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5. 근대 이후의 불교
1) 개화기의 불교
개항 이후 불교계의 변화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을 계기로 조선은 새로운 세계질서에 편입하게 되었다.
이후 사회 전반에 불어 닥친 변화의 물결에서 불교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산중에 머물러 있던 불교는 이제 급변하는 사회에 걸 맞는 새로운 위상을 세워야만 했다.
개항과 함께 나타난 종교상의 새로운 변화는 서구 종교가 포교의 자유를 획득하여
본격적인 활동을 펴면서 종교경쟁의 시대에 돌입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일본의 신도(神道)와 불교가 국내 포교를 시작했다는 것도 큰 변화였다.
일본불교의 활동은 이 시기 조선의 불교계에 위협적인 것임에 분명했지만
한편으로는 큰 자극과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근대화된 일본불교의 포교와 교육활동은 이후 조선불교의 개혁을 위한 전범이 되었다.
또한 이 시기에 이동인(李東仁)과 탁몽성(卓夢聖) 같은
개화 승려들이 출현했다는 것도 지나칠 수 없다.
이들은 유대치, 오경석, 김옥균, 박영효 등과 함께 조선의 개화운동을 이끌었는데
이들은 신촌 봉원사를 근거로 자주 모여 불교공부도 하고 개화 서적을 돌려 보며
조선의 개혁을 도모하였다.
이를 세간에서는 개화당이라 하였는데
이 개화당에 참여한 청년 선비들은 대체로 젊은 관료들로
중인 신분의 유대치, 오경석 거사의 지도를 받아 유교가 조선의 쇠망 원인 중 하나라 보고
불교의 참선에 심취하여 수행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청년 거사들의 결사조직인 개화당은
갑신년에 우정총국 준공 기념일을 기해 정변을 일으켜 ‘삼일천하’를 이루나
청군의 개입으로 실패하고 일본으로 망명하여 결국 결사는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이 무렵 조선불교계의 상황을 바꿀 수 있는 가장 큰 변화라고 할 만한 것은
1895년 3월 29일에 고종의 명으로 승려의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된 것이다.
물론 1895년 이후로도 승려의 도성출입은 금지와 허가가 반복되기는 하였지만
이 때의 도성출입금지 해제조치가 상징하는 바는 매우 컸다.
승려의 도성출입금지 해제는
조선시대 이래의 억불정책의 철폐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산중에 머물러 있던 불교가 그 활동 범위를 도성 내로 확대시킬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신행결사와 선의 중흥
19세기 후반 불교계는 근대를 향한 일대 변혁의 시기를 맞고 있었지만
그 내부에서는 불교의 존립과 전통적 신앙수행의 유지, 발전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한 흐름으로 주목할 수 있는 것이 사찰계(寺刹契)와 신행결사,
선(禪)의 중흥 노력 등이다.
사찰계와 신행결사는 조선 초기부터 있었지만 이 시기에 특히 성행하였다.
이는 개별 사찰과 불교신앙을 유지, 보존하기 위한 경제활동이 활발해졌으며,
당시 불교조직과 신앙이 대중적 형태로 파고들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러한 사찰계와 신행결사는 어려운 사찰의 재정을 지원하여 가람을 중수하고
사찰 전답을 늘리는 데 힘을 보탰으며
공동체적 신앙활동을 유지하는 데에도 큰 기여를 했다.
그 중에서도 염불계ㆍ미타계ㆍ관음계ㆍ지장계 등이 신앙활동과 결합하여
특히 대중의 호응을 얻었다.
결사활동으로서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만일염불회(萬日念佛會)이다.
만일염불회는 만일, 즉 28년 동안 염불ㆍ독송하는 대중적 결사이다.
1940년대까지 염불회의 명맥을 유지했던 건봉사는 물론
신계사, 유점사, 화계사, 흥국사 등에서 만일염불회가 열렸다.
이러한 염불결사는 염불을 통해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수행으로서
신분을 뛰어넘어 누구나 자유롭게 신앙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경허(鏡虛)와 용성(龍城)과 같은 대선사가 등장하여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것도 이 시기였다.
경허는 1899년 해인사에서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시작한 이래
1903년까지 통도사, 범어사, 화엄사, 송광사 등의 선원을 복원하고 선 수행을 이끌었다.
그는 도성출입금지가 해제되어 많은 승려들이 서울 구경을 나설 때도
일평생 도성출입을 하지 않고 산중에서 선풍을 진작하겠다고 다짐하는 등
선사로서의 본분을 지키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경허는 해인사에서 수선결사를 맺어 당시 침체된 수행 종풍을 재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근대 한국 선풍의 중흥자라 평가하기도 한다.
용성 역시 1886년 이후 전국 오지에 선원을 창설하여 이끌었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역시 의정부 망월사 선원에서 결사를 하여 선풍을 일으키려 노력하였다.
