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4. 조선시대의 불교
2) 왕실의 후원과 불전의 간행
왕실의 불교 후원
태조는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고 불교정책에서도 매우 호의적인 입장을 취하였다.
개국 원년(1392)에 무학 자초(無學自超, 1327~1405년)를 왕사로 삼았고,
3년에 천태종 승려 조구(祖丘)를 국사로 삼았다.
무학대사는 나옹의 제자로서 조선 개국과 한양 천도에 큰 역할을 하였다.
태조는 법화경 3부를 금으로 사경하여
조선의 건국 과정에서 희생된 고려 왕씨의 명복을 빌었고,
성 안의 거리에서 승려가 경을 외우며 행차하는 경행(經行)을 허락했다.
또한 개경의 연복사를 중창하고 한양에 흥천사를 세우는 등
민심안정의 차원에서 불교를 잘 활용하였다.
그리고 강화도 선원사에 있던 대장경판을 해인사로 옮기게 하는 등
대장경판 보존에도 큰 관심을 보였다.
내불당을 설치하고 비구니 사찰인 정업원을 존속시킨 것을 포함해서
재위 7년 동안 10여 회가 넘는 대장경의 간행과 수십 회에 이르는
대규모의 법회 개설 등은 불교에 대한 태조의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태종대에는 국가에서 행하는 각종 불사를 금지하였지만
수륙재 등의 왕실 관련 행사는 여전히 거행되었다.
태조의 사후 사십구재 및 법회를 행하고 재궁으로 개경사(開慶寺)를 세우거나
태조의 원찰인 흥덕사 창건을 돕는 등 특히 태조와 관련된 불사에는
태종 자신이 적극적으로 간여하였다.
세종대에도 종단을 통합하고 승려의 수를 줄이는 불교 억제정책을 쓰고 있었지만,
왕실에서의 불교행사는 예전과 같이 거행하였다.
특히 집권 후반기로 갈수록 세종은 불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흥천사의 사리각을 중수하는 등 각종 불사를 행하였고 혁파된 내불당을 다시 설치하였다.
세조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호불(好佛)의 군주로서 몸소 경전을 필사하고
수많은 경전을 간행, 번역하게 하였고 원각사를 창건하는 불사도 벌였다.
이는 무력반정을 통해 왕위에 오른 세조의 개인적 고뇌나 취향과도 관련이 있겠지만,
한편으로는 양반 사대부들을 주된 대상으로 하는 성리학과 달리
일반 민중들과도 깊은 관련을 맺고 있는 불교를 중시함으로써
양반 사대부들의 힘을 억제하고 국왕을 중심으로 하는 통치체제를 구축하고자 했던
세조의 정치적 의도가 반영된 것이기도 하다.
태조대부터 세조대에 이르기까지 관행으로 정착된 왕실의 불교행사의 일부는
이후 억불정책이 심화된 성종대나 중종대에도 계속될 수 있었다.
세조의 불교정책은 수미(守眉)와 신미(信眉),
그리고 신미의 문하인 학조(學祖)와 학열(學悅) 등을 통해 추진되었다.
신미는 세조의 총애를 받았던 김수온의 형으로
이미 세종대부터 왕실의 신뢰를 얻고 있었다.
그는 세조의 후원 아래 오대산 상원사 중창에 힘썼고
간경도감의 불전 간행과 불전 언해 사업에서 큰 역할을 하였다.
학조와 학열은 많은 왕실 관련 불사에 관여했는데,
이들이 관여한 왕실 원찰인 상원사와 낙산사는
산업경영과 재산증식으로 서민들에게 피해를 주어 비난받기도 했다.
이에 선종판사였던 신미는 승려들이 불사를 위해서 모금하는 것은
민간에 폐해를 끼치므로 금할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불전 간행과 간경도감
억불정책의 추진으로 불교계가 크게 위축되었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왕실의 후원 아래 불교의 보급을 위해서 새로운 불서를 편찬하고
불전을 간행하는 노력도 있었다.
훈민정음이 반포되기 직전인 세종 30년(1448)에
최초의 한글 불서인 『석보상절(釋譜詳節)』이 간행되었다.
이는 부처님의 일생을 담은 것인데, 이후 세조가 된 수양대군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종의 찬불가인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도 출간되었고,
세조 5년(1459)에는 이 두 가지를 묶은 『월인석보(月印釋譜)』가 간행되었다.
세조 7년(1461)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여 본격적으로 다수의 불서를 간행하고
아울러 훈민정음으로 불경을 번역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일반에게 널리 읽히는 법화경, 금강경, 능엄경 등의 경전과
수심결, 몽산법어 등의 선서가 훈민정음으로 번역되었고
승려들의 교육에 필요한 다수의 경전들이 간행되었다.
이러한 작업에는 세조가 직접 구결언해를 하며 참여했고,
효령대군, 김수온, 신미 등의 왕실 종친과 승려 등이 함께 역경사업에 종사했다.
이는 한글 보급이라는 의의뿐만 아니라
불교의 대중화, 불교자료의 보존 및 계승이라는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성종대에 간경도감이 혁파된 이후에는
대비들을 중심으로 하는 왕실의 후원으로 금강경삼가해, 천수경, 오대진언,
육조단경 등이 훈민정음으로 번역되었다.
조선 전기의 불교관련 저술이 거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현존하는 문헌들은 조선 전기의 불교를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조선 전기의 불교의례와 신앙
조선 전기에 행해졌던 불교의례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연등행사와 수륙재(水陸齋)이다.
고려 때 팔관회와 함께 국가적인 행사로 시행되었던 연등회는
고려 말 이후 음력 4월 8일의 석가탄신일 봉축행사의 일환으로 민간에서 널리 행해졌다.
수륙재는 음식을 뿌려 물과 땅에 퍼져 있는 혼령과 귀신의 고통을
구제하고자 하는 법회로 왕실에서 주로 행해졌다.
죽은 국왕과 왕족의 명복을 빌거나 왕족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기 위해 베풀어졌으므로
약사법회와 함께 하는 경우가 많았다.
불교의례는 왕실만이 아니라 민간에서도 성행하였다.
사대부들이 적극적으로 권장한 유교의례는
그 때까지만 해도 사대부들 사이에서만 행해졌으며,
사회 전반에 정착되지는 못하였다.
특히 상례와 장례 등은 여전히 불교적으로 거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조선 전기에 불교는 여전히 민간에서 존중되고 있었는데, 왕실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왕실의 일화 중에는 관음보살과 관련된 이야기가 많다.
예컨대 세조가 상원사에 갔을 때 백의(白衣) 관세음보살이 현현했다고 하는데,
그 당시의 상황은 『관음현상기』에 전한다.
그 밖에 진언과 다라니집이 간행되는 등 밀교적인 신앙도 활발하였다.
조선 전기에는 주로 왕실 중심으로 밀교의례가 거행되었지만
후기에는 민중신앙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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