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6)

문성식 2021. 4. 26. 20:04

 

        한국교회사, 그 영광과 오욕의 역사(6)

 


교회의 친일행각과 신앙적 변절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 정책
3.1운동 후 사이또 총독이 부임하여 문화정책을 실시 - 이것이 기독교와 갈등을 일으킴 - 1925년 남산신궁이 완공되었고 면 이상에 1개씩 전국에 2,229개의 신사를 설립하여 전국민에게 신사참배를 강요 - 신사의 기원은 일본의 가미()에 대한 신앙과 이에 대한 제사의식에서 출발 - 명치이래 신도는 일본의 국교가 됨 - 자연물, 역사적 인물, 조상, 권력자들을 가미로 섬김 - 1931년 만주사변 후부터 본격적으로 강요 - ‘신사참배는 애국적 국가 의식이니 모든 국민이 반드시 지켜야 할 마땅한 생활규범이다 - 신도는 일본 조상의 영과 국가 공로자의 영, 순국 군인들의 영을 숭배하는 종교로 한국사람은 자기들을 괴롭힌 일본 조상과 죽은 군인의 숭배를 강요당한 것.
 
신사참배 논쟁
일제시대 한국교회가 만난 가장 큰 박해는 1936년부터 45년까지 있었던 신사참배 강요 - 1911105인 사건이나 1919년의 삼일운동 탄압보다도 더 크고 직접적으로 기독교 신앙에 위협을 가했던 운동.
 
신사의 본질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는 조선을 일본의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일환으로 시작 - 남산에 조선신사조영공사를 1925년에 완성하고 전국에 크고 작은 무수한 신사를 건립 - 일제는 신사를 종교적인 차원이 아니라 국민의 국가에 대한 예의 차원이라 선전 - 그러나 신사와 조선을 쓴 오야마조차도 신사를 종교라 칭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위대한 종교가 되지 않으면 아니된다고 기록.
 
신사참배 강요
일제가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가장 우선순위를 둔 곳이 기독교 학교 - 천주교회는 1936신사참배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이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는 교황청 발표이후 참배하였고 감리교도 국민의례에 불과하다며 공식적으로 참배하기 시작 - 남장로교 선교부 총무 풀톤은 19372월에 모든 기독교 학교가 폐교되고 심지어 한국 선교지에서 철수하는 한이 있더라도 신사에 참배할 수 없다는 풀톤성명을 발표 - 이후 기독교학교는 폐교되거나 자진 폐교하게 됨.
 
신사참배 반대운동
19351114일 야스다게 평남 도지사는 도내 전학교에 신사참배 명령을 내림 - 기독교계 학교의 반대 - 전국 각 도에서 도내 전학교에 신사참배 명령을 내렸으나 기독교계 학교가 거부하여 폐교되거나 자진폐교함 - 카톨릭, 감리교에 이어 장로교도 193827차 총회에서 신사참배 결의 - 이 결의에 반대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신사참배 반대운동이 펼쳐짐 - 이기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펴기 위해 자신이 사역하던 평북 의주의 북하단교회를 사임하고 전국에 부흥회를 인도함 - 반대운동을 펴던 목사들의 결의내용을 보면 신사참배를 하는 학교에 자녀를 입학시키지 말 것,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일으켜 현실 교회를 약체화내지 해산시킬 것, 신사참배 반대 신도를 규합하여 가정예배를 드리며 그것을 육성하여 교회를 신설할 것.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말 것, 신사참배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말 것, 신사참배하는 교회에 십일조나 연보를 하지 말 것 등이다 - 일제는 신사참배 반대를 주도하는 목회자를 투옥하고 교회를 폐교시켰으며 교단을 해체시키기도 함.
19423월 일본은 한국의 기독교를 일본 기독교 조선혁신교단으로 개명하고 성경과 찬송가도 일부 삭제함 - 그해 12월에 성결교 교단지 활천지 폐간, 서울신학교도 폐교시키고 예수재림을 주장한다 하여 성결교 목사,장로,집사등 300명 검거후 19431229일 성결교 해체, 이후 교회를 군수공장으로 사용함 - 성결교 해산 성명서의 내용 중 여호와 이외 신이 없다는 사상을 선포하여 온 것은 실로 국민사상을 혼미에 빠뜨린 것으로 그 죄를 통감하는 바입니다...자발적으로 해체하게 되었다라는 기록이 있으며 해산을 주동한 인물은 이명직 목사.
 
