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영성(Christian Spirituality)
들어가는 말
크리스천의 지상 과제는 무엇인가? 그것은 전도와 선교이다. 그러나 전도와 선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영성 발달(spirituality development)이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3:18에서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명령한다. 여기 “자라가라”는 명령은 바로 영성발달을 촉구하는 명령이다. 왜 이런 명령을 하였는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통하여 주신 하나님의 성품은 저절로 발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잡초는 저절로 자라지만, 곡식이나 채소는 저절로 자라지 않는 것과 같다. 로마의 네로 황제의 박해 속에서 언제 죽을지 모르는 크리스천들을 향하여 영적으로 “자라가라”고 명령한 것을 보면, 영성 발달은 크리스천들에게 주어진 아주 중대한 명령임이 분명하다.
전도와 선교는 크리스천 개개인과 교회가 밖을 향하여 수행해야할 외적 차원의 명령이고, 영성발달은 크리스천 개개인과 교회가 내부적으로 수행해야할 내적 차원의 명령이다. 모든 크리스천은 이 두 가지 명령을 동시에 받고 있다. 교회는 전도와 선교를 통하여 양적으로 성장함과 동시에 영성발달을 통하여 질적으로 성장해야 한다.
오늘 한국교회에 많은 문제가 일어나고, 심지어 교회 문제들을 세상 법정으로 끌고가는 일이 허다하다. 왜 그런가? 성도들이 윤리적인 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인가? 그렇다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수많은 목회자들이 강단에서 윤리적인 가르침을 주어왔고 지금도 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윤리를 알지만 그러한 윤리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연고이다.
그러므로 영성발달은 크리스천이 세상에 빛을 발하면서 살 수 있는 능력을 갖게 하는 가장 구체적이고 확실한 방법이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영성발달은 오늘 모든 크리스천 개개인과 교회 전체가 힘써야할 지상 과제임이 분명하다.
본 강의는 권택조 교수의 <영성 발달>이란 책을 주요 자료로 하여, 영성이 무엇인가 그 개념을 밝히고, 그러한 개념을 근거로 하여 영성발달의 모델을 제시해 보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영성 발달의 모델을 각 개인과 교회의 삶 속에 적용할 때, 교회와 가정 및 사회 속에서 성숙한 크리스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본다.
제 1장 영성(Spirituality)의 개념A. 영성에 대한 다각적 고찰
거의 모든 종교는 영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종교마다 영성의 의미가 다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연구하려는 영성은 기독교적 영성이다.
1. <영성>에 대한 역사적 고찰
기독교의 영성은 구약성경의 유대주의적 토양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바로 유대교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영성은, 자연을 관찰하며 형이상학적 세계에 대한 명상을 토대로 하여 형성된 것이 아니고, 역사적 사건 속에서 태어나고 발달한 것이다.
교회사적 면에서 “영성”(spirituality)이란 단어를 처음 사용한 것은 영국교회에서 인데, 영성을 성직자단 전체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하였다.
18세기 이전까지는 <영성>과 동일한 성경적 용어를 발견치 못하였고 그 개념을 신학적으로 정립하지도 못하였다. 20세기에 와서야 학자들은 영성에 대한 정의를 내리게 되었는데, 영성을 한 인간 전체와 거룩하신 하나님과의 관계 개념으로 정의하였다. 영성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였는가를 교회사적으로약간 살펴보면 이러하다.
(1) 오리겐(Origen, 185-254)은 “순교야말로 영성발달의 최고봉”이라고 확신하였다. 이렇게 확신한 것은, 자기의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있는 모습 속에서 영성발달의 극치를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리겐과 같은 교대 교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을 특별히 강조하였다. 동방교회의 영성은 하나님과 연합되어 인간도 신성화된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즉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성령님의 역사로 神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는 것을 영성 발달로 보았다.
(2) 어거스틴(Augustine, 354-403)은 인간이 신성화된다는 동방교회의 교리를 반대한 자로서, 인간은 겸허한 자세로 자신의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고백을 통하여 영성을 발달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3) 그레고리(Gregory the Great, 540-604)는 중세 초기의 영성발달의 아버지라 불리운 자로서, 수도원 제도를 체계화시키고,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을 보는 방법을 개발하였다.
