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3절 한국불교 - 4. 조선시대의 불교 - 3) 불교의 부흥과 교단 정비

문성식 2016. 11. 27. 2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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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4. 조선시대의 불교
        3) 불교의 부흥과 교단 정비 선교 양종의 재건과 의승군의 활동 폐불정책으로 인하여 산 속에 은둔했던 불교계는 명종대에 국왕의 모후인 문정왕후의 후원을 얻어 일시적으로 재건의 기회를 맞게 되었다. 명종 5년(1550)에 문정왕후는 보우(普雨)를 선종판사로 등용하면서 양종을 재건하게 하였고, 승과와 도첩제를 다시 실시하게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불교 우대정책은 성리학적인 사회의 건설을 추구했던 사대부들의 강한 반발을 받았다. 명종 20년(1565)에 문정왕후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그 동안 시행되었던 정책들이 대부분 다시 폐지되었고, 보우는 제주도에 유배되어 고문을 당하다 순교하였다. 그렇지만 이 시기에 승과를 통해 능력을 갖춘 승려들이 공식적으로 배출되었고 이들이 승직을 맡아 불교계를 직접 관장했던 것은 이후 불교가 부흥하는 기틀이 되었다. 조선 후기 불교계의 중심인물이 된 서산 휴정(西山休靜, 1520~1604년)은 승과에 합격한 후 교종ㆍ선종판사를 겸직하면서 불교계를 주도하게 되었고, 사명 유정(四溟惟政, 1544~1610년)도 승과를 통해 중앙에 진출할 수 있었다. 문정왕후 사후에 위축되었던 불교계는 임진왜란의 시기에 의승군 활동을 벌이면서 새로운 존립 기반을 마련하게 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공주 갑사에 있던 영규(靈圭)는 800여 명의 의승군을 조직하여 조헌이 이끄는 700여 명의 의병과 함께 청주성을 탈환하여 전쟁 발발 후 첫 승전을 거두었다. 이와 함께 의주에 몽진해 있던 선조는 묘향산에 있던 휴정을 불러 의승군을 조직할 것을 명하면서 팔도도총섭의 직책을 수여하였다. 이미 73세이던 휴정은 이에 호응하여 전국적 규모의 의승군을 조직하였다. 의승군의 조직은 중앙의 도총섭을 중심으로 각 도별로 선교양종(禪敎兩宗)의 총섭이 임명되어 각기 의승군을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들 의승군은 군량 운송 및 비축과 산성 축조 등 후방 지원 역할을 수행하였고 선조 호위 수행 및 평양성 탈환, 한양 수복 등의 전투에도 참여했다. 특히 유정은 일본과의 외교를 담당하여 전후 포로 3,000여 명을 데리고 왔는데, 이처럼 임진왜란에서 승려들은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는 불교의 사회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나라에서도 인정하여 정조 12년(1788)에 대흥사 안에 표충사가 지정되었고 묘향산 수충사와 밀양 표충사에서도 휴정과 유정 등이 향사되었다. 정묘호란 때는 휴정과 유정의 법을 이은 명조(明照)가 팔도의승대장에 임명되었고 의승군이 안주에서 전공을 세웠다. 또한 부휴 선수(浮休善修)의 제자인 각성(覺性)은 팔도도총섭을 제수 받아 남한산성 축조를 관장했다. 병자호란 때는 삼남지방의 3,000여 명의 승병을 모아 항마군을 조직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승군의 활동은 불교가 사회적으로 인정되는 계기가 되었고 그러한 자신감은 문파의 성립으로 이어졌다. 문파의 성립과 법통설의 확립 왜란과 호란을 겪고 난 이후 불교계에는 특정한 스승을 계승하는 문파들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그 중에서도 중심을 이룬 것은 서산 휴정을 계승하는 서산 문도들이었으며, 이들은 의승군 활동을 통해 불교계를 주도하는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서산 문도 내부에는 다시 여러 문파가 있었는데 그 중 사명 유정을 계승하는 사명파와 편양 언기를 계승하는 편양파가 대표적이었다. 사명파는 17세기 전반 서산 문도를 대표하였는데 사회적 활동에 주력한 결과인지 문도 양성에 실패하여 18세기에는 약화되었다. 편양 언기(鞭羊彦機, 1581~1644년)는 휴정의 말년 제자로, 그를 계승한 편양파는 묘향산을 중심으로 한 휴정의 지역 기반 및 선풍을 계승하여 점차 서산 문도의 주류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들은 법통설을 제기하여 불교계에서 서산의 입지를 확고히 함으로써 이후 서산 문도가 전국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들었다. 서산 문도와 함께 이 시기의 주요한 문파는 휴정과 동문인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년)의 제자들로 구성된 부휴 문도였다. 