신사참배 반대로 2천여명의 성도가 구속되었고 50여 명이 고문 끝에 순교하였고, 200여 교회가 폐쇄됨.
 
신사참배 반대를 주도했던 인물들 - 박관준, 안이숙, 이기선, 한상동, 주기철, 손양원, 최봉석, 이인재, 채정민, 최수옥, 고흥봉, 김화준, 최정희, 오윤선, 손영복, 최덕기 등.
 
 
위대한 신앙의 인물들
1. 박봉진 목사(성결교) - 철원성결교회 담임으로 있던 중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 후 순교.
2. 이기풍 목사(장로교) - 13년동안 제주도 복음화에 헌신하던 중 신사참배 반대로 순교.
3. 유관순(감리교) - 이화학당 재학 중 고향으로 내려가 만세운동 주도 - 주동자가 누구냐고 물으면 하나님이다라고 대답 - 그의 밥에 쇳가루와 모래를 섞어 주어 위장을 파괴시켜 죽게 함
4. 신석구 목사(감리교) - 3.1.운동 참가로 구속 후 재판시 오늘에 형식상으로 조선 독립이 성립되지는 않고 있으나 씨를 뿌리는 사람이 반드시 추수가 있을 것을 판단하고 일하는 것처럼 반드시 조선 독립의 열매는 거두어질 것임에 틀림없다고 대답 - 1942년 대동아전쟁 승리 예배를 거부한 것이 죄가 되어 또 구속 - 수감 중 해방으로 석방됨 - 해방 후 인민공화국 재판에서 10년형 선고받고 복역 중 인민군이 퇴각하던 195010월에 처형됨.
5. 주기철 목사(장로교) - 평양신학교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 - 신학생 장홍련이 평북노회장 김일선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버림을 시작으로 반대운동을 전개 - 장홍련을 사주했다는 명복으로 주기철 목사 구속 - 1940년 일본 경찰이 설교를 하지 말 것을 요구할 때 하나님에게서 받은 설교권인데 경찰이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둘 수 있겠느냐고 하였고 그만두지 않으면 체포한다는 말에 설교는 내가 할 일이고 체포는 당신이 할 일이다고 대답 - 신사참배 반대로 인해 1940년 평양노회에서 목사직 파면 - 수감 중 고문으로 순교.
예수를 버리는 것이 죽는 길이며, 예수를 따라 죽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이라 자각 - 이 민족이 죄를 자복하고 주께 돌아오는 바로 그것이 민족의 구원과 해방의 출발이라 생각 - 당시 정치적 민족주의자들과의 차이.
6. 최봉석 목사(장로교) - ‘천황이 높은가? 하나님이 높은가?’라는 질문에 하나님이 높다고 대답하였고 예수가 두 번째 와서 세상을 심판하는가라는 질문에 예수님이 두 번째 와서 심판도 하고 천황도 죽는다고 대답 - 고문 끝에 순교.
7. 박관준 장로(장로교) - 십자의원을 경영하던 의사로 안이숙 성도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1939322일 종교법안이 상정되는 날 일본 국회 2층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이다 소리를 지른 후 경문 일본은 유황불에 망한다1층으로 던짐 - 즉시 체포 후 국내로 이송되어 수감 중 70일 금식을 계속하다 순교.
8. 한상동 목사(장로교) - ‘천황도 사람이다하여 신사참배 반대투쟁 전개 - 수감 중 해방이 되어 출감.
9. 안이숙 성도(장로교) - 신사참배를 거절하여 교사로 있던 학교에서 축출 - 일본말을 잘 하여 박관준 장로가 일본동행을 요구 - 국회사건 후 체포 - ‘천황은 사람이며 회개하지 않으면 지옥으로 간다는 말로 심한 고문을 받고 수감 중 해방이 되어 출옥됨 - 일본은 45818일 교도소에 수감중인 전 기독교인을 사형집행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음.
10. 정태희 장로(성결교) - ‘내 생명이 있는 한 나를 버리지 않는 예수를 내 어찌 배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며 신사참배 반대 - 고문으로 순교
11. 조만식 장로(장로교) - 3.1운동에 가담하기 위해 오산학교 교장직을 사임함 - 그를 통하여 학교에 어려움이 올 것을 방지하기 위해 - 1922년 당시 국민 생필품의 80%가 일본산이라는 것을 보고 조선물산장려회 결성하여 국산품 애용을 권장 - 평생 짧은 두루마기를 입고 살 정도로 검소한 생활과 절제 생활을 함 - 조선일보 사장으로 있을 시 양복을 입을 것을 권고하자 나 조만식을 만나지 입은 옷을 만나느냐하며 거절함 - 1941년 윤치호, 이광수가 평양에서 학병지원을 권장하는 연설을 하고 있을 때 일제는 조만식 장로에게도 연설을 부탁하였으나 나는 남은 여생 입을 다물고 살기로 작정한 사람이오, 돌아가시오라고 하며 강력히 거절 - ‘기독교인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연설에서 첫째 하나님과는 믿음으로, 둘째 자기와는 극기(인내), 셋째 대인관계는 헌신이라고 강조 - ‘내가 죽은 뒤에 비석을 세우려거든 비문을 쓰지 말고 그 대신 커다란 눈동자 두 개를 새겨주오. 그러면 저승에서라도 한눈으로는 일본의 망하는 것을 보고 또 한 눈으로는 조국의 자주독립을 지켜 볼거야라고 함 - ‘오늘날 우리 민족이 이렇게 가난하게 된 원인은 자기 것을 천시하고 남의 것을 귀히 여기는데 있다고 질타함 - 해방 후 건준 평양위원장, 조선민주당 당수를 역임하다 전쟁중 피난을 거부하다 죽임을 당함.
 
