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역사】
제3절 한국불교
4. 조선시대의 불교
1) 조선 전기의 불교정책
종단의 통폐합과 승려 환속정책
조선 왕조는 개창 이래 불교에 대한 배척과 숭유를 명분으로 하였다.
조선 왕조의 개창을 주도하였던 정도전은 『불씨잡변(佛氏雜辨)』을 통해
불교의 윤리적 문제와 사회적 폐단을 지적하며 불교의 혁파를 강력히 요구하였다.
정도전의 불교 비판은 고려 말 이래의 배불론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으로,
불교교리에 대한 심도 있는 이해에 기반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러한 공격에 대하여 불교계는 적극적인 대응을 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또한 성리학에 입각하여 왕조를 개창한 상황에서
왕실도 불교를 적극적으로 옹호하지 못하였다.
불교에 대한 규제는 태조대부터 시작되었지만
태조는 스스로 불교를 숭배하였기 때문에 일부의 불교계의 폐단을 제거하고
승려들에 대한 지나친 특권을 제한하는 수준에 그쳤다.
하지만 성리학을 배워 과거에 합격하였던 태종이 즉위하면서부터
불교에 대한 억압정책은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태종 5년(1405)에 처음으로 국가에서 정한 사원에만 토지와 노비를 지급하고
나머지 사찰들을 혁파하는 조치를 시행하였다.
이 조치로 11개 종단, 242여 곳의 사찰만 남게 되었으며,
사찰당 20~200결(結:조세 징수를 위해서 논밭의 면적을 재던 단위)의 토지와
10~100여 명의 노비가 인정되었고,
그 이외에 불교계가 보유하고 있던 토지와 노비는 모두 몰수되고 말았다.
그 당시에 사원전(寺院田) 3~4만 결과 노비 8만 명 정도가 몰수되었다고 한다.
이에 앞서 폐사의 토지와 노비를 국가에 귀속하는 조치도 시행하였다.
불교계에 대한 정리는 이후 더욱 진행되어
태종 7년(1407)의 기록에는 11개 종단이 7개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남아 있던 종단은 조계종, 천태종, 화엄종, 자은종(慈恩宗), 중신종(中神宗),
총남종(總南宗), 시흥종(始興宗) 등이었다.
세종대 초기에는 억불책이 더욱 강화되었는데,
세종 6년(1424)에는 7개 종단을 다시 선·교의 양종(兩宗)으로 통합하였고
사찰의 수도 선·교 각각 18사찰씩 36곳만을 존속시켰다.
또한 기존에 국가에서 불교계를 관리하던 승록사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불교 자체의 기관으로서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都會所)를 설치하였다.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는 각기 흥천사와 흥덕사에 설치되어
각 종단의 업무를 따로 관장하였다.
그리고 내불당을 폐지하고 승려들의 도성출입을 제한하였다.
세조대에는 사원전을 확대하고 수조권을 보장하는 등
불교정책이 이전에 비해 완화되었으나
성종대에 들어 불교에 대한 억제정책이 다시 강화되었다.
이는 신진사림이 중앙정계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과 궤를 같이한다.
신진사림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자들은 당시 조선에 10,000여 곳의 사찰에서
100,000여 명의 승려들이 하는 일 없이 무위도식하여 나라의 병폐가 된다고 하면서
불교계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억압정책을 펼 것을 주장하였다.
이에 따라 성종 2년(1471)에 도성 안의 염불소를 없애고
세조가 불전의 간행을 위하여 설립한 간경도감을 폐지하였다.
또한 세조대에 편찬이 시작된 『경국대전』을 완성하면서
승려에 대하여 불리한 규정을 넣었는데,
이는 승려들의 신분과 역할을 법적으로 규정하여 불교를 공식화하고자 한
세조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것이었다.
성종 23년(1492)에는 도첩의 발급마저 중지시켜 승려가 되는 길을 막았고,
도첩이 없는 승려는 환속시켜서 군역에 충당하였다.
도첩(度牒)이란 승려가 되는 것을 국가에서 허가하고
승려로서의 신분을 인정하는 일종의 승려 증명서로 이미 고려시대에도 시행되었다.
그런데 조선에서는 승려의 수를 줄여 국가에서 필요한 생산력 및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의도로 도첩의 발급에 여러 가지 조건을 붙였다.
태조대에는 도첩을 발급하는 대가로 막대한 액수의 포목을 도첩전으로 받았다.
그 결과 현실적으로 승려가 되는 것이 어렵게 되자
도첩이 없는 비공식 승려들의 수가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태종이 도첩이 없는 승려들을 색출하여 처벌하자 승려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러나 세종대부터는 도첩규제가 완화되어 국가의 토목공사에 승려들이 참여하는 대가로
도첩을 발급하는 한편 도첩이 없는 승려들에 대한 구제책을 시행하였다.
세조대에는 도첩을 발급받는 비용을 크게 줄여 주었다.
이로써 성종 초까지는 많은 도첩이 발급되어 승려의 수가 다시 급속히 늘어났고,
이에 대한 반발로서 다시 도첩제를 철폐한 것이다.
도첩제가 더 이상 실시되지 않았다는 것은
승려가 될 수 있는 공식적인 통로가 막혔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림의 집권과 폐불정책의 단행
성종의 뒤를 이은 연산군은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고 승려들을 환속시켰으며
선종과 교종의 도회소를 폐지시켰다.
이에 선교 양종은 광주 청계사로 옮겼지만
승과도 실시할 수 없었고 실질적으로는 해체된 것과 같았다.
연산군대의 폐불은 일정한 원칙에 의거한 것이 아니라
편의에 의한 즉흥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그러나 중종반정으로 사림들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에는
성리학에 입각한 완전한 폐불정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연산군대의 승과 중지에 이어서 법에 규정되어 있는 승과를 시행하지 않아
승과가 유명무실하게 되었고,
중종 5년(1510)에는 다수의 사찰을 혁파하고 그 토지를 향교에 소속시켰다.
또한 중종 11년(1516)에는 『경국대전』에서 승려의 출가를 규정한
도승조(度僧條)를 삭제하였다.
이는 불교에 대한 공식적 폐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승려들은 더 이상 승려로서의 신분을 보장받을 수 없게 되었고,
사찰에 소속된 토지와 노비는 완전히 몰수당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 불교는 더 이상의 법적인 존재 근거를 잃고,
없어져야 할 대상이 되고 말았다.
남아 있는 승려들에게는 도첩 대신 호패가 지급되었고 환속이 요구되었다.
결국에는 깊은 산중에 있는 작은 사찰들을 중심으로 소수의 승려들이 근근히 수행하면서
생존의 길을 모색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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