(4) 12세기와 13세기는 영성이나 신학적인 면에 있어서 커다란 전환기이었다. 수도하는 수도승들의 필요를 충족시켜주기 위하여 많은 영적인 글들과 문학 작품들이 기록되었다. 그러나 13세기에는 신학의 권좌가 수도원에서 대학으로 옮겨졌다. 수도원을 중심한 명상적 영성에서 대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적 영성으로 옮겨짐으로서, 명상 중심의 영성과 학문 중심의 신학적 영성이 서로 합쳐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신학이 대학을 중심으로 하여 학문적 수련의 분야로 발달해감에 따라, 신학과 영성이 분리되기 시작하였다.
이 같은 분리는 중세 말에 와서 절정에 이르게 되었고, 근대에 접어들면서는 당연한 일로 여기게 되었다. 이러한 전환기에 심리학이 영적 명상의 분야에 접목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전환기 이전이나 전환기에 수도자들은 영성적 신학 혹은 신학적 영성을 시도하였다. 문예부흥이 일어나기 직전에 유럽에는 이탈리아의 은둔자들로 구성된 <어거스틴 수도회>가 있었는데, 이 수도회는 성 어거스틴의 규칙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규칙은 성경에 뿌리를 둔 영적 삶의 규범으로 카리타스(caritas)라는 개념에 기준을 두었는데, 카리타스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의미하는 용어이다.
(5) 14세기에서 15세기에 유럽에서 일어난 르네상스(Renaissance) 곧 인문주의운동은, 영성과 관계없는 비종교적 색채가 짙은 운동같지만, 사실은 기독교적 영성을 많이 포함하고 있었다. 인문주의 교육의 방향이 인식론과 인류학 쪽으로 많이 발달하게 되었고, 따라서 영성의 성격도 전(前) 세기처럼 지나치게 知性으로 치우치지 않고 복음주의적 영성을 많이 포함하게 되었다. 르네상스 운동가들은, 기독교적 영성을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 속에서 보았다.
(6) 종교개혁시대의 영성은 루터와 칼빈에게서 찾아야 할 것이다. 루터는 칭의의 수단으로 믿음을 강조하였는데, 그렇다고 그가 선행을 무시한 것은 아니다. 구원이 하나님의 크신 선물인 이상, 그런 선물을 받은 인간은 하나님께 대한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리고 루터는 선행의 대상은 이웃이 필요로하는 것들이라고 강조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일”을 선행의 최고의 목적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루터의 영성에 대한 개념은 타자중심적인 삶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칼빈의 영성은 문예부흥의 인문주의의 영향을 받음과 동시에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 체험에서 영향 받아 이루어졌다고 본다. 당시 로마 카토릭교회가 인간은 선행을 통하여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치고 있었으며, 칼빈의 영성 운동은 이 같은 당시의 부패한 종교사회를 재건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었다. 칼빈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간격을 메움에 있어, 인간성의 제한 때문에 불가불 하나님 편에서의 우선적인 역사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 역사에 인간이 믿음으로 동참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믿음에 따른 행동이야말로 신앙의 궁극적 척도가 된다고 강조하였다.
칼빈신학의 초점은, 신자는 수도원에서 명상만 하고 실생활은 소극적 부정적 태도를 취하지 말고,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영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는 데 있었다. 이렇게 볼 때, 칼빈의 영성은, 인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살아가는 삶의 과정이라는 입장에 섰다.
요한 웨슬리(John Wesley, 1703-1791)는 영국 국교인 성공회(Anglican Church)의 목사로 살다가 죽었지만, 사실은 감리교의 창시자이다. 웨슬리는 그의 형제 찰스(Charles)와 더불어 찬송가를 개발하고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속회제도를 개발하였다. 그는 영성 발달을 위하여 설교와 찬송 그리고 교육을 중요시하였다.
휫필드(Whitefield, 1714-1770)와 조나단 에드워드(Jonathan Edwards,1703-1758)는 다 같이 교육을 통한 영성 발달에 초점을 맞춘 사람들이다. 아우만(Aumann)에 의하면, 기독교 역사의 전 과정을 통하여 공통적으로 강조된 크리스천의 삶의 핵심은,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는 데 있었다고 한다. 기독교의 영성은, 神學이라는 학문 속에만 갇혀 있어서도 안되고, 반면 신학을 멀리 떠난 채, 개개인의 일상생활 속에만 존재하는 개인적 신비주의의 영역에 국한되어서도 안 된다.