신사참배를 결의한 교역자들
19411월 일제는 창씨개명과 한국말과 글의 사용금지를 명령하여 한국인들을 완전한 일본인으로 만들려고 함 - 김치 대신 다꽝, 치마 대신 몸배, 어린이들 놀이도 고무줄 가지고 놀도록 하고, 윷보다 화토를 장려하여 의식구조를 완전히 망가뜨려 다시는 일본에 항거하지 못하도록 정책을 시행 - 신사참배는 우상숭배이기 이전에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정책 - 개신교중 가장 먼저 신사참배를 결의한 감리교의 신사참배 결의문을 보면 아 국체의 진 정신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실현하야 총후 국민의 의무를 이행하고 신체제에 순응함은 아 기독교인의 당연한 급선무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음.
 
한국교회 지도자들은 한강, 부산 송도에서 일본 귀신대장 미스 기바라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 - 갈홍기, 유형기 목사등은 목사들을 교육한 후 세례 후 머리에 일장기를 두르고 남산 조선신궁까지 구보한 후에 신사참배를 하도록 함 - 해주장로교 김응규 목사는 천황사진에게 배례하기를 건의할 정도 - 193781일 승동교회에서 시국설교 및 기도회를 개최하여 내선일체를 재인식할 것과 일본의 전승을 위하여 매일 아침 기도할 것을 결의 - 1940년 조선신학교를 개설한 승동교회 차재명 목사는 충량 유위한 황국의 기독교 교역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수업한다고 함 - 신흥우는 우리는 조선인이기 전에 일본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위대한 구주 예수는 먼저 그 나라를 사랑하고 가르쳤다. 그 나라는 바로 대 일본제국이다고 주장함 - 정인과는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것은 국민으로서 하지 못할 자국에 대한 반기를 드는 것이라 하여 일본을 자국이라 함 - 총독부 강요에 따라 교회마다 국기게양대를 만들어 일본기를 게양하게 하였고, 교인들에게 국기에 대한 배례, 동방요배, 국가봉창, 황국신민서사제창등을 하게 함 - 교회 안에 가미다나를 설치하고, 예배를 드리기 전 여기에 절을 먼저하고 천황에게 동방요배를 한 다음 예배를 드림 - 목사들 복장은 일본식 군복 - 기독교 신앙고백인 사도신경이 신도의 창조설화와 위배된다고 하여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를 고백하지 못하게 하여 이 문장들을 빼고 신앙고백하게 함 - 1944년 감리교 정춘수 통리사는 구약성서와 신약의 묵시록을 사용치 말고 사복음서만 가지고 설교하고 예배를 주1회만 드리고 나머지 시간은 노력 봉사할 것을 결의 - 1940년 성결교 이명직 목사는 우리는 성서교훈에 의하여 모든 권세가 하나님께로 난 줄을 믿으며, 대일본제국을 통치하시는 천황을 봉대하고 국헌을 중히하며 국법을 순종한다로 성결교 헌법을 개정 - 또한 그는 황실은 신성불가침이요 절대요 통치자이므로 공경해야 한다. 