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정스님 어록

산방한담(山房閑談) / 홀로 있고 싶을 때 나는 훌쩍 나그네길에 나선다

문성식 2016. 9. 26. 11:14

 
      홀로 있고 싶을 때 나는 훌쩍 나그네길에 나선다 산중에서 단순하고 단조롭게 살고 있는 나는, 바로 오늘 아침 일어난 일이나 어제 겪은 체험으로부터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 간다. 내 삶 자체가 구체적인 사실이기 때문에 관념적이거나 추상적인 글은 써지지 않는다. 활자화된 글은 물론 불특정 다수의 독자들이 읽게 되지만, 나는 글을 읽을 대상을 거의 의식하지 않는다. 가까운 친지에게 편지를 쓰듯 솔직하고 담백하게 그리고 쉬운 단어를 골라가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p.10 그야말로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전기도 통신수단도 전혀 없는 태고적 그대로인 오두막에서 나는 꼬박 열하루를 지냈다. 내 팔자가 그러듯이 어디를 가나 손수 끓여 먹는 일이 나를 나답게 만들어주었다. 처음 2, 3일은 전기가 없어 어둠이 좀 답답하게 느껴졌지만 이내 아무 불편도 없었다. 촛불이 훨씬 그윽해서 마음을 아늑하게 다스려주었다. 문명의 연장에 길이 든 우리는 편리하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 많은 것을 빼앗기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문득 들었다. p.17 이 오두막에서는 시냇물 소리를 베고 잠들었다가 새벽 새소리에 잠에서 일어난다. 휘파람새와 머슴 새가 뒤꼍에 날아와 나를 깨운다. 어둠이 사라지고 창호에 밝음이 서서히 번져오는 여명의 시각, 내 의식은 하루 중에서도 가장 맑고 신선하다. 꽃망울로 묶여 있던 의식이 꽃처럼 활짝 피어나는 이런 순간 나는 삶의 고마운 속뜰을 거닌다. 지난해 늦가을 지중해 연안에서 감명 깊게 읽었던 장 그르니에의 <지중해의 영감>에 박혀 있던 귀한 메시지가 이 산골의 오두막에까지 울려오고 있다. ‘인간은 자신에게 알맞은 삶을 찾아야 한다. 그렇지만 그가 일단 그의 삶을 찾았을 때 그것은 거부해야 한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알맞은 삶이란 당초부터 없었으니까.’ 우리는 누구나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바란다. 그러나 그 안정과 편안함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타성의 늪이요 함정일 수 있다. p.32 지난밤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청정한 밤하늘에 황홀하게 돋아난 별들을 나는 고개가 아프도록 쳐다보았다. 장욱진 화백이나 백영수 화백의 그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머리가 삐딱하게 가로놓인 아이들은, 지상의 현실이 아니라 별이나 구름, 혹은 날아가는 새를 쳐다보느라고 그리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별을 제대로 바라보려면 누워서 보아야 편하고 아늑하다. 지난해 여름 담양에서 짠 대 평상을 나는 오로지 밤하늘에 별을 누워서 바라보기 위해 구해놓았었다. 혼자서 들 수 없는 무게라 뒤꼍에 세워둔 채 지난밤에는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잠자는 일보다는 한밤에 일어나 별을 바라보는 이런 일들이 내 삶에는 훨씬 보람 있는 일로 생각된다. p.48 서울에서 일을 보고 휴가철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해 새벽같이 떠나 네 시간 남짓 달린 끝에 오두막으로 가는 개울가에 이르니 징검다리가 불어난 개울물에 잠겨 건너갈 엄두를 낼 수 없었다. 아, 이때의 어처구니없는 허망함을 무엇에 견주리. 