기독교 2000년 역사를 통하여 형성된 영성은, 말씀과 실천이 공존하는 상태에서 발달하였다. 즉 성경에 기반을 둔 신학적 이론과 주장이 크리스천의 삶 속에 절대적 가치로 심어질 때,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여 개개인의 생활 속에서 기독교 윤리가 실천된다는 것이다.
2. 영성에 대한 교단적 시각
(1) 투터교단(The Lutheran)의 시각 - 칭의중심적 영성
루터교단은 도덕성과 영성을 크게 구분짓는다. 도덕적인 삶(시민적인 義)은 옛 사람이 이 세상에서 노력하여 얻는 품성인 반면, 영성은 옛 사람이 죽고, 성령의 지배아래 있는 새사람이 살아 활동함으로써 형성되는 품성이라고 본다.
루터는 칭의 속에 성화가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거룩하게 되려고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인간의 힘으로 성취되는 모든 의나 거룩은 자기 거룩이요 자기 의(self-righteousness)이지,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진정한 의미의 義와 거룩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한다. 그러므로 루터가 보는 성화는 칭의중심적 영성이다.
(2) 개혁교단(The Reformed)의 시각 - 성화중심적 영성
개혁주의신학은 성화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성화중심적 영성을 말한다. 영성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영성이 발달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우리 속에 결핍된 영성을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성을 우리가 어떻게 보충할 것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영의 역사를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드림으로써만 가능하다.
(3) 웨슬리교단(The Wesleyan)의 시각 - 칭의와 성화중심의 영성
루터와 같이 웨슬리도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는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웨슬리는 루터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구원 받는 것이 은혜를 통해서 됨과 동시에 또한 성화되는 것도 은혜로 된다고 본다. 구원은 은혜로 받지만 성화는 인간의 노력으로 된다는 입장을 반대한다. 구원이나 성화나 모두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한다. 웨슬리가 보는 영성은, 중생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것을 내재하시는 성령님을 통하여 계속하여 이루어가는 과정이다. 웨슬리는 성화의 경험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아드리는 데서만 가능하다고 한다. 웨슬리 교단이 보는 영성은 칭의와 성화 중심의 영성이라고 볼 수 있다.
(4) 오순절교단(The Pentecostal)의 시각 - 능력 중심의 영성
오순절교단의 영성은, 성령의 역사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헌신하는 크리스천 개개인이 매일의 삶 속에서 성령의 지배를 받아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사는 것에 큰 관심을 둔다. 방언은 기본적인 성령의 은사이고, 방언 외에도 몇 가지 은사들 곧 치유의 은사, 지식의 은사, 지혜의 은사, 영분별의 은사 등을 받아 영적인 능력을 가지고 승리하는 삶을 사는 데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오순절교단에서 말하는 <영성> 혹은 <영적인 것>이라는 개념은, 한 개인의 인격적 자질을 설명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므로 이 교단의 영성은 능력 중심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5) 묵상주의교단(The Contemplative)의 시각 - 묵상중심의 영성
기독교 역사의 초창기 몇 세기동안 묵상주의자들은 크리스천의 궁극적 목적을 하나님과의 결합(union with God)에 두었다. 세속을 떠나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통해서 영적인 것을 받음으로 성화의 단계에 들어가고자 하였다. 그러한 교제에 들어가기 위한 수단이 바로 <묵상>이었다. 다른 교단들이 보았을 때 인간적인 노력을 많이 하였기 때문에, 묵상주의자들은 인간의 노력으로 영성을 발달시키려는 사람들이라고 느꼈다. 그래서 많은 개신교들은 묵상주의 전통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고 힌슨(Hinson)은 말한다. 힌슨에 의하면 묵상주의자들은, 하나님은 이미 인간을 위하여 모든 은혜를 베푸셨기 때문에, 인간이 해야 할 일은 우리 자신의 마음 문을 활짝 열고 하나님의 은혜의 에너지를 받아들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그냥 묵상만 하는 것이 아니고, 진리를 알고, 안 진리를 느끼고, 알고 느낀 바를 실천에 옮김으로써 영성 발달의 균형을 맞추려고 시도하였다는 것이다. 그들이 공통으로 강조한 것은, 믿음, 그리스도와의 연합 그리고 성령이다. 영성은 성령의 역사하심을 따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그리스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는 과정이라고 보았다.
