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산방한담(山房閑談) / 구산 사형(九山 師兄)님께

문성식 2016. 9. 26. 11:07

 
      구산 사형(九山 師兄)님께 구산 사형(九山 師兄)님께 법체(法体) 청안(靑安)하시옵니까. 사중(寺中) 도난 사건으로 얼마나 염려가 많으신지요. 진즉 찾아가 뵈옵고 위로의 말씀드리려 했는데 이곳 사중(寺中)의 종불사와 제 개인 일로 결례(缺禮)하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보조(普照)스님 원불을 찾게 되어 마음 놓입니다. 형상(形象)으로 된 물건을 보물이라 해서 세상에서는 야단이지만 본분(本分) 상(上)으로 볼 때 뭐 그리 대단한 것이 되겠습니까. 불사에 쓰이던 일상용품(日常用品)을 해묵은 것이라 해서 보물로 다루고 있는 세상사가 가소롭기까지 합니다.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도리를 세속의 관리들도 인식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번 일로 해서 대중(大衆)이 많이 흩어졌다니 유감스런 일입니다. 도량(道場)을 이룰 큰일을 두고 볼 때 이번 일은 조그만 시련(試鍊)에 지나지 않습니다. 달리 생각 마시고 선대(先代)로부터 이어 받은 도량을 수호해 주시기 바랍니다. 스님 문집(文集) 원고는 손질을 끝냈습니다. 겨를이 나시면 상단 법문을 사형(師兄)님께서 교열해 주십시오. 이만 줄입니다. 十一월 九일 法 頂 올림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기 과일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하나의 씨앗을 지니고 세상에 나옵니다. 그것을 불성(佛性) 혹은 영성(靈性)이라고 이름합니다. 그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 피우는 일이 삶의 의미이고 보람입니다. 영성과 불성의 씨앗을 움트게 하고, 꽃을 피우려면 우리들 마음을 맑히는 일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흔히 마음을 맑혀라, 마음을 비워라 얘기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마음을 맑히고 비울 것인가. 절에 열심히 나가는 사람 중에도 절에 안 나가는 사람보다 옹졸하고, 꽉 막혀서 뭐 하나 배울 것이 없는 이들도 많이 있어요. 관념적으로만 알기 때문입니다. 관념적인 것으로는 마음이 맑혀지지 않습니다. 물론 참선이나 염불, 기도를 지극히 해서 마음을 맑힐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이예요. 자칫 잘못하면 관념으로 빠지기가 쉬워요. 현실적으로 선행을 해야 합니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두루 착한 일을 행할 때 저절로 우리들 마음이 열리고 맑아집니다. 시절 인연이 오면 스스로 연꽃이 피어납니다. 마찬가지로 두루 착한 일을 하면 우리의 마음은 저절로 맑아지게 되어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면 그의 둘레도 점점 맑은 기운이 번져 갑니다. 마침내는 온 세상이 다 맑아질 수 있습니다. 가령 부처님과 예수님, 공자님 같은 성인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분들의 맑은 마음은 메아리가 되고, 두루 비추는 빛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만일 그분들이 인류 역사상 안 계셨다면 현재의 우리는 전혀 다른 삶의 모습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럼 선행이란 무엇일까요? 선행, 착한 일. 그것은 나누는 일입니다. 나눈다는 건 많이 가진 것을 그저 퍼 주는 게 아니에요. 나눔이란 가진 사람이 이미 받은 것에 대해 마땅히 지불해야 할 보상의 행위이고, 감사의 표현입니다. 본래 내 것이란 없습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은 이 우주의, 법계의 선물을 잠시 맡아 가지고 있는 것뿐입니다. 육바라밀 가운데 첫째가는 것이 보시바라밀입니다. 보시란 나누는 겁니다. 또 바라밀이란 이쪽에서 저쪽으로 건너는 일, 세상을 사는 일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보시바라밀이란 세상을 사는데 제일 가는 덕이 보시, 곧 나누는 일이란 뜻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존재 전체를 기울여서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이다음 순간 더 많은 이웃들을 사랑할 수 있어요. 다음 순간은 지금 이 순간에서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따뜻한 마음을 나누면 서로의 마음이 맑아져 맑고 향기로운 꽃을 피우게 됩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려면 될 수 있는 한 작은 것, 적은 것으로써 만족할 줄 알아야 합니다. 큰 것과 많은 것에는 살뜰한 정이 가질 않아요. 늘 겪는 일이죠. 선물의 경우 너무 크고, 많으면 받는 사람은 부담스럽습니다. 작은 것, 적은 것이 귀하고, 소중하고, 아름답고, 고마운 것을 알게 되면 맑은 기쁨이 샘솟습니다. 그것이 바로 행복입니다. 