알아보니, 동해로 빠져나간 태풍의 영향으로 영동지방에는 나흘 동안 많은 비가 내렸다고 했다. 그 무렵 서울은 며칠 동안 매연 한 점 없는 맑게 개인 가을 하늘이었다. 할 수 없이 오던 길을 되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p.55 땅에 떨어지는 낙엽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냥 맞이한다. 그것들은 삶 속에 묻혀 지낼 뿐 죽음 같은 것에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것들은 그때 그곳에 모든 것을 맡기고 순간순간을 있는 그대로 산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인간들뿐인데, 그것은 우리가 진정으로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삶은 순간순간 새롭게 발견되어져야 할 훤출한 뜰이다. p.66 요즘 책상 위에 놓아두고 자주 들춰보는 크리슈나무르티의 <마지막 일기> (1983년 캘리포니아의 오하이 계곡에 있는 그의 집에서 녹음기에 구술해 기록한 것)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만약 우리가 자연, 살아 있는 나무들과 수벌과 꽃과 풀과 흘러가는 구름과 관계를 맺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어떤 이유로도 결코 다른 사람을 죽이지 않을 것이다.” p.88 며칠 전 이른 아침에 부엌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말벌이 날아와 내 이마를 쏘았다. 아픔도 아픔이지만 이내 퉁퉁 부어올라 볼썽이 사납게 되었다. 이때 나그네 한 사람이 곁에서 이런 나를 보고 입방정을 떨었다. 자신에게 쏘아붙인 과보라는 것이다. 그는 말을 참지 못하고 때와 장소도 가리지 않고 함부로 쏟아내는 버릇이 있어, 입은 재앙의 문이니 쓰잘데없는 소리 작작하라고 몇 번을 타일러주었었다. 이 타이름이 그에게는 쏘아붙이는 말로 고깝게 들렸던 모양이다. 내 성미가 퉁명스러움을 반성했다. 그리고 어느 땐가 무심히 뱉은 말이 누군가에게 마음에 상처를 입혔겠다는 생각이 떠올라, 말을 하기 전 먼저 생각을 거듭거듭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날의 교훈은 될 수 있는 한 남의 일에 참견도 관심도 가지려 하지 말 것, 타이르고 싶은 말도 반드시 그 인품을 가려서 할 것이라고 다짐했다. 벌에 쏘인 데에는 별 약이 없다. 암모니아수를 우선 바르고 나서 얼음찜질을 하는 것이 그중 나은 치료법임을 이번에 터득했다. 누군가는 녹차를 우려 그 물을 바르면 해독이 되고 부기도 가라앉는다고 했지만, 내가 직접 실험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 있게 권할 수가 없다. p.141 큰절에 내려가면 가끔 들르는 방이 있다. 내가 그 방에 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방이 좋아서다. 그 방에는 어디나 있음 직한 달력도 없고 휴지통도 없으며, 방 가운데 오직 방석 한 장만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다. 아무것도 없이 텅 비어 있기 때문에 오히려 넉넉하고 충만한 그 공간이 마음에 든다. 물론 한 스님이 거쳐 하는 방이다. 텅 빈 방에 들어가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우리는 그 텅 빈 공간 속에서 순수한 현재를 발견하게 된다. p.158 며칠 전 볼일로 광주에 나간 김에 무등산 증심사로 가는 길목에 자리 잡은 ‘한국제다’에 일부러 들러 차를 좀 구해왔다. 지난 5월 초순 한 친지의 집에서 내놓은 차를 마시다가 눈이 번쩍 띄었다. 어디서 구한 차냐고 했더니 ‘한국제다’에서 엊그제 만든 햇차 ‘감로(甘露)’라고 했다. 금년에 마신 햇차 중에서 내 구미에는 일품이었다. 그 감로, 단 이슬을 조금 전에 한 잔만 마셨다. 