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7)
● 해방후 교회의 분열
해방이후 출옥성도들을 중심으로 한국교회 재건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됨 - 재건운동의 5원칙 발표 - 교회의 지도자들은 모두 신사참배를 했으니 권징의 길을 취하여 통회 자복한 뒤 교역에 나설 것, 권징은 자책이나 자숙으로 하되 최소한 2개월 간 통회 자복할 것, 목사나 장로가 휴직 중에는 집사나 평신도가 예배를 주관할 것, 교회 재건의 기본 원칙을 전국에 전달하여 일제히 시행할 것, 교역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도 복구 재건할 것 - 홍택기 목사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복한 사람의 노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신사참배에 대한 회개와 책벌은 하나님과의 직접 관계에서 해결될 성질의 것이다’라고 하면서 재건원칙에 반대하며 분열되기 시작.
◎ 북한 교회의 재건운동
1945년 9월 4일 평양노회가 산정현교회에서 회집하여 자복하고 3일간 금식하면서 부흥사경회를 개최 - 신사참배한 목회자는 최소 2개월간 휴직하면서 통회자복할 것과 그동안 집사 혹은 평신도가 예배를 인도할 것, 신학교를 복구 재건할 것 등의 기본원칙을 발표 - 신사참배한 목회자들이 ‘옥중에서 고생한 사람이나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고생한 사람이나 그 고생은 마찬가지였고, 교회를 버리고 해외로 도피생활을 했거나, 혹은 은퇴생활을 한 사람의 수고보다는 교회를 등에 지고 일제의 강제에 할 수 없이 굴한 사람의 수고가 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고 공박하기 시작함 - 실망한 이기선 목사가 평북 지방에 교회 30여곳을 개척하고 1949년 5월에 재건교회라는 간판을 달고 새로운 단독교회를 출발 - 이것이 '재건파‘ - 이들은 신사참배 죄를 회개하지 않은 교회에는 구원이 없다고 주장.
◎ 북한에서의 기독교 박해
일제시대 친일행위에 대한 철저한 친일 청산을 감행했던 북한정권에 있어 친일에 앞장섰던 교회와의 갈등은 필연적 - 북한정권의 행사와 별도로 기독교계에서는 3.1절 행사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약 일만여명의 성도가 모여 따로 개최 - 1946년 3월 2일 정치보위부에서는 교역자 일제 검거를 시작 - 교역자가 없어 예배를 드릴 수 없는 형편으로 교회가 자동해산 될 위기에 처함 - 정권과의 갈등은 토지개혁 문제로 인해 더욱 심화됨 - 1946년부터 토지개혁을 실시하면서 모든 교회 재산을 정부에 헌납하라는 지시를 내림 - 토지개혁 환영대회를 마치고 농민들이 교회를 난입해서 난동을 부리는 일들이 빈번 - 1946년 11월 3일 일요일 선거를 실시하자 5도 연합회에서는 선거에 반대하고 김일성 정권에 진정서를 보냈으나 김일성은 ‘과거 일제 시대에는 주일에도 신사참배를 하고 보국대에 나가 일한 자들이 신성한 선거를 거부하는 이유가 무엇이냐?’며 정권에 비협조적인 교회를 파멸시킬 계획을 비서인 강량욱 목사에게 지시함 - 주일선거를 평일로 바꾸어 달라고 교회대표들이 모여 청원하였으나 거절당함 - 투표 당일인 주일에 온 종일 교회에 머물며 투표거부운동을 벌임 -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교역자와 교인들을 정치보위부로 끌고가서 고문을 가하기 시작함 - 정권에 의한 핍박을 피해 많은 교역자들이 월남함 - 정일선, 송정훈, 김철훈 목사 등은 ‘어떻게 목사가 자기만 살기 위해서 교회를 버리고 남으로 탈출할 수 있겠느냐?라고 하면서 탈출을 반대하다 순교를 당함 - 조선민주당을 결성하여 50만명의 당원을 확보했던 조만식 장로도 ’이 가엾은 백성을 남겨두고 나만 살겠다고 월남할 수는 없다. 나는 살아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살고 죽어도 북한 동포들과 같이 죽을 것이다‘하면서 월남을 거부.
