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산방한담(山房閑談) / 명진 거사님께

문성식 2016. 9. 26. 11:05

 
      명진 거사님께 가을바람 불어오니 처마 끝에 풍경소리 자주 들리고 밤으로도 별들이 푸르게 빛을 발합니다. 거사님께서 늘 염려해주신 덕으로 별 탈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지난 초하룻날 길상사에 가서 처음으로 법회를 했습니다. 제대로 도량 기능을 하게 되면 도시 포교로 한몫을 하게 되리라 믿습니다. 보살님과 아이들 집안이 두루 평안하시지요. 그리고 공장일은 차질 없이 잘 나아가는지도 궁금합니다. 많은 사람 거느리고 일하다 보면 여러 가지로 애로사항이 많을 것입니다. 그때마다 기도하는 마음으로 이웃들을 부처님과 보살로 여긴다면 어려운 고비도 무난히 넘기게 될 것입니다. 세상이 온통 불경기 타령인 이런 때 어떻게 하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 지 화두 삼아 항상 마음속으로 헤아린다면 밝은 길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아무쪼록 인욕 정진으로써 큰 뜻 이루시기 바라고 빕니다. 가을바람 아침저녁으로 산들거리고 맑은 햇살 눈 부신 들녘에 오곡이 익어가는 이 좋은 때 집안과 일터가 두루 평안하고 활기 넘치기를 멀리서 두 손 모읍니다. 좋은 가을 맞으십시오. 九七년 백로절 法頂 합장 明眞 居士님께 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 작은 친절과 따뜻한 몇 마디 말이, 우리가 의지해 살아가는 이 지구를 행복하게 합니다. 지구가 행복해야 그 안에 살고 있는 우리들도 행복해집니다. 개인은 전체의 한 부분입니다. 개개인이 모여 전체를 이룹니다. 오늘은 행복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엊그제 행복에 대한 책 (프랑수아 를로르 <꾸뻬 씨의 행복 여행>)을 한 권 읽었습니다. 지난여름 읽은 여러 책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었기에, 이 자리에서 같이 음미하려고 합니다. 실제로는 불행하지 않은데도 불행하다 여기는 환자들을 날마다 대해야 하는 한 프랑스 정신과 의사가 쓴 책입니다. 많은 것을 갖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불행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며 그도 자신의 일에 만족을 느끼지 못합니다. 정신과 의사들은 매일매일 정신 상태가 부실한 사람들을 대하기 때문에 때로는 의사 자신도 헛소리가 나온다고 합니다. 그래서 가끔씩 동료들끼리 검사를 해준다고 들었습니다. 그것도 업입니다. 늘 그런 사람들을 대하다 보면 그 기운이 전이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세상 어느 곳보다 풍요로우면서도 정신과 의사가 가장 많이 사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도 저자의 분신인 정신과 의사입니다. 그는 이름난 의사였습니다.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그의 진료실로 찾아왔습니다. 상담으로 넘치는 하루하루를 보내며 그는 자신 역시 행복하지 않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많은 돈을 벌었지만 행복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병을 안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어떤 치료로도 진정한 행복에 이르게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진료실 간판을 내리고 세계 여행을 떠납니다. 무엇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고 불행하게 만드는가를 알기 위해 떠난 것입니다. 마치 <화엄경>의 선재 동자가 선지식을 찾아 구도의 길에 나섰던 것과 같습니다. 그는 중국, 아프리카, 미국 등지를 다니며 유명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 행복의 비결을 찾습니다. 한번은 중국에서 이름난 노스님을 만나기 위해 산길을 걷게 됩니다. 복잡한 도시에 살며 환자들만 만나다가, 모처럼 거기에서 벗어나 산길을 걷고 있으니 문득 ‘아, 행복은 산길을 걷는 것이구나.’라는 생각을 떠오릅니다. 행복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들도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어쩌다가 절에 가거나 등산을 하게 되어 호젓한 산길을 걸으면 마음이 참으로 평화롭지 않습니까? 의사는 새로운 교훈을 얻을 때마다 잊어버리지 않도록 수첩에 메모를 합니다. 이렇게 다니며 많은 사람을 만난 덕에 그의 수첩에는 행복의 비결이 하나씩 기록되어 갑니다. 그 가운데 몇 가지 행복의 비결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행복의 첫째 비결은 다른 사람과 자신을 비교하지 않는 것입니다. 행복을 거창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각자 자기 몫의 삶이 있는데 남과 비교하니까 기가 죽고, 불행해지고, 시기심과 질투심이 생깁니다. 어떤 개인이라도 그는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독립된 존재입니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둘째, 행복은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할 때 사람은 행복해집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한 자신이 좋아서 하는 일은 좋은 일입니다. 개체를 뛰어넘어 전체와 연결될 수 있으면 좋은 일입니다. 셋째, 행복은 집과 채소밭을 갖는 것입니다. 채소밭을 갖고 흙을 가까이하며 살아 있는 생명을 가꾼다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자신의 땅은 아니지만, 공터에 채소를 가꾸는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무척 좋은 일입니다. 