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 불교란 무엇인가 】불교의 역사 - 제3절 한국불교 - 3. 고려시대의 불교 - 5) 원나라 간섭기의 불교계 2

문성식 2016. 11. 27. 2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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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3. 고려시대의 불교
        5) 원나라 간섭기의 불교계 2 고려 말의 불교계 13세기 말에 몽산 덕이(蒙山德異, 1231~1308년)의 사상을 수용하면서 널리 확대된 간화선의 수행법은 14세기 중반에 접어들면서 고려불교계의 주류가 되었다. 원의 지배 아래서 중국의 전통적 종파들이 쇠퇴하는 가운데 선종만이 강남지방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하고 있었던 점도 고려에 간화선이 성행하는 배경이 되었다. 간화선풍이 불교계의 일반적 수행법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재가 신자들의 화두참구도 성행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힘입어 귀족 자제들이 선종으로 출가하는 예가 점차 많아졌다. 급기야 선종은 명실상부한 불교계의 중심이 되었고, 교학불교의 승려들도 참선을 주로 하게 되어, 결국 선종과 교종의 구분은 흐릿해지고 말았다. 본래 선문의 규범으로 정해진 『백장청규(百丈淸規)』가 원나라에서 수입되어 불교사원 전반의 규범으로 받아들여졌고, 종파를 넘나드는 승려들의 교류가 활발해졌다. 특히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년)는 오늘날 한국불교조계종의 법맥과 종풍을 정립한 중흥조로 일컬어지는 큰 기여를 하게 된다. 태고는 고려 충렬왕대에 관리의 아들로 태어나 13세에 양주 회암사로 출가하였다. 19세부터 화두를 참구하였으나 선교를 겸수하여 26세에는 화엄종 승과에 합격하였던 만큼 교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그 후 다시 선에 정진하여 37세에 오매일여(寤寐一如)의 경지에 들어 마치 세상을 크게 버리고 죽은 사람인 듯 보였는데 38세에 활연대오하고 오도송을 읊었다. 태고는 깨침 이후 46세 되는 1346년 원나라로 향해 당시 선의 중심이었던 중국에 가서 순례하던 중 “강호의 진정한 안목은 석옥에게 있다”는 말을 듣고 석옥 청공(石屋淸珙, 1257~1352년)을 친견하고 깨침을 인가 받았다. 석옥은 조계 혜능, 마조, 임제의 법을 이은 임제종 양기파의 선사로, 태고는 임제선법의 증표로 의발을 받아 돌아왔다. 태고는 56세 되는 고려 공민왕대에 왕사로 추대되어 처음에는 응하지 않았으나 거듭된 청으로 원융부(圓融府)를 설치하고 당시 각각의 문중으로 화합하지 못하던 구산선문의 통합을 추진하고 한양 천도를 주장하였다. 태고의 이러한 뜻은 선종은 본래 하나인데 구산으로 나누어져 화합하지 못하는 병폐를 치유하며 나아가 의천에 의해 약화된 선종을 중흥하여 『백장청규』의 정신을 되살리고 간화선풍을 드높이려는 시도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은 태고 보우를 중흥조로 모시고 있다. 나옹 혜근(懶翁惠勤, 1320~1376년) 역시 태고 보우와 동시대인으로 고려 말 선풍을 떨친 대선사였다. 흔히 한국불교계 삼화상(三和尙)하면 ‘지공ㆍ나옹ㆍ무학’을 꼽고 사찰의 삼성각에 진영을 모시어 둔 곳이 있을 정도로 이름난 고승들이다. 나옹은 20세에 문경 사불산 묘적암으로 출가하여 화두 참구를 하였으며 양주 회암사에서 깨치고 원나라 연경으로 가서 선지식을 친견하였는데, 평산 처림과 지공, 두 선사로부터 전법인가를 받아 각각 가사와 불자를 받고 돌아와 간화선풍을 떨쳤다. 공민왕은 나옹을 왕사로 추대하였고, 나옹의 제자로는 고려 말 이성계를 도와 조선을 개국하는 데 큰 역할을 한 무학 등 100여 명이 있다. 이와 같이 불교계가 간화선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가는 가운데 불교계 밖에서는 성리학이 신진사대부들에게 수용되어 새로운 사회의 지도이념으로 자리 잡아 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회개혁을 위한 정치이념으로 수용된 성리학의 세력이 확대되면서 불교를 배척하는 이론들도 제시되기 시작하였다. 사찰이 왕실 및 권문세가와 연결되어 막대한 토지와 노비를 점유하는 상황이 발생하고, 자질이 부족한 사람들이 승려가 되어 수행자의 모습을 유지하지 못하는 경우를 비판하는 목소리가 높아 갔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사찰재산의 축소와 승려자격의 강화가 제시되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개혁이 기득권 세력의 저항에 부딪쳐 실시되지 못하면서 점차 불교이론 자체에 대한 비판이 강화되었다. 특히 위화도 회군으로 사대부들이 권력을 장악한 이후에, 사회의 개혁 방향을 둘러싸고 보수파와 진보파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진보파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불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더욱 높였다. 이들은 모든 사찰을 철폐하여 관청과 학교로 사용하고 승려는 환속시켜 군역에 충당하자는 척불론을 주장하였다. 보수파와 진보파의 심각한 대립 끝에 진보파 사대부들이 승리하여 조선 왕조가 열리게 되었고, 척불론은 사대부들 사이의 명분으로 확립되었다. 비록 일부 국왕의 불교에 대한 호의와 전통적 신앙에 대한 민심의 고려로 척불론이 온전히 실시되지는 못하였지만, 임진왜란 이전까지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궁극적으로 척불의 완성을 지향하며 정책을 추진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