◎ 기독교도 연맹조직
1946년 11월에 평신출신이며 김일성의 외조부의 육촌동생인 강량욱 목사에 의해 기독교도 연맹이 조직됨 - 여기에 가입하지 않는 교역자는 강단에 설 수 없다는 것과 1947년 4월까지 가입할 것을 강요하여 많은 교역자가 가입 - 1948년부터는 평신도의 가입도 강요 - 1948년 9월 1일까지 85.118명의 교역자와 신도가 가입 - 기독교도 연맹조직 이후부터 예배당 정면에 김일성 초상화를 걸게 됨 - 총회장에 김익두 목사 선출 - 한국전쟁 당시 사살됨.
김용진, 배정덕, 김인준, 박대선, 윤창덕 목사등은 ‘기독교도 연맹은 김일성을 위한 어용집단’이라고 가입을 거부 - 기독교도 연맹의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 우리는 김일성 정부를 절대 지지한다, 우리는 남한 정권을 인정치 않는다, 교회는 민중의 지도자가 될 것을 공약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솔선하여 참가한다 - 기독교도 연맹 회장 김익두 목사는 1950년 8월 8일 비행기 전차의 군납헌금 10만원을 헌납한 후 ‘미제의 무력침공을 반대한다’라며 기독교인 전쟁 승리 총 궐기 대회를 개최 - 인민위원회 부수상이었던 홍기주는 목사.
◎ 북한 교회의 정치운동 시도
일제시대를 통해 교회는 비사회적, 몰역사적, 몰민족적 성격을 띠었다고 비판을 받았음 - 1945년 9월 평북 신의주 제일교회 목사 윤하영과 신의주 제2교회 목사 한경직은 ‘기독교사회민주당’을 결성 - 이후 ‘사회민주당’으로 개칭 - 평남에서는 김화식 목사를 중심으로 ’기독교자유당‘창당이 모색되었으나 창당 하루 전 모두 검속되어 대다수가 옥사하거나 실종됨.
◎ 3.1독립운동 기념식과 교회의 탄압
1946년 3.1절 기념예배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드리기로 함 -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에서는 자신들과 함께 자신들이 주관하는 기념행사에 참석할 것을 요구 -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예배를 드릴 수는 없다 하여 거절 - 반대하는 교역자 60명을 검거 - 이 사건을 계기로 우익기독청년들이 남한하여 내려오기 시작 - 1946년부터 시행된 토지개혁은 '토지는 밭갈이하는 농민에게'라는 구호를 내걸고 무상몰수, 무상분배 원칙하에 이루어짐 - 모든 재산의 국유화정책 시행 후에 교회는 지금까지 자신들이 썼던 예배당을 임대료를 내고 사용하기도 함 - 신학교도 평양 장로회신학교와 감리교의 성화신학교를 1950년 3월 강제통폐합 - 당시 평신의 600, 성화의 200, 총800명의 학생 중 사상검증을 거친 후 120명만 선출하여 공부하도록 하고 나머지는 강제 제적시킴.