행복은, 맑은 기쁨은 외부에서 오는 게 아닙니다. 저절로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것입니다. 자랑할 것은 못되지만 제가 있는 곳은 궁핍하고, 거의 모든 것이 원시 상태예요. 하지만 그게 편해서, 그곳에서는 순수한 내가 존재할 수 있어서 지금 나그네처럼 머물고 있는 겁니다. 지난겨울에 밖에는 눈이 내리고, 뒷골에서는 노루 우는 소리가 들리고 하니까 내 마음도 소년처럼 좀 부풀어 오르려고 해요. 그래서 묵은 편지들을 뒤적이다가 몇 군데 답장을 보내기로 했습니다. 한참 먹을 갈다가 편지 쓸 종이를 찾으니까 도배하고 남은 종이 사이에서 쪼가리 화선지가 두어 장 나와요. 다행이다 싶어 그걸 잘 다듬어서 편지지를 만들었죠. 그런데 종이가 한정되어 있다 싶으니까 아주 조심해서, 잔글씨로 편지를 쓰면서 아주 고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며칠 후에는 서울에 나왔다가 지업사에서 한 20장의 화선지를 사갖고 갔습니다. 그랬더니 쪼가리 종이에 편지를 쓸 때의 그 오붓함, 살뜰함이 어디로 가고 없어요. 많다는 건 그런 겁니다. 하나가 필요할 때 둘을 가지려고 하지 마세요. 둘을 갖게 되면 그 하나마저 잃어버립니다. 무소유란 아무것도 갖지 않는 게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을 갖지 않는 것입니다. 만족할 줄 알면 비록 가진 것은 없더라도 부자나 다름없습니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가지고 있느냐가 아닙니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워져 있느냐에 달렸습니다. 제 자신이 몹시 부끄럽고 가난하게 느끼는 건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 앞에 섰을 때가 아닙니다. 나보다 훨씬 적게 가졌지만 그 단순함과 간소함 속에서 삶의 기쁨과 순수성을 잃지 않는 사람 앞에 섰을 때입니다. 맑고 향기롭게 살아가려면 자연의 질서를 삶의 원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입니다. 자연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아낌없이 무상으로 베풀어 왔습니다. 맑은 공기, 시원한 바람, 논밭의 기름진 흙, 천연의 생수와 강물. 오늘 종일 말해도 다 못할 정도로 많은 것을 자연은 우리에게 주고 있어요. 그런데 사람들은 전혀 고마운 줄을 몰라요. 감사는 고사하고 함부로 더럽히고, 허물고, 끝없이 학대하고 있습니다. 들짐승조차도 자기 둥지는 더럽히지 않는데 인간이, 소위 문명했다는 인간만이 자기의 생활환경인 자연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병이 든 자연, 허물어져 버린 자연에는 우리 인간들이 의지할 수 없습니다. 자연이 죽어가듯 인간의 생명도 위협받기 때문이에요. 과잉 소비로 자연환경의 파괴를 부추길게 아니라 이제는 적은 것, 작은 것의 귀함, 소중함을 알아서 더 이상 자연이 병들지 않게 해야 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질서가 필요합니다. 나눔으로써 맑은 기쁨을 얻으려 하고, 만족할 줄 알며, 소유는 꼭 필요한 것으로 스스로 제한하려는 그 마음들이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지름길입니다. 이런 태도는 결코 소극적인 것이 아닙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지혜의 선택입니다. 깨달음에 이르는 길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속속들이 지켜보면서 삶을 거듭거듭 개선하고 심화시켜 가는 명상이고, 또 하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의 실천입니다. 전자는 지혜의 길이요, 후자는 자비의 길입니다. 이 두 길을 통해 우리는 본래부터 지녔던 불성과 영성의 씨앗을 틔워낼 수 있습니다. 본래 청정한 우리 마음을 선행과 나눔으로 맑혀서 우리가 몸담아 사는 이 세상을 그리고 맑은 은혜 속에서 의지해 살다가 언젠가는 그 품으로 돌아가 영원히 안길 자연을 맑고 향기롭게 가꿉시다. -‘맑고 향기롭게’ 발족 강연회 / 1994년 3월 26일 구룡사에서- 소식지 200호를 맞아 맑고 향기롭게 모임 발족 강연 말씀을 통해 시작할 때 그 마음을 다시 되새겨 보았으면 합니다. 원문은 ‘법정 넷’ 가르침 게시판에 게재되어 있습니다. 1993년 8월 강원도 산골에서 정진하시던 법정 스님은 답답하고 삭막한 현실을 정화할 수 있는 범국민적 운동을 떠올렸고, 우리 사회에 맑고 향기로운 ‘마음의 연꽃’을 피워보자는 뜻에서 맑고 향기롭게 살기운동본부를 1994년 1월 14일 발의하셨습니다. 연꽃스티커는 진흙 속에서도 한 점 티 없이 맑고 향기로운 연꽃 모습을 디자인한 것이며, 초기에는 연꽃스티커를 중점적으로 배포하였고, 그해 3월부터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등의 도시를 시작하여 법정 스님과 함께하는 캠페인 및 강연회를 개최하여 종교와 종파를 떠나 많은 단체와 일반인들의 동참이 있었습니다.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11년 10월- ㅡ 법정 스님 <산방한담(山房閑談)> 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