3. 영성에 대한 학자들의 시각
영성에 관한 연구를 한 미국의 대표적인 학자들 8명의 견해를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부터 연대순으로 생각해 본다.
(1) 쌘더스(Oswald Sanders)의 시각
그는 산상보훈(마5:1-11)에 근거하여 영성의 차원을 8가지로 나누었다:
첫째는 겸손이다(“심령이 가난한 자”5:3). 자기 자신이 부족하다고 느끼고 하나님께 의지하는 상태이다.
둘째는 애통이다(5:4). 순수한 마음으로 죄를 슬퍼하며 돌이키는 상태.
셋째는 온유이다(5:5). 자기 고집을 버리고 다른 사람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이다.
넷째는 의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것이다(5:6).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마음이 간절한 상태이다.
다섯째는 긍휼이 여기는 것이다(5:7). 남을 비판하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 정신이다.
여섯째는 마음이 청결한 것이다(5:8). 어떤 일을 하는 동기나 상상이나 사고가 깨끗한 상태이다.
일곱째는 화평케 하는 것이다(5:9). 다른 사람을 섬기는 정신을 가지고 문제가 있을 때에 평화적인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상태이다.
여덟 번째는 의를 위하여 핍박 받을 때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다(5:10-11). 어떤 어려움이 와도 흔들이지 않고 용기백배하여 주님께 충성하는 정신이다.
Sanders가 주장하는 영성의 개념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갖는 내적 자질을 의미하며 동시에 타자중심적인 삶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2) 핑크(Arthur Pink)의 시각
그는 다음과 같은 5가지 기본적인 특성에 초점을 맞추어 영적 성숙도를 측정해야 한다고 한다.
첫째는 영적 지식의 증가.
둘째는 영적인 일에 대한 참된 기쁨.
셋째는 하나님을 깊이 사랑함.
넷째는 신앙의 강화와 확대. 그리고
다섯째는 개인적 경건의 증대이다.
이와 같이 그는 영적 성숙도의 차원을 논할 때, 하나님을 아는 것 즉 인지적 영역,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 즉 정서적 영역,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 즉 행위적 영역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3) 카터(John Carter)의 시각
그는 영적 성숙의 단계를 일곱으로 나누었다. 즉
ㄱ) 자신과 타인과 세계를 영적 시각에서 감지하는 단계
ㄴ) 자신과 타인을 받아들이는 단계
ㄷ) 인생의 목표를 멀리 두고 현재를 살아가는 단계
ㄹ) 자신이 선택한 가치관을 가지고 사는 단계
ㅁ) 매일의 삶 속에서 자신의 능력과 취미를 발달시키는 단계
ㅂ) 자아실현의 단계
ㅅ) 예수 그리스도와의 일치의 단계이다.
그리고 카터는 “성경이 제시하는 성숙한 크리스천이란 그의 생각과 신앙과 동기와 느낌 그리고 태도와 행위가 서로 지속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그런 것들이 성경말씀과 일치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는 심리적 성숙과 영적 성숙이 결코 서로 모순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한다. 그의 견해에 의하면, 영성이 발달한 사람은 자신의 내면적 자아와 외면적 자아가 조화를 이루는 중에 자신의 능력과 가치와 취미를 개발하고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렇게 볼 때, 영성은 인격과 동떨어진 특수한 요소가 아니고 인격 속에 묻혀서 개발되어야 하는 전인적(holistic) 개념이 되어야 한다.
(4) 윗체른(Frank Wichern)의 시각
그는 [딤전 3:1-7]과 [디도서 1:5-9]에 근거하여 영성발달은 어디까지나 영적 지도력의 정도에 의하여 평가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다. 영적 지도력이 훌륭한 사람은 영성이 발달한 사람이라는 논리는 무리 없이 성립된다고 보지만, 그러나 영성이 발달한 사람은 누구나 다 영적 지도력이 뛰어나다는 논리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5) 리차드(Lawrence Richards)의 시각
그는 영성을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 타자 중심적으로 살아가는 인간의 삶으로 정의한다. 영성은 물질적 세계를 배제하지 않으며, 참된 영성은 신자의 전인적 삶과 체험이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행동이 곧 영적인 삶이다. 그는 또 이렇데 말 한다: 아무리 타인을 위해 산다고 해도 성령의 개입이 없으면 영성이 아니며, 아무리 성령의 역사가 있는 것처럼 보여도 자신의 이기적 욕심을 채우기 위한 것이라면 참된 영성은 아니다.