● 남한에서의 재건운동
◎ 미군정의 한반도 인식의 왜곡
하지 장군은 한반도에 상륙하기 전 선발대 해리스 준장에게 ‘한국은 일본제국의 일부로서 우리의 적이다’라고 선언함 - 한반도는 일본 영토의 일부로 처리되어 연합군의 점령대상이 됨 - 치안유지 명분으로 미 군정은 일본 앞잡이 경찰 80%를 그대로 채용하고 국군 창설 준비로 경비대를 조직할 때도 일본군 출신 98%로 군사영어학교를 개설하여 조직
◎ 감리교의 분열과 통합
해방후 부흥파와 재건파로 나뉨 - 부흥파는 일제의 잔재와 부역 교역자들의 완전 퇴진을 주장했고, 재건파는 죄가 많고 적음을 논할 것이 아니라 누구나 죄를 통회하는 신앙부흥을 통하여 교회를 재건하자고 함 - 1949년 4월 20일 합동에 성공했다가 1954년에 다시 분열 후 1958년 8월 재통합이 이루어짐
◎ 성결교
해방 후 총회장에 박현명 목사, 신학교 교장에 이건 목사를 추대 - 박현명 목사는 해산성명서에 서명하였고, 이건 목사는 징병제를 찬양하였지만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거나 항의하거나 친일파를 규탄하는 일이 없어 교단이 분열되지 않음.
◎ 기독교 사회주의자와 사회주의 목사들
1930년대 들면서 기독교가 점점 현실도피주의적으로 개인의 안전만 추구하자 신비주의와 사회주의가 극성을 부리기 시작 - 김익두, 길선주, 이용도 등의 신비주의 신앙운동 및 재림과 종말신앙이 활발 - 일부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현실에 시정을 요구했지만 거부당하자 사회주의자로 변신 - 장로교 전도사였던 여운형 등이 대표적 인물.
1. 이동휘 - 1918년 볼세비키의 도움으로 하바로스크에서 한국 최초로 한인 사회당을 조직하여 당수가 됨 - 1919년 8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국무총리가 됨 - 1920년 고려 공산당을 조직 - 1934년 저격당했다는 설과 1938년 소련정부에 의해 처형당했다는 설이 있음.
2. 여운형 - 1910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2년을 마치고 서울 승동교회 전도사로 봉사 - 1920년 한국 독립을 지원해 주겠으니 고려 공산당에 가입하라는 소련 보텐스키의 권유에 공산당에 가입 - 최초로 공산당 서적을 번역한 사람 - 1933-36년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 - 해방후 건국준비위원회를 전국적으로 조직 - 일제가 조선을 떠나면서 일체의 권한을 여운형에게 이임하였으나 미군이 이를 인정하지 않음 - 1947년 근로 인민당을 조직하여 당수가 됨 - 1947년 한지근에게 저격당함.
여운형은 오늘의 기독교는 벌거벗은 나사렛 예수 골고다의 희생의 예수를 잊어버리고 교회를 강도의 소굴로 만든 매매의 기독교인들이 가득 차 있다. 이러한 현상은 직업적 목사들에게 더욱더 그렇다. 그 안에 있는 청년들은 마치 소경을 따라가는 소경과 같고 이리를 따라가는 양무리와 같아 참으로 불쌍한 교인들이다라고 주장 - 기독교가 사회에 공헌한 것이 금연, 금주, 축첩 반대하는 것으로 끝난다면 어떻게 이 사회를 정의로운 사회로 만들겠는가 하면서 기독교는 극단적 자본주의와 계급사회라 규탄함.
3. 이대위 목사 - 법을 지키는 정신과 분배의 도덕성이 확립되는 데는 기독교 정신이 앞서서 확립해 주어야 하는데 한국 기독교는 극단적 자본주의 체제로서 기독교 자체부터 법의 정신과 분배 정신을 어기고 있기 때문에 항시 사회주의로부터 도전을 받고 있다며 사회를 개혁하려면 우선 기독교 자체를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
이만규, 최문식(대구 폭동 주동), 이재복 목사(14연대 반란 조종, 남로당 서열4위)는 기독교의 사회개혁은 그만두고 기독교를 사회에 이로운 단체가 아니라 이 사회에 해독만 주는 단체라 비판하며 과격한 혁명을 주장 - 이재복은 친일 기독교 인사들이 해방 후에도 고스란히 교권을 유지하는 상황을 보고 혁명을 통해서라도 바른 기독교가 뿌리내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남로당에 가입했다고 체포 후 스스로 털어놓음.
