 성인 묘자리


▲성 베드로 모방 신부 묘자리


▲성 베드로 모방 신부 묘자리


▲성 야보고 샤스당 신부 묘자리


▲성 야보고 샤스당 신부 묘자리


묘자리와 성모상


십자고상


1970년 5월 12일 김수환 추기경과 고(故) 노기남 대주교, 오기선 신부는 이곳에 세 분의 매장지임을 확인하고 이를 기념하는 소형 비석(앞쪽에 있는 작은 비석)을 그 자리에 세웠다. 또 1981년 9월에는 신림동 본당 교우들에 의해 구상 시인의 헌시와 비문이 새겨진 현재의 비석이 세워졌다.


1984년에는 한국 천주교 2백주년을 기해 세 성직자가 시성의 영광에 오른다. 이를 기념해 사적지 부근의 땅 1만 6천여 평을 매입, 1989년에 그 유해를 다시 천묘해 축성식을 가졌다. 그리고 1992년에는 신림본동 본당에서 분리, 삼성산 본당이 신설됐다.


▲삼성산 순교자 성지 표지석


▲십자가의 길



◆십자가의 길 14처(The Via Dolorosa)


제1지점 : 빌라도 법정에서 예수가 재판을 받은 곳.


제2지점 : 예수가 가시관을 쓰고 홍포를 입고 희롱당한 곳.


제3지점 : 예수가 십자가를 지고 가다 처음 쓰러진 곳.


제4지점 : 예수가 슬퍼하는 마리아를 만난 곳.


제5지점 : 시몬이 예수 대신 십자가를 진 곳.


제6지점 : 성 베로니카 여인이 예수의 얼굴을 닦아준 곳.


제7지점 : 예수가 두번째로 쓰러진 곳.


제8지점 : 예수가 여인들을 위로한 곳.


제9지점 : 예수가 세번째로 쓰러진 곳.


제10지점 : 예수가 옷 벗김을 당한 곳


제11지점 :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 곳.


제12지점 : 예수가 십자가 위에서 운명한 곳.


제13지점 : 예수의 시신을 놓았던 곳.


제14지점 : 예수가 묻힌 곳


▲십자가의 길 1처


▲십자가의 길 2처


▲십자가의 길 3처


▲십자가의 길 4처


▲십자가의 길 5처


▲십자가의 길 6처


▲십자가의 길 7처


▲십자가의 길 8처


▲십자가의 길 9처


▲십자가의 길 10처


▲십자가의 길 11처


▲십자가의 길 12처


십자가의 길 13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