용성은 특히 수행과 동시에 교화에 깊은 관심을 기울여
역경 불사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많은 경전을 한글로 번역하여 대중들에게 보급하였고,
찬불가도 지어 포교에 활용하였다.
아울러 만해와의 교분으로 3·1운동에도 33인의 한 사람으로 동참하였다.
경허와 용성, 그리고 그 제자들은 조선의 선을 중흥시키고
식민지시대에 들어서도 우리 불교의 정체성을 지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원흥사의 창건과 원종ㆍ임제종의 대립
대한제국의 성립 이후 정부는 새로운 불교정책을 시행했다.
즉 불교를 총괄하는 관리서와 승정제도를 마련했던 것이다.
1902년 1월 동대문 밖에 원흥사(元興寺)가 창건되고, 총섭(總攝)이 파견되었으며,
도섭리(都攝理), 내산섭리(內山攝理) 등의 승직이 설치되었다.
같은 해 4월 궁내부의 칙령에 의해 사찰의 관리를 담당하는
사사관리서(寺社管理署)가 설립되고,
이어 사사관리서의 시행 규칙인 ‘국내사찰시행규칙’이 제정되었다.
그에 따라 원흥사는 대법산(大法山)이 되었고,
전국의 주요 사찰은 중법산(中法山)으로 지정되었다.
이것은 불교정책의 일대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원흥사의 창건과 전국 주요 사찰의 중법산 지정, 승직제도의 부활 등은
정부가 불교를 새로운 틀로 재편하여 직접 관리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부의 관리체제는 일본의 간섭으로 인해
대한제국의 행정이 혼란에 빠지면서 오래가지 못하고
2년 만에 관리서가 폐지되었다.
일본불교의 활동에 자극받은 일부 승려들은
불교의 중흥을 위해서 1906년에 불교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원흥사에 본부를 두고 각 사찰에 지부를 설치한 불교연구회는
홍월초(洪月初), 이보담(李寶潭) 등이 중심이 되었지만,
그 활동은 일본불교 정토종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불교연구회의 활동 중 두드러진 것이 명진학교(明進學校)의 설립이다.
명진학교는 각 사찰에서 청년 승려를 모집하여 불교뿐만 아니라 신학문을 교육시켰다.
지금의 동국대학교의 전신이 바로 명진학교인데,
한국불교 최초의 근대적인 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명진학교가 중앙에 설치된 이후 전국 각 사찰에는 그 예비 학교인 보통학교가 설립되었다.
1908년에는 전국 사찰 대표자 60여 명이 원흥사에 모여 총회를 열어
원종(圓宗)을 창립하고 이회광을 종정에 추대하였다.
원종은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종단이 강제 폐지된 이래 처음으로 종단을 재건한 것이다.
원종은 조선불교계를 대표하는 기관으로 자임하고
도성 안에 사찰건립을 추진하여 1910년 종로 전동(지금의 수송동)에 각황사를 창건하였다.
이것은 조선조 사찰 억불정책 이후 4대문 안 첫 사찰 창건이었다.
각황사는 조선불교도의 염원을 모아 전국 불자들의 모금으로 창건되었다.
1910년 한일 합방이 이루어지자 이회광은 불교의 발전을 위해
일본불교 종파의 힘을 빌릴 의도로 일본에 건너가 조동종과 연합 맹약을 체결하였는데,
뜻있는 조선불교도들은 이를 매종(賣宗) 행위라 규탄하며 크게 반발하였다.
당시 이러한 원종-조동종 맹약을 비판하는 세력은 박한영, 진진응, 한용운 등으로
주로 영호남 선원과 강원을 기반으로 들불처럼 들고 일어나 규탄의 여론이 비등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조선불교의 법맥은 임제종으로 조동종과는 종지가 다르다고 비판하며
원종과 별도로 임제종을 창립하였다.
이 임제종에 동참한 사찰은 송광사, 선암사, 범어사 등 영호남의 주요 사찰들로,
경허가 유력하며 선풍을 불러일으킨 사찰이 그 기반이 되었다.
그리하여 원종과 임제종은 동시에 서로 경쟁하며 발전하였는데,
원종은 주로 한수 이북, 즉 금강산 일대 건봉사, 유점사 등을 기반으로 하였고
한수이남, 즉 범어사, 통도사, 송광사 등은 임제종을 표방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1912년에 원종과 임제종 대표를 불러
두 종단의 간판을 강압적으로 내리게 탄압하여
결국 원종과 임제종은 간판을 내려야 했다.
개화기에 도성출입금지 해제를 계기로 산중에서 도시로 다시 진출한 불교계는
근대에 다시 원종과 임제종이라는 종단을 자주적으로 재건하였으나
일제의 강압으로 다시 해체당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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