◎ 한국전쟁과 기독교
1949년 소련군이 철수하면서 장비를 인민군에게 인계하므로 인민군의 전력이 증강되기 시작함 - 이승만은 기회 있을 때마다 북진통일을 부르짖음 - 1949년 7월 신성모 국방부 장관은 우리 국군은 대통령의 진격명령을 대기하고 있다고 함 - 미군은 한국의 군사원조 요청을 거절하였는데 물자를 지원해주면 북진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 - 1950년 1월 애치슨은 소련을 자극하지 않는 발언을 함 - 인민군 작전국장 유성철은 1950년 8월경에 남한이 북침할 것으로 판단되어 남침하였다고 증언 - 김일성도 앉아서 죽느니 싸우다 죽자고 북한 백성들을 설득하게 됨 - 남한정부는 6월 23일 경계령을 해제하고 전후방 장병들에게 휴가와 외박을 보냄 - 전쟁 발발후 6월 27일 정기뉴스 시간에 이승만 장로는 미군이 지원하기로 했으니 서울 시민은 피난을 하지 말라고 방송하고 28일 새벽 2시 30분에 한강대교를 폭파시켜 버림 - 6월 27일 교역자 40여명이 모여 서울 사수 결의를 다짐 - 한경직 목사는 우리가 왜정 때도 맥없이 신사참배를 하고 저항도 못하고 해방을 맞이했고 또 이북에서 양들을 버리고 월남했으니 이제는 참회하는 의미에서도 우리는 양을 지키고 또한 수도를 지킬 순교적 각오를 하자고 역설하고 바로 도망쳐 버림 - 서울 수복후 도강파와 잔류파의 싸움 - 도강파는 잔류파에게 왜 피난하지 않고 인민군에 협력하였느냐고 공격하고 잔류파는 서울을 사수하자 결의해 놓고 도망친 자가 누구냐? 미안한 마음으로 얼마나 고생이 많았느냐고 위로해야 되는 것 아니냐고 논박 - 이승만 정부도 부역한 자들에 대한 극단적 재판 가운데서도 잔류파 교역자에 대해서는 처벌하지 않고 내사를 중단시킴 - 천주교는 북한에서도 기독교도연맹에 가입하지 않고, 왜정때도 일본을 찬양하지 않았으며 전쟁과 동시에 교회해산명령을 내리고 피난을 권하여 피해가 적었음 - 한국전쟁 기간 동안 많은 교회와 교역자들이 피해를 입게 됨.
● 고신과 기장, 합동과 통합의 분열사
1945-59년까지의 시기는 분열과 대립의 시기.
1940년 조선신학교 설립 - 평양신학교와의 신학적 단절, 성경무오 거부, 세계조류의 수용, 유수한 신학교 육성을 모토로 내걸고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설립 - 김재준은 성경은 구원에 관한 책이지 과학에 관한 책이 아니며, 따라서 과학이나 역사적인 오류를 담고 있다고 주장 - 세계의 다양한 신학자들을 국내에 소개 - 한국인이 주도하는 신학교를 설립해 한국인의 심정과 상황을 반영하는 신학교육을 제창했다는 면에서 의의가 있음.
박윤선 목사를 주축으로 조선신학교의 진보주의 신학교육에 대한 반동으로 고려신학교 설립 - 평양신학교를 역사적으로 계승하고자 함 - 개혁주의라는 말을 즐겨 사용했던 박윤선 박사 - 개혁주의 유산을 계승하지 못하고 반문화주의와 반지성주의를 반영하는 근본주의라는 평가를 받음.