(6) 벤너(David Benner)의 시각
그는 영성발달을 이해함에 있어서, 심리학적 차원과 영적 차원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통합한 통합적 방법론을 채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영성을 설명하기 위해 “심리영성”(psycho-spirituality)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삶과 경험은 결국 심리적 차원과 영적 차원이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영적으로 성숙한 것과 인격적으로 성숙한 것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적으로 성숙하려면 그 이전에 반드시 심리적 혹은 인격적으로 성숙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또한 심리적 혹은 인격적으로 성숙하면 자동적으로 영적 성장이 따라온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영적으로 성숙하다는 것은 심리적 인격적 차원의 성숙도 동반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에 의하면, 영성발달은 심리적인 차원과 영적인 차원에서 동시에 시도가 되어야 하며, 그런 의미에서 그는 심리학과 신학의 통합적 접근이 영성발달 연구에 필요하다는 입장을 취하였다.
(7) 엘리슨(Craig Ellison)의 시각
그에 의하면, 인간은 전인적 존재(a holistic being)이기 때문에, 인간의 영성을 논할 때에 신학적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적, 심리적 차원에서도 논의해야 한다고 본다. 인간의 영적 성장이나 영적 성숙은, 인간의 어떤 한 부분만 볼 것이 아니고, 전 인격을 통합한 전체적 조직체 속에서 설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된 영성은 삶의 현장을 떠난 어떤 특수한 영적 현상에만 중심을 둔 개인적 영적 독백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정한 영성은 한 인간의 인격 전체가 인격자이신 하나님과 근본적인 관계를 맺고 사는 삶 자체이다. 다시 말하면, 그가 이해한 참된 영성은, 전인적인 존재로서의 한 개인이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다른 인간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의 한 과정이다.
(8) 맬로니(Newton Malony)
그는 성숙이라는 개념을 전인적 차원에서 다룬다. 그래서 영적인 차원의 삶은 인간의 총체적 삶에서 분리될 수 없다고 본다. 그는 성숙한 크리스천을 “자기정체성과 성실성 및 영적 감화를 지니고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 대한 확고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정의한다. 성숙한 영성은 우리의 매일의 삶 속에 나타나는 거룩한 전인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영성은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교제에 근거한 자기 정체성, 성실성, 영적 감화, 적합성 등으로 나타나는 것으로서, 인지적(cognitive), 정서적(affective), 행위적(behavior!!!al) 영역들을 다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이상에서 우리가 살펴본 것을 요약하면, 영성이란 한 개인이 하나님과 타인과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삶의 총체적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쌘더스와 엘리슨은 과정을 중요시하였고, 카터와 벤너와 엘리슨과 멜로니는 삶의 총체성 혹은 전인성을 강조하였고, 그리고 샌더스, 카터, 윗체른, 엘리슨, 멜로니 등은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인간과의 관계를 중요시하였다. 그리고 위의 모든 학자들은, 영성을 발달시킴에 있어, 성령의 역사가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4. 영성에 대한 성경적 신학적 고찰
영성과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용어들로서, 성경적 신학적 개념을 지니고 있는 주요 단어들을 상고해 보면 이러하다:
(1) 경건(godliness)
“경건”이라는 헬라어는 <유세베이아 ευσεβεια> 라고 하며, 이 말은 <ευ(잘,좋게 well) + σεβω(예배하다 to worship)>의 합성어로서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가지고 예배를 드린다’‘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하여 예배를 드린다’ ‘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과 좋은 관계를 맺는다’는 등의 의미를 가진다. 이렇게 볼 때, 유세베이아는 영성과 유사한 의미를 가진다. 그 이유는 영성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초점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2) 온전함(perfection)
“온전함”이란 헬라어는 τελειο?이며, 이 말은 ‘온전히 자람’ ‘성숙함’, ‘최종적 단계까지 발전함’ 등의 의미를 지닌 말이다. 영성이란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의 과정이며 그 과정의 최종 단계는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이 “온전함”이란 용어는 영성과 관계된 말이 분명하다.