신자는 제도에 순응해야 한다고 활천 219호에 기고 - 193827차 장로교 총회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 우리들은 신사가 종교가 아니며 동시에 기독교 교리에 반하지도 않는 본뜻을 이해하고 신사참배가 애국적 국가의식인 점을 자각한다. 따라서 이제 신사참배를 솔선 실시하고 나아가 국민정신 총동원운동에 참가하며 또 현 시국 하에서는 총후 황국시민으로서 충성을 다할 것을 약속한다 - 1938년 홍택기, 김길창, 양주삼, 김종우, 이명직 목사등은 기독교 대표로 일본의 이세신궁 가시하라신궁 등에 참배함 - 1943년 감리교 총리가 된 정춘수 목사는 기독교조선감리교단으로 혁신을 단행하여 명실공이 대일본의 종교라는 열매를 거두게 되었다고 강조하며 각기 본분을 다하여 군국에 충성을 보답한다라고 주장함 - 예배당을 매각하여 일본의 전쟁비용으로 헌납함 - 조선기독교는 교단별로 일본 교회로 통합하여 일본 기독교 조선 장로교단’ ‘ 일본 기독교 조선 감리교단등의 이름으로 교단이름이 개정 - 1945719일 일본 기독교 조선교단으로 통합시켜 버림
 
대표적 친일 기독교인들 - 유형기, 정춘수, 정인과, 갈홍기, 윤치호, 구자옥, 양주삼, 신흥우, 김활란, 이명직, 홍택기, 박응률, 박인현, 길인섭, 김길창, 심익현, 오문환, 전영도, 채필근, 송창근, 김관식, 박희도, 차재명, 김영주 등.
 
징병제, 정신대징집을 찬양한 교역자들
1942년 총독부에서 징병제를 발표하자 친일파들은 일제히 환영함 - 1942511일 기독교 대표들은 승동교회에서 징병제 시행감사 전 경성 신도대회를 개최하고 성명서를 제작 - ‘합방 이후 이 날이 오기를 얼마나 앙망하고 있었던가....지금이야말로 황국신민이 되는 대도가 열린 것이다....아등기독교는 솔선 몸으로서 이것이 지도에 당한 정신대가 되기를 전 동포에 호소하고 또한 서약하는 바이다’ - 김활란은 194212신시대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커다란 감격이 왔다. 반도여성은 웃음으로 내 아들과 남편을 전장으로 보내야 한다며 적극 협력을 강조 - 선전선동만 한 것이 아니라 군수품 제작을 위해 교회 종 2,500여 개를 헌납 - 정인과 목사를 중심으로 한 조선야소교장로교 애국헌납 기성회에서는 비행기 한 대와 기관총 구입비를 바침 - 감리교는 교회를 매각하여 군납헌금을 함 - 19427월 장로교는 조선 장로호라는 해군 비행기와 육군 비행기를 미군과 싸워 이겨달라고 헌납하였으며 이 헌납예식은 신도의식으로 거행.
 