경험한 사람들은 알 것입니다. 자기가 뿌린 씨앗에서 싹이 트고, 떡잎이 나와 펼쳐지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뿌듯해집니다. 주부들도 아파트 베란다에 상추나 쑥갓 등의 채소를 얼마든지 길러 먹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늘 보살펴야 하니까 부지런해지고, 자연에 대한 고마움과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한 신비를 느낄 수 있습니다. 이는 닳아져 가는 우리 마음을 소생시키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넷째, 행복은 내가 다른 사람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한 개인의 삶은 다른 사람에게 유용해야 하며, 서로가 서로에게 의미 있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에 갇힌 짐승처럼 사는 그런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기 때문에 관계 속에서 한몫을 하는 것입니다. 다섯째, 행복은 사물을 바라보는 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같은 장미꽃을 바라볼 때 어떤 이는 '왜 이렇게 아름다운 장미에 가시가 돋아 있나?', 하고 불만스럽게 생각할 수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가시에 이렇게 아름다운 꽃이 달려 있네.' 하며 고맙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여섯째, 행복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나 자신만의 행복은 근원적으로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관계 속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나눌 때 행복은 몇 배로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그가 수첩에 적어 놓은 행복의 비결은 이 밖에도 더 있지만, 장황한 것 같아서 하나만 더 소개하겠습니다. 이 사람이 한번은 아프리카에서 친구의 초대를 받았다가 노상에서 강도를 만나 차를 빼앗깁니다. 강도들은 의사 일행을 지하실에 가두고 어떻게 처리할까 옥신각신합니다. 그런데 강도의 우두머리가 의사의 몸을 수색하다가 주머니에서 의사가 적은 쪽지를 보고 의사 일행을 풀어 줍니다. 거기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행복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기적입니다. 우리는 늘 많은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그 사실을 느끼지 못합니다. 살아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놀라운 가능성입니다. 의사는 여행을 마무리하며 처음 만난 노스님을 다시 찾아갑니다. 노스님은 의사를 데리고 말없이 산길을 걷습니다. 의사는 자신이 지금까지 겪어 온 어떤 것보다 새로운 배움을 그곳에서 얻게 됩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주어진 자연의 고요를 통해 많은 깨달음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는 복잡한 분별에서 벗어나 세상의 아름다움을 아무 사심 없이 무심히 바라볼 시간을 갖는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행복임을 느낍니다. 노스님은 그와 작별하며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깁니다. “진정한 행복은 먼 훗날에 이룰 목표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행복은 은퇴하고 자식들 키워 다 결혼시킨 이후, 나이 들어 시골에 집이라도 한 채 마련한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닙니다. 내일 일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이는 우리 각자에게 다 해당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행복을 찾아 항상 지나온 과거나 미래 쪽으로 달려갑니다. ‘왕년에 이렇게 잘 살았는데…….’ 또는 ‘이다음에 어떻게 살 것인가?’ 등등 현재에서 벗어나 늘 지나가 버린 과거와 다가올 미래 쪽으로만 관심을 기울입니다. 과거를 묻지 마십시오. 이미 지나가 버린 세월이란 뜻입니다. 그것은 전생의 일입니다.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곳은 이 순간 이 자리입니다. 지금 이 순간의 현장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이 순간을 회피하면 자기 존재가 사라집니다. 늘 불확실한 미래 쪽으로 눈을 팔기 때문에, 현재의 자신을 불행하게 만듭니다.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입니다. 지금 이 순간 행복하기로 선택한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은 마음먹기에 달려 있습니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참으로 인간답게 산다면 지구의 종말도 늦출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온전하고 바르게 살지 못하니까 이런 불안한 시대를 겪는 것입니다. 한눈팔지 말고 똑바로 살아야 합니다. 두루 행복하십시오.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11년 09월- ㅡ 법정 스님 <산방한담(山房閑談)> 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