(3) 거룩함(holiness)
“거룩”은 영성과 가장 가까운 낱말 중의 하나다. 멜로니(Malony)라는 학자는, 영성이란 크리스천의 삶 속에서 거룩이 밖으로 나타나는 과정이라고 한다. “거룩한”이란 말의 히브리어는 שׁ??? 이며. 헬라어로는 αγιο? 라 하는데, 이 두 용어는 모두 “분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세속적인 것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께로 향하는 것이 거룩이며, 자기중심에서 분리되어 타자중심이 되는 것이 거룩 이다.
사도 바울은 롬12:1-2 에서 거룩한 삶은 “이 세대를 본받지 않는 것” 곧 세속적인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과 연합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거룩이란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마음속에서나 일상생활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연합하는 것을 의미한다. 영성이 발달한 사람일수록 더 거룩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다.
(4) 성화(sanctification)
성화란 성도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가며 그 분의 뜻을 땅위에서 실현해가는 과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성화는 구약보다 신약이 더 강조하고 있지만 그 뿌리는 구약에 두고 있다. 구약의 원어인 히브리어에 <카도쉬 שׁ???>라는 말이 있는데, 성화의 뿌리가 여기에 있다. 카도쉬는 <거룩한> 이란 말로서 세속적인 죄의 속성에서 분리되어 하나님과 연합한 상태를 의미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에 사셨지만 죄는 없는 분이셨다. 예수님은 죄가 뿌리박힌 세상으로부터 분리되어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삶 곧 성화의 삶을 사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성화 자체이시며, 우리는 그 분을 목표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5) 의(義 righteousness)
이 말은 헬라어로 <디카이오쉬네>(δικαιο-συνη)라고 하는데, 그 신학적 의미는 관계적 개념을 가진다. 즉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 또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올바로 가질 때에 그것이 의로운 삶이 된다는 것이다. 관계가 좋다는 것은 곧 의롭다는 개념을 포함하고 있으며, 반면 관계가 나쁘다는 것은 곧 불의하다는 개념을 나타낸다. 예수님은 성령으로 태어나심으로부터 하나님과 완벽한 관계 속에 계셨고, 이 세상에 사시는 동안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사심으로써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완벽하게 맺으셨고, 마지막 십자가에 죽으심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하였다.
그래서 그 분은 인간과 하나님 사이의 화해를 이루는 의로운 삶을 사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같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으심으로 의로운 삶을 사신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잘 맺고 사는 것이 의로운 삶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영접함으로써 죄 사함을 받아 하나님과의 관계가 정상적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상에서 살펴본 경건, 온전함, 거룩, 성화, 의(義) 등의 개념들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관계적 개념이다. 즉 하나님과의 수직적 관계 및 인간과의 수평적 관계이다. 영성은 이와 같은 다섯 가지 개념을 모두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5. 영성과 도덕성(Spirituality and Morality)
영성과 도덕성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비도덕적인 영성은 전혀 기독교적 영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매우 도적적인 존재로서 거룩하신 분이시다. 기독교는 도덕을 지켜서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가르치지 않지만, 그렇다고 비도덕적 구원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드림으로 얻게 되지만, 구원받은 사람은 도덕적인 삶을 산다.
영성이 없는 도덕성은 존재한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이나 타종교를 믿는 사람들도 도덕적인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영적이라고 우리는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성령의 역사가 없는 도덕성의 열매는 영성이 아니고 자기의(self-righteousness)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기독교 영성은 도덕성을 포함한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크리스천들이 도덕적으로 살 수 있도록 역사하시기 때문이다. 크리스천에게 있어 도덕성은 성령 충만의 과정에서 열매로 맺어진다. 그렇게 때문에 크리스천의 도덕성은 곧 영성을 형성한다. 인간이 선을 행할 때, 성령이 역사하였다면 그것은 영성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한 자연인의 도덕성은 영성과 관계가 없다. 왜냐하면 영성은 하나님과의 성경적 관계를 맺어야한다는 것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성은 크리스천에게만 해당되는 용어이다. 도덕성은 영성 발달에서 계속 강조되어야 한다. 그 이유는 비도덕적인 영성은 기독교적 영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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