부휴 문도는 선풍이나 활동 내용에서는 서산 문도와 커다란 차별성을 띠지는 않았고, 다만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년) - 취미 수초(翠微守初, 1590~1668년) - 백암 성총(栢庵性聰, 1631~1700년)으로 이어지며 호남과 호서에서 주로 활동하면서 독자적인 문파를 형성하였다. 문파가 형성되고 서산 문도가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면서 법통설이 제기되었다. 휴정은 본래 자신이 지엄(智嚴)에서 영관(靈觀)으로 이어지는 법계를 이었으며, 지엄은 육조 혜능의 적손 대혜 종고와 임제의 적손인 고봉 원묘의 선풍을 계승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휴정 입적 후 문도들이 의뢰하여 허균이 지은 휴정의 행장에는 선종의 흐름으로 고려의 법안종이나 지눌을 강조하고 고려 말 나옹 혜근의 법을 휴정이 잇고 있다고 하였다. 하지만 인조대(1623~1649년) 초부터 서산 문도들의 협의에 의해 태고 보우를 내세우는 새로운 법통설이 새로 제기되었다. 태고 법통설은 고려 말의 태고 보우를 내세워 중국 임제종의 법맥이 보우를 통해 휴정에게 연결되었다는 내용으로 인조 8년(1630)에 이식이 찬술한 『휴정문집』의 서문을 시작으로 장유, 이정구 등 당대의 문사들이 지은 서산의 비문에 기록되면서 그 권위가 확립되었다. 부휴 문도에서도 서산 문도와 함께 보우의 위상을 인정하여 보우 법통설은 불교계의 정통설로서 확립되었다. 문파가 형성되고 법계가 중시된 것과 함께 불교의례서도 편찬되었다. 17세기 중반 부휴문도의 각성과 사명파의 명조는 각기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와 『승가예의문(僧伽禮儀文)』 등을 편찬하였다. 이 문헌들은 승려의 상례와 제례에 관한 의례문으로서 불교의 기존 청규(淸規)들을 토대로 하여 당시 일반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던 성리학의 『주자가례(朱子家禮)』의 내용을 참작하였다. 이러한 책들은 당시 사회의 실정에 맞는 승가의 상례를 정리한다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사찰의 중수와 경제 기반 양란 이후 의승군 활동을 통해 불교계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사찰의 중창불사도 활발히 이루어졌다. 17세기 중반 이래 18세기까지 사찰의 중창이 활발히 이루어졌고 현존하는 대부분의 큰 사찰들은 이 때 그 원형이 만들어진 것이다. 처음에는 중심 전각의 복원이 이루어졌고, 숙종대와 영ㆍ정조대를 거치면서 2차 중창 사업이 벌어졌다. 법당의 재건과 함께 불상 및 불화조성도 크게 증가하였고 야외 법회에 사용되는 대규모 괘불도 많이 만들어졌다. 이러한 불사에는 왕실 등 유력자의 후원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에도 왕실은 불교를 보호하는 가장 유력한 세력이었다. 왕실의 위패를 모시는 사찰에는 특별한 우대 조치가 취해졌고 독실한 신앙심을 가진 왕실 여성들의 시주도 적극적이었다. 특히 정조는 부친인 사도세자를 위해 용주사를 창건하고 세자의 탄생에 대한 감사로 석왕사에 비문을 내리고 토지를 기부하는 등 불교에 개인적 관심을 가졌다.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확보하고 지방 관료이나 양반들의 침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 사찰들은 왕실과 유력 가문들의 위패를 봉안하는 원찰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하지만 정부에서는 이러한 연결을 금지시키기 위하여 사찰에 위패를 봉안하지 못하게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왕실이나 유력 가문의 후원을 얻지 못한 일반 사찰들은 안정된 경제적 기반을 갖지 못했다. 이들은 부과된 공납을 마련하고 경제적 생존을 위해서 종이나 미투리를 만들고 농업에도 종사했다. 특히 16세기 말부터 시작된 승려들의 계(契) 조직은 사찰을 유지하는 중요한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17세기 이후에 승려들은 개인 전답 등 사유 재산을 소유하였고, 보사청(補寺廳)을 설치하여 사찰의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려고 노력하였다. 승려들은 공물생산과 채광, 각종 공예생산에 품팔이를 하기도 하였다. 19세기에는 수취체제가 문란해지면서 사찰에 대한 공납과 과세도 과도하게 요구되어 심각한 상황이었다. 더구나 승려들은 군역과 산성 축조뿐 아니라 산릉이나 제언 축조에도 부역군으로 동원되었다. 이처럼 과도한 승역(僧役)은 사찰 몰락의 주요한 원인으로 대두되었고, 나라에서도 부역을 경감시켜 주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