◎ 장로교의 갈등
1947년 4월 17일 51명의 조선신학교 학생이 자신들이 받는 신학교육이 자유주의니 총회가 개입해 이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청원서를 총회에 제출 - ‘우리는 먼저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라는 조선신학교의 교육이념을 수긍할 수 없습니다...자유주의 신학과 합리주의 신학을 배척하는 것입니다’. - 그들은 교육 내용중에 모세오경의 모세의 저작권 부인, 제1이사야와 제2이사야의 구분, 성경조성의 외부적 영향, 바벨탑과 노아 홍수의 역사성 부인, 성경의 무오성 부인등이 있다고 주장 - 1947년 9월 박형룡 목사가 만주에서 귀국하여 이 문제를 처리함 - 이 사건을 계기로 보수적인 풍조가 다시 총회를 지배하게 됨 - 1948년 총회에서 조선신학교에 보수적인 교수를 더 영입시키는 것을 골자로 한 조선신학교 개혁안이 통과되었으나 조선신학교에서 거부하였고 이에 총회는 총회의 입장을 반영하는 장로회신학교를 설립하고 학장으로 박형룡목사를 내정 - 1947년 고려신학교 교장으로 왔던 박형룡 목사는 여러 선교회와 관계를 맺고, 총회의 인준을 받기 원했지만, 고려신학교 측은 오직 진정한 메이첸주의자들인 독립선교회와만 관계를 맺고, 신사참배를 한 사람들이 주도하는 총회의 인준을 받는 것은 세속화를 의미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거부 - 노선의 차이로 박형룡목사는 고려신학교를 떠나게 됨.
◎ 고려신학교의 탄생
출옥파와 친일파의 갈등 - 산정현 교회 한상동 목사가 월남하여 주남선, 박윤선 목사와 만나 1946년 9월 2일 고려신학교를 세움 - 1946년 48회 경남노회에서 고려신학교 인정을 취소하자 1946년 12월 3일 한상동 목사는 ‘불순한 태도를 고침이 없이 그대로 나아가는 경남노회가 바로 설 때까지 탈퇴한다’고 선언하고 67교회를 데리고 신사참배 교역자들과 결별 - 신학교 교장에 박형룡 목사가 취임 - 1947년 경남노회가 자신들의 잘못을 통회하자, 한상도 목사가 49회 노회에서 탈퇴를 철회 - 1948년 4월 고려신학교 교장 박형룡 목사는 메첸파 선교사와 신앙노선 갈등으로 고려신학교 교장직을 사임 - 박형룡 교장이 떠난 후에 1949년 총회에서 고려신학교는 총회인준 학교가 아니기에 학생을 추천해서는 안 된다고 결정 - 1948년 9월 경남노회 49회 노회에서 고려신학교 설립 인정을 다시 취소 - 1952년 10월 경상노회만 따로 총노회를 열고 총회와의 결별을 선언 - 346교회, 210명의 전도사, 56명의 목사가 분립해 고려파를 설립.
◎ 김재준 목사와 기독교 장로교의 출범
평양 경인상업고등학교 교목으로 있을 시 신사참배 반대로 학교에서 축출 - 평양신학교가 폐교되자 김대현 장로의 50만원 헌금으로 19409년 조선신학교를 설립 - 1946년 ‘신학’ 11월호에 ‘정통신학은 신신학보다 더 교묘하게 위장한 정통적 이단이라’고 하자 조선신학교 학생들이 진정서를 제출하여 사건이 발생 - 학생들의 진정서를 보면 ‘신앙은 보수적이나 신학은 자유다’라는 학교 이념을 이해할 수 없다는 것, 김재준, 송창근, 정대위, 한경직 목사의 강의에 대한 불만등이 담겨져 있다 - 진정서에 대해 김재준 목사는 ‘성경에는 다소 오류가 있으나 그 속에 구속하는 이치가 있다고 믿는다’고 답변 - 1952년 총회는 장로교 신조 제1조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는 자들을 징계한다는 결정을 내림 - 조선신학교의 김재준 목사를 겨냥한 결정 - 총회때 김재준 목사의 교수의 면직, 목사직 박탈, 조선신학교 졸업생 교역자 불채용을 결의하자 조선신학교 설립을 주도한 경기노회는 총회의 결정에 불복하고 1953년 6월 한신 대학에서 38차 총회를 개최하고 기독교 장로회라는 이름으로 공식 출범 - 카나다 선교회와 700교회 12만명의 신도가 참여.
