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육도윤회(六道輪廻)

문성식 2019. 5. 27. 08:22


육도윤회(六道輪廻)

죽음은, 이 세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 중 대표적인 하나일 것이다. 그것은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는다. 모든 생명은 죽음 앞에서 평등하다.그러나 아무도 죽음 이후의 세계를 모른다. 다만 살아 있는 자들 나름대로의 상상하고 추측할 뿐이다.

예로부터 이러한
사후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가지 견해가 있어 왔다. 첫째가 단멸론적 견해로써 생명은 죽음으로 끝난다는 주장이다. 무신론자나 무종교 자들이 취하고 있는 이 주장은 생명과 정신을 일회성으로 보고있다.죽은 후의 영혼따위는 존재하지 않고 내세도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이러한 단멸론적 견해는 자칫 극단적 이기주의나 쾌락주의로 빠지기 쉬운데 부처님 당시의 아지타와 같은 인물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둘째는 심판론적 견해로써 신을 중심으로 한 종교의 내세관이 여기에 속한다. 기독교의 경우, 인간과 만물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하나님은 자신을 믿고 복종하는 인간을 위해 천국을 만들었고 자신을 부정하고 거역하는 인간을 위해 지옥을 만들었다. 인간의 영혼은 죽은 후에도 끝나지 않고 신의 명령에 따라 천국이나 지옥에 다시 태어나서 영원히 행복을 누리거나 고통을 받아야한다.

셋째는 윤회론적 견해로써 불교와 힌두교 같은 종교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다. 이에 의하면 모든 생명은 과거에도 무한히 생사를 거듭해 왔고, 현재의 육체가 소멸된 사후에도 영혼은 남아 여러가지 생명체 중의 하나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고 한다.

윤회라는 말은 인도어 삼사라(samsara)에서 비롯된 말이다. ‘방황하다’ ‘헤매다’라는 뜻의 말인데 보통 ‘나고 죽음을 끊임없이 반복하다’로 해석한다.

윤회설은 본래 불교가 생기기 이전부터 인도에 있었던 사상이다. 인도인들은 우주와 생명을 끊임없이 순환하는 존재로 보아왔다. 즉 시작도 없는 무한한 과거로부터 우주와 생명은 생성소멸을 반복해 왔고 진리를 알지 못하는 한은 앞으로도 영원히 이같은 과정은 되풀이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인도의 전통적인 세계관과 생명관이 불교에 전승되어 핵심 사상으로 자리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해서 인도 전통에서 내려온 윤회설과 불교의 윤회설이 같다고 하는 말은 절대 아니다.불교에서도 모든 생명은 이 세상에 오기 전에 무수한 생의 과정을 겪어 왔다고 말한다. 흙과 물과 불과 바람으로 이루어진 생명의 육신은 소멸되어도 그가 생전에 지었던 모든 행위의 결과는 마음속에 그대로 저장이 되어 업식이 되는데, 이 업식은 차원에 따라 다음 생의 몸을 받는 주체가 된다.

그런데 이 업식은 다른 종교에서 말하는 영혼의 개념과 같이 쓰이지만 그 성격에 있어서는 아주 다르다. 다른 종교에서의 영혼이라는 것은 영속적이고 실체적인데 비해 업식은 가변적이고 비영속적이다. 영혼은 살아 있을 때나 죽었을때나 영원한 존재이지만 업식은 그 성질이 본래 무아적이고 공한 것이기 때문에 인연을 만나면 변할 수도 있고 수행을 하여 진리를 깨달으면 사라질 수도 있다.

<정법념처경>에서는 생명들이 몸을 마치고 난 다음 다시 태어나야 될 장소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는데, 이 경에서는 그 종류를 여섯 갈래로 크게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육도(六道) 혹은 육취(六趣)라고 한다. 육도는 천상도, 수라도, 인간도, 축생도, 아귀도, 지옥도로서 생명들이 생전에 지었던 선과 악의 경중에 따라 태어나는 곳이다.