두 잔을 마시면 첫 잔의 그 황홀한 향취가 자칫 반감될 수도 있으니깐. 아름다움이나 향기로움에는 좀 덜 찬 아쉬움이 남아야 한다. 아름다움이나 향기의 포만은 추해지기 쉽다. 넘치는 것은 모자람만 못하는 법이다. p.236 뒷등성이로 올라 오리나무 숲을 찾아갔다. 오리나무 숲도 잎들을 어지간히 떨쳐버리고 옹기종기 모여 겨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훨훨 벗어버린 나목(裸木)의 숲 속을 거닐고 있으면, 이상하게도 아주 포근하고 따뜻하게 나무들의 체온이 다가선다. 잎을 무성하게 달고 있을 때는 그런 걸 느낄 수 없었는데 빈 가지로 서 있는 나무들에서 도리어 따뜻함을 감촉할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많이 차지하고 있는 사람한테는 느끼기 어려운 그 인간미를, 조촐하고 맑은 가난을 지니고 사는 사람한테서 훈훈하게 느낄 수 있다. 이런 경우의 가난은 주어진 빈궁(貧窮)이 아니라, 자신의 분수와 그릇에 맞도록 자기 몫의 삶을 이루려는 선택된 청빈(淸貧)일 것이다. 주어진 가난은 악덕이고 부끄러움일 수 있지만 선택된 그 청빈은 결코 악덕이 아니라 미덕이다. p.258 얼마 전에 영화 <빠삐용>을 다시 보았다. 16년 만에 다시 본 영화인데도 새로웠다. 그전에는 그런 대사가 있는 줄을 기억하지 못했는데 이번에 보고 새로운 감동을 받았다. 인생을 낭비한 죄! 무서운 말이다. 우리는 이 핑계 저 핑계로 인생을 얼마나 많이 낭비해왔는가. p.286 옛 집터에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터를 돋우어 지어야 한다는데, 산거(山居)를 마련할 무렵의 내게는 그런 예비지식이 없어 일꾼들이 하는 대로 맡겨두었더니, 폭우가 내리면 그때마다 아궁이에서 물이 났다. 높은 산중에는 폭우가 장시간 쏟아지면 여기저기서 생수가 터진다. 터를 돋우지 않고 깎아내면 그 생수의 물이 고이게 마련이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물이 괴는 족족 퍼냈더니 물은 샘물처럼 끊임없이 괴었다. 자다가도 걱정이 되어 몇 차례씩 깨어나 부엌에 들어가 물을 몇 동이씩 퍼내곤 했었다. 그대로 두면 아궁이 속 고래에까지 물이 넘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그건 부질없는 짓임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괴는 족족 물을 퍼내면 도리어 물길이 트여 끊임없이 물이 괸다. 그런데 물이 괴면 그 물량에 따라 압력, 즉 수압(水壓)이 생기기 때문에 일정량을 넘으면 그 이상 더 차오르지 않는다는 사실도 뒤늦게 터득했다. 물리 시간에 배워서 알 만한 일인데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실생활에서 몸소 부딪혀 비로소 산 지식이 된 것이다. p.326 덕숭산 수덕사의 선우도량에서 모임이 있어 가는 도중이었다. 언제부터 한번 찾아가고 싶었는데, 마침 가는 길목이라 추사(秋史) 김정희 선생의 옛집을 찾기로 했다. 높지 않은 산자락 양지바른 곳에 고택이 자리 잡고 있는데, 근래에 잘 보수되어 빈집으로 보존되고 있었다. 옛 어른들이 살다간 집에서는 뭐라 꼬집어 한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흙과 바람과 환경에서 고풍스런 친밀감을 느낄 수 있어 저절로 옷깃이 여며진다. 이 집안에서 일어났을 기구한 영욕의 삶을 우리는 낱낱이 헤아릴 수 없지만, 이 집의 문지방과 기둥과 연목과 대들보와 처마, 그리고 뜰 아래 서 있는 수목들은 죄다 알고 있을 것이다. 묵묵히 지키고 있는 그런 집과 둘레의 바람과 흙이 말할 수 없이 정답게 여겨졌다. p.339 -『버리고 떠나기』에서 스님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산방한담(山房閑談) 월간 맑고 향기롭게 2012년 02월- ㅡ 법정 스님 <산방한담(山房閑談)> 중에서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