일본 매춘부등을 중심으로 운영되던 군 위안소도 1938년부터 성병들의 문제 등으로 인해 안전한 한국여성들을 모집하여 운영하기 시작함 - 정신대 징집을 잘 한 관리들을 포상하는 정책을 통해 무자비하게 징집해 감 - 심지어 12-14세의 국민학생들도 징집해 감 - 정신대를 많이 보내는 학교에게는 교장이 영전되는 특혜를 줌 - 19455월까지 강제 징용자는 210(50)만명, 정신대로 끌려 간 사람은 20만명에 이름.
 
태평양 전쟁을 찬양한 교역자들
1940년 프랑스와 네델란드가 나치스에 항복하여 동남아시아에서 그들의 군사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자 일본은 이 기회를 틈타 이 지역을 점령하기 위하여 태평양전쟁을 도발 - 19411220일 미.영 타도 좌담회가 박희도 목사의 사회로 개최됨 - 그 자리에서 나온 발언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백락준(조선야소교서회 편집총무) - 이렇게 숭고하고 위대하고 엄숙한 한낱의 전쟁을 가진 적은 없었다 - 해방후 문교부 장관과 연세대 총장 역임.
2. 전필순 목사(조선장로교회 부총무) - 이 성전의 목적관철을 위해 전심 전력을 바쳐서 싸울 것입니다 - 이후 장로교 통합측 총회장이 됨.
3. 정춘수(조선감리교 총감독) - 복음의 해독 중 하나는 이 세상은 장차 멸망할 것이라고 가르친 것입니다....그 완전한 함락이 시간문제임을 믿을 때 형언할 수 없는 유쾌함과 감격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 해방후 천주교로 개종, 평신도로 지냄.
4. 김인영 목사(조선감리교 신학교장) - 미국인은 선교와 함께 투자를 행하고 종교와 함께 장사를 하는 사람들입니다.
5. 한원석 목사(장로회보 주간) - 그들은 입으로는 정의와 인도, 자유와 평등을 주장하지만 우리들 유색인종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우월감을 갖고서 우리를 이용했을 뿐 베푼 것은 멸시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6. 양주삼 목사(조선성서회 행정총무) - 우리는 오직 황국과 더불어 생사를 함께 할 결심이 있을 뿐이다.... 드디어 반도 청년학도 제군에게도 무인으로서 출전할 기회가 주어졌음을 나는 한없이 기뻐한다.
7. 최태용 목사(복음교회 감독) - 우리는 가장 사랑하는 것을 일본국에 바치도록 신에게 명령받고 있는 것이다. 징병제 실시가 그것이다. 우리는 일본국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박희도는 1939년 동양지광을 창간하고 권두언에서 내선인의 뇌리에 2개의 대립된 민족의 존재를 연상시키는 것 같은 관념을 불식시키고라고 주장하며 징병제가 실시되자 동방을 향해 엎드려 경배하며 감격에 목이 메였다고 함.
채필근은 국민 정신 총동원이 필요한 이때 종교인들도 국가에 충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 이단이라고 말하는 자야말로 도리어 이단이다고 주장.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던 일본인과 한국인
1. 일본 동경대학 총장이며 기독교 신자였던 야나이하라 - ‘일본은 망해야 하며 일본은 망할 것이다라고 외치며 데모를 함.
2. 해주의 감리교 김만식 전도사 - ,일전쟁은 성스러운 전쟁이 아니라 죄악이다.
3. 안동교회 이윤재 장로 - 우리 글을 사용하지 못하게 한 때 오히려 한글을 연구하여 우리말 사전을 출판한 일로 1943년 함흥감옥에서 순교.
4. 홍천의 모곡감리교 남궁억 전도사 - 벚꽃 심기 운동이 한창일 때 무궁화 심기운동을 펴고 민족정신을 고취시킴.
5. 조만식 장로 - 징병제 찬양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