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93.jpg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 태항아리. 높이 42.8㎝, 입지름 26.5㎝, 밑지름 27.6㎝.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

 

태호는 주로 왕실에서 태를 담기 위하여 사용되었던 것으로 내호(內壺)와 외호(外壺)로 되어 있다. 태지석(胎誌石)과 함께 나지막한 산봉우리에 안치되며 겉에 작은 태비(胎碑)가 세워진다.

이와 같이 태호는 지석과 태비를 동반하므로 도자사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 태호는 고려대학교 경내에서 발견되었는데, 발견 당시 내호는 짚망태기에 넣어져 외호에 담겨져 있었으며 고운 흙이 3분의 2쯤 차 있었다고 한다.

 

각각 뚜껑이 있는 내호(內壺)와 외호(外壺)로 되어 있으며, 외호 안에는 고운 흙이 3분의 2쯤 차 있고, 가운데에 내호가 고운 흙 속에 4분의 3쯤 묻혀 있었다.

또한 내호는 고운 새끼끈으로 망태기를 만들어 외호 안에 넣었던 것 같다. 외호 안에는 고운 흙과 내호를 넣었던 구멍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끈으로 만든 망태기가 그대로 박혀 있다. 내호 안에는 태(胎)와 태를 쌌던 것으로 짐작되는 것이 썩고 변질된 채로 남아 있으며, 엽전(葉錢) 2잎이 들어 있다. 또 내호의 주둥이로부터 어깨에 이르기까지 썩은 망태기가 그대로 걸쳐진 채 남아 있다.

8894.jpg 안팎 항아리를 갖추고 있는 이 항아리는, 외호는 풍만하고 내호는 홀쭉한데, 외호 뚜껑 꼭지에 구멍이 뚫려 있다.

외호의 문양(文樣)은 뚜껑의 낮은 꼭지를 중심으로 국화판문대(菊花瓣文帶)·연판문대(蓮瓣文帶)·만자문대(卍字文帶)가 차례로 주둥이까지 배치되어 있다. 몸통에는 어깨의 연판문(蓮瓣文)을 중심으로 아래위에 만(卍)자문과 국화문대를 두고 몸통에는 국화판을 전면(全面)에 인화(印花)해 놓았으며, 위에는 우점문(雨點文)을 지문(地文)으로 한 복사문이 있고, 바닥에는 연판문대가 있다.

내호는 뚜껑에 2줄의 귀갑문대(龜甲文帶)가 있고, 몸통에는 국화판문이 가득 차 있다. 유약(釉藥)은 담청(淡靑)을 머금은 회백(灰白)의 전형적인 분청유(粉靑釉)이며, 내호의 유약은 반투명으로 광택이 없으며, 뿌연 느낌이 있다.

1970년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구내에서 건축공사를 하던 중 발견되었으며, 이 항아리를 넣었던 석함(石函)도 남아 있다.

 

이 태호의 문양은 항아리 어깨에서부터 만자문대(卍字文帶)·중연판문양대(重蓮瓣文樣帶)를 상감으로 새겨넣고, 그 다음 인화기법(印花技法)으로 국화문양대(菊花文樣帶)를 두르고 있다. 몸체는 전면에 국화문을 가득 채우고, 위로는 흑백상감의 복사문(伏紗文) 안을 우점문(雨點文)으로 장식하였으며 밑에는 중연판문양대를 백상감하고 있다.

 

뚜껑의 문양은 꼭지를 중심으로 국화문양대·파도문양대·완자문양대가 차례로 구연부(口緣部)까지 배치되어 있다. 15세기 중엽 인화문분청사기의 가장 세련된 작품이다. 유약(釉藥)은 연한 청색을 띤 회백색의 분청유를 칠하였다. 1963년 광주광역시 동구 금곡동 묘지에서 이것과 비슷한 파편이 발굴, 조사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