<정법념처경>의 말을 빌리자면 재능있는 화가가 물감으로 여러가지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마음은 갖가지의 업으로 육도윤회의 그림을 그린다고 한다. 마음이라는 화가는 번뇌에 더럽힘이 없는 착하고 사랑스런 업으로 천상이나 인간의 그림을 그리고, 투쟁과 증오와 질투의 업으로는 아수라의 그림을 그리며, 우치와 탐욕과 어둠으로는 축생의 그림을 그리고, 살생·도둑질·음행·망어 등의 악한 업으로는 지옥의 업을 그린다고 한다.

이 말씀에 비추어 보면 육도윤회는 모든 생명의 마음에 의해서 지은 것이고 신의 심판이나 다른 곳에 원인이 있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자업자득, 인과응보의 세계로 지어진 것이 육도윤회의 갈래라면 자신의 내세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지금도 살펴 볼 수 있는 것이다.

불교의 내세관인 윤회설(혹자는 불교의 내세를 극락세계로 보고있지만 이는 잘못된 시각이다)은 타종교의 심판에 입각한 내세관처럼 닫혀 있지 않다. 타종교의 천국이나 지옥은 한번 들어가면 복과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다시는 못나오는 절망의 세계지만 불교의 천국이나 지옥은 복과 죄에 대한 과보를 다 치르고 나면 언젠가는 벗어나게 되는 희망의 세계이다.

윤회의 세계는 고정적인 영원의 세계가 아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사실은 윤회라는 것이 꼭 사후에만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저승뿐 아니라 현실의 일이기도 하다는 말이다.몸뚱이의 모습이 천상·수라·인간·축생·아귀·지옥으로 가서 바뀌는 것이 아닌 마음이 바뀔 적마다 만들어지는 윤회가 바로 그것이다. 지금 이 순간도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마음속의 윤회야말로 현재 실존하는 윤회인 것이다.

이미 말했듯이 착한 행위를 많이한 중생이 태어나는 곳이 기쁨이 가득한 천상도이고 선행과 악행을 비등하게 한 중생이 가는 곳이 우리가 사는 인간도이다. 성냄과 투쟁을 일삼은 중생이 가는 곳이 아수라도, 어리석은 중생이 가는 곳이 축생도이며, 탐욕이 극에 달한 중생이 가는 곳이 아귀도이다. 그리고 온갖 악행을 지은 중생이 가는 곳이 고통이 많은 지옥도이다.

이 말을 우리들의 마음 안에 적용시켜보면 윤회가 결코 바깥 세계만의 일이 아님을 금세 알 수 있다.
즉, 한마음이 기쁘면 천상이요, 한마음이 선악 분별을 하면 인간이요, 한마음이 성을 내면 아수라다. 한마음이 어리석으면 축생이요, 한마음이 욕심을 일으키면 아귀요, 한마음이 고통스러우면 지옥인 것이다.

이처럼 윤회는 우리들의 마음에서 끊임없이 존재한다. 하루 가운데 한시간, 아니 일분 일초 가운데에도 윤회는 쉬지 않는다. 천상에서 지옥까지 오르락 내리락 서로 교차하면서 윤회를 짓고 받는 것이 중생들의 현실이다. 일념마다 생사가 있고, 일념마다 윤회가 있고, 일념마다 세계가 있으니, 스님들이 망자의 극락왕생을 위해 축원 할때 나오는
‘일일일야 만생만사 수고함령’(一日一夜 萬生萬死 受苦含寧)이란 말이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말이 어찌 죽은 넋을 향해서만 하는 소리일까.

하루낮 하룻밤 사이에도 만번을 태어나고 만번을 죽으며 온갖 고통을 받는 불쌍한 넋, 이는 다름 아닌 지금 이순간에도 일고 꺼지기를 되풀이 하면서 윤회도를 짓는 중생들의 마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나 자신은 바로 이순간 어떤 곳에 태어나고 있으며 어떤 윤회를 짓고 있을까? 우리가 만약 살아있는 중생의 마음속 윤회를 바로 보고 벗어나지 못하면 내세에 역시 닥쳐올 윤회를 면하기 어렵다.

지옥 아귀 축생과 같은 악도를 짓는 행위는 절대로 지어서는 안된다. 천상과 인간의 도를 지어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은 더 없이 좋은 일이다. 그러나 더욱 행복한 일은 천상과 인간의 길 조차도 벗어나서 육도윤회가 사라진 해탈을 이루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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