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산방한담(山房閑談) / 옥남이에게

문성식 2016. 9. 26. 11:11

 
      옥남이에게 일전에 보낸 그 답신(答信)을 받기도 전에 이 글을 쓰고 있네. 나는 어제 오래 살아오던 해인사를 떠나오고 말았네. 일찍부터 뜻을 두고 오던 일이였는데 이제 그 실현 단계가 오게 된 것이네. 출가수도(出家修道)한 사람이 어찌 편히 지내고 있기만 바라겠는가? 해서 앞으로는 고행(苦行)을 하면서 수도하기로 작정했네. 그리고 그곳은 너무 오래 살아왔기 때문에 세상과 반연이 얽혀 수도하기에는 적당할 수가 없는 곳이네. 그런데 며칠 전까지도 큰소리쳐오던 산승(山僧)의 말이 커다란 실언(失言)으로 돌아가고 말았네. 다름 아니라, 순효의 진학에 대한 문제—. 내가 그 아이의 진학에 관심하게 된 동기는 지난가을 그 아이의 환경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였다 는 것은 옥남이도 잘 아는 바가 아닌가? 솔직히 말한다면 전에 내가 세상에 있으면서 진 빚[부채의식(負債意識), 평소에 스님은 작은아버지께서 자신을 교육시켜 주신 것을 가장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은혜를 갚는다는 의미에서 사촌 동생의 진학을 도와주려 하셨다.]을 어떻게 좀 덜어버리고 싶은 생각이었네. 그런데 이제 와서 생각하는 것은 우선 당장의 일이 아니라 앞으로 순효가 진학하게 될 경우, 3년이라는 그동안의 문제이네. 뻔히 알다시피 우리 중들에게 경제적인 여유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이라네. 그렇지만 무리를 해서라도 입학금(入學金)만은 어떻게 마련해 주고 싶었네. 그런데 문제는 우선 당장의 것이 아니라 앞으로 3년을 두고 집에서 중단하는 일이 없이 학비(學費)를 댈 수 있을까 하는 일이네. 만약 그럴 형편이 못 된다면, 내 한때의 생각이 결과적으로 순효한테 큰 타격을 주게 될 것이니 말이네. 그것은 우리들 자신이 누구보다도 몸소 뼈저린 체험을 겪은 과거가 아닌가—. 출판계의 전에 없는 불황(不況)으로 지난가을에 착수했던 원고도 기약 없이 연기되고 말았네. 전에 준비 되었던 6,500원을 어제 대구에서 맹장염으로 입원(入院)한 아이의(해인사에서 있는) 입원비에 보태주고 말았네. 순효의 얼굴이 떠오르기도 했지만, 우선 당장 주위에서 급하게 필요한 돈이라서 -. 옥남이. 이 편지 닿는 대로 작은어머니와 순효를 한자리에 두고 이런 산의 사정의 이야기해 주게. 그래서 충분히 인간적(人間的)인 이해가 있도록. 그리고 기왕 생각 냈던 바니까 집에서 어떻게든지 순효만이라도 진학시키도록 해달라고. 이 편지 받고 실망할 자네나 순효에게 나는 큰 죄라도 진것 만 같네. 오늘 밤차로 떠나 내가 찾아갈 곳은 아주 아주 깊숙한 산골이라네. 따라서 세상과는 교통이나 통신이 완전히 두절되리라 여겨지네. 다시 인연이 있으면 언젠가 또 이 세상에서 만날 것이네. 어제 해인사를 나오면서도 나는 꼬마들에게까지 내가 갈 곳을 알리지 않았네. 정말 이제부터 산승(山僧)은 구도자(求道者)로서 피나는 수행을 해야겠네. 이제까지는 너무 소극적이고 안이하게 지내왔네. 내 주변에 사람들은 내가 벌써 죽어버리고 이 세상에는 없는 것처럼 여겨주었으면 하네. 잔인한 말이지만—. 순효에게 따로 편지 내지 않겠네. 부디 그 애가 실망하지 않도록 남(楠)이가 잘 이해시켜 주기 바라네. 남(楠)이, 그럼 늘 건강하게. 그리고 가네! 형(兄)[옥남이 부인]이랑 우리 꼬마들도—. 사노라면 또 만날 수도 있을 것이네. 나무 관세음보살 1964. 1. 10 대구 역전(驛前)에서 법정 합장 1963년 9월 29일 당시 스님은 고향을 방문하면서 ‘순효’의 진학문제를 옥남이 형과 상의하였습니다. 스님이 가족을 생각하는 애틋한 마음이 지금도 그대로 느껴지고 있습니다. 1964년 스님은 남은 세상의 인연을 뒤로하고 다시 수행에 들어가십니다. 그날 이후 6년 동안 저는 스님의 편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설산에서 고행수도를 하신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당신도 그 길을 따르셨겠지요. 지금도 그렇습니다. 스님은 이 사바세계를 영영 떠나신 것이 아니라 다시 어디론가 고행수도에 들어가신 듯합니다. 지극히 맑고 향기로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더 가까이 오시기 위해……. -박성직- * 법정 스님 편지 ‘마음 하는 아우야!’ 에서 엮은이 박성직님과 녹야원출판사의 허락을 얻어 모셨습니다.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11년 12월- ㅡ 법정 스님 <산방한담(山房閑談)> 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