◎ 합동과 통합의 분열
☞ 통합측에서 말하는 내용
- 장로회 신학교는 신학교 부지로 국립공원 터를 불하받기 위하여 당시 학교 회계 김창준 장로가 박호근씨를 박형룡 교장에게 소개해줌 - 미국 선교부로부터 지원받은 학교 대지 구입비 2,253만환을 영수증도 없이 박호근씨에게 박형룡 교장이 지불함 - 정부 관원에게 뇌물을 주기로 하고 받아간 돈 - 돈이 사라진 것에 대해 횡령사건으로 규정하고 총회에서 박형룡 교장에 대한 인책 움직임이 있자, ‘인책을 하면 한국에서 보수 정통이 무너진다’며 N.A.E목사들이 반대함 - N.A.E는 김재준 목사를 학교에서 내어쫓았던 51인의 학생과 그 외 10여명이 1952년 7월에 조직하여 12월에 이 단체에 가입한 것. 이 운동의 고문이 박형룡 박사였음 - 박형룡 교장을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하여 박형룡을 반대하는 자들의 신학을 문제삼기 시작 - W.C.C는 용공이요 신신학이요 단일교회를 지향한다고 공격하면서 매도하자 많은 목회자와 장로들이 현혹되기 시작함 - 이 문제로 결국 1959년 44차 총회에서 합동과 통합으로 분열됨 - 합동은 1962년 박병훈 목사가 주도하는 호헌파가 분열, 김치선 목사가 주도하는 성경장로회로 분열을 거듭하다 1963년 고신측과 합동하였다가 다시 분열됨 - 현재 합동측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분열되어 있음 - 분열하느라 정신이 없는 교단이 사회에 관심이나 제대로 가질 수 있었겠는가.
☞ 합동측에서 말하는 내용
- 한국장로교가 가입해 있는 KNCC의 모체 세계교회협의회(WCC)가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있자 1954년 명신홍과 김현정을 대표로 파송하여 WCC의 입장과 성격을 파악한 후 보고할 것을 요청 - 서로 다른 상반된 보고로 혼란이 가중됨 - WCC를 찬성하는 이들은 한국교회가 이제는 세계 조류와 맥을 같이하고 보조를 같이하기 위해서라도 WCC에 적극 참여하여 배워야 한다는 입장이었고, 반대하는 이들은 이 단체가 교회의 일치가 아니라 연합을 꾀하고 있는 단체이며, 이를 위해서 신학적인 선을 철폐하여 새로운 신학조류를 받아들였고, 심지어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용공적인 성향이 있다는 것 - 한경직, 박형룡박사를 중심으로 한 양측의 싸움은 성명서 발표와 반박등으로 점점 갈등이 깊어지게 됨 - 1959년 총회전에 남장로교 선교구역 안에 있는 10개 노회가 WCC탈퇴를 선언 - 1959년 9월 24일 44차 총회가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림 - WCC문제로 논쟁이 계속되다가 총회가 무산되고, 무산되자 WCC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상경하여 연동교회에서 모여 총회를 속회하고 어떠한 일이 있어도 분열을 원치 않으며, 필연코 통합을 이루고 말겠다고 자신들을 통합이라 명칭함 - WCC를 반대하는 이들도 11월 24일 승동교회에서 따로 총회를 개최하고 우리는 결코 분열을 원하지 않는다, 우리의 소원은 합동이라며 자신들을 합동측이라 명명함 - 이것이 이후 교파의 이름이 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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