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목 | 국보 제176호 |
---|---|
소재지 | 서울 중구 필동3가 26 동국대학교박물관 |
소재지 | 동국대학교박물관 |
지정일 | 1974.07.09 |
수량 | 1개 |
시대 | 조선시대 |
소유자 | 동국대학교 |
관리자 | 동국대학교 |
자료출처 및 참조 | 문화재청,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선 성종 20년(1489)에 만들어진 청화백자 항아리로 소나무와 대나무를 그렸다. 크기는 높이 48.7㎝, 입지름 13.1㎝, 밑지름 17.8㎝이다.
아가리가 작고 풍만한 어깨의 선은 고려시대 매병(梅甁)을 연상케 한다. 어깨로부터 점차 좁아져 잘록해진 허리는 굽부분에서 급히 벌어져 내려오는 형태로, 조선(朝鮮) 초기 항아리의 전형적인 보기이다.. 이와 같은 형태로는 청화백자송죽인물문호(보물 제644호)와 순백자 항아리를 비롯한 몇 예가 있다.
조선시대 궁중의 연례를 비롯한 여러 의식에서 꽃을 꽂아둔 항아리로 사용된 듯하다. 문양은 아가리 부분에 연꽃 덩굴무늬를 두르고 몸통 전체에 걸쳐 소나무와 대나무를 대담하게 구성하였다. 꼼꼼하고 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청색의 농담으로 회화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이 항아리는 오랫동안 원래 전남(全南) 구례군(求禮郡) 화엄사(華嚴寺)에 전해져 오던 명품인데, 2번이나 도난당했던 것을 찾아 동국대학교박물관(東國大學校博物館)에 옮겨 놓았다.
주둥이 가장자리의 안쪽 측면에 '홍치이년(弘治二年)'이라는 명문(銘文)이 있었는데, 도난 때 깨어져 '홍치(弘治)' 2자만 남았던 것을 수리 복원하면서 '이년(二年)'을 다시 첨가하였다. 주둥이 안쪽에 ‘홍치’라는 명문이 있어 만든 시기가 분명한 자료이다
귀족들을 위한 우아, 섬세한 청자나 서민의 정서를 담은 분청사기와 달리 백자는 단정한 양식, 풍만한 양감을 지닌 자기이다.
순백의 아름다움을 바탕으로 한 백자는 순백에 대한 조선인의 미감을 반영한 도자기였으며 조선 건국이래 세종연간까지만 왕실에서 적용하였을 뿐 그 이후 상하계층을 막론하고 백자를 사용하였다. 백자의 양식의장은 중국자기의 영향을 보이는 청화백자도 있고, 같은 시대에 유행하던 분청사기의 장식적 요소를 보이는 청화백자도 있다.
청화백자는:백토로 기형(器型)을 만들고 그 위에 회청(回靑) 또는 토청(土靑)이라 불리는 코발트 안료로 무늬를 그린 다음 그 위에 순백의 유약을 씌워서 맑고 고운 푸른색의 무늬가 생기게 만든 자기이다. 코발트는 당시 한국에서는 채취하지 못하였으므로 아라비아 상인들을 통하여 중국에서 수입하였다. 코발트 안료는 회청 또는 회회청(回回靑)이라 불렀으며, 이것으로 만든 자기를 중국에서는 유리청(釉裏靑) 또는 청화백자(靑華白瓷)라고 하고 한국에서는 화사기(畵沙器) 또는 청화사기(靑畵沙器)라고도 불렀다. 중국의 청화백자가 한국에 처음 들어온 것은 1428년(세종 10) 명나라에서 보내온 것이다.
한국에서 청화백자를 번조(燔造)하기 시작한 것은 1457년(세조 3) 중국에서 회청(回靑)이 수입된 뒤부터이며, 《세조실록》에 의하면 1465년(세조 11)에 최초의 제품이 생산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1469년(예종 1)에는 전남 강진산(康津産) 토청(土靑:나라 안에서 생산된 청화안료)으로 청화백자가 생산되었고, 그 후 중국에서 수입한 회청이 함께 사용되었다. 청화백자는 경기도 광주를 중심으로 번조되었으며 이때부터 분원관요시대에 들어가 백자는 대량생산되고, 분청사기는 쇠퇴하게 되었다. 광주 일대에는 수많은 관요(官窯)가 있었으나 시간의 흐름에 따라 거듭 변천하였다.
대체로, 15·16세기경의 청화백자는 청화의 안료를 얻기가 어려운 때이므로 안료를 아껴 쓴 흔적과 사용하는 데 서툰 점을 볼 수 있으며, 그릇의 형태는 항아리[壺]의 경우 어깨의 선이 부드러워지고, 병(甁)은 수직으로 올라가는 긴 목으로 아래 부분과 조화를 이루었으며, 굽에서부터 곡선을 그리며 위로 퍼져나간 대접 등은 조선시대 도자기의 새로운 형태를 나타낸다. 17 ·18세기의 청화백자는 넓은 어깨가 아래로 내려와 전체의 모양이 구형(球形)에 가까워져 양감(量感)이 있으며, 목이 길어지고 표면에 모를 낸 각병(角甁)의 형식이 나타난다.
무늬에 있어서도 표면에 공간을 많이 남기던 초기에 비하여 굵은 필선(筆線)으로 표면 전체를 충분히 활용하였으며 화재(畵材)도 추초(秋草)무늬와 같은 15·16세기의 가냘픈 무늬에서 용(龍)·소상팔경(蕭湘八景)·십장생(十長生) 등을 그렸다. 19세기의 청화백자는 조선시대 백자의 최후를 상징하듯이 표면이 거칠고, 유조(釉調)는 회색이 많았으며, 목이 높고 몸이 길어 불안정한 형태를 이루고 있다. 청화의 안료는 서양에서 양청(洋靑)이라는 안료가 수입되어 그릇 표면을 메우다시피 그림을 그렸으며, 무늬도 저속하고 안일하여 격을 잃고 있다.
청화백자의 기형은 일상생활에 필요한 용구에서 문인 계급에게 공급되었던 문방구류에 이르기까지 매우 복잡하고 다양하다. 그러나 항아리·접시·사발·떡살 등의 생활용품과, 병·주전자·잔 등의 주기(酒器), 필통·연적·필세(筆洗)·필가(筆架) 등의 문방구, 묘지(墓誌)·인형 등의 명기(明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청화백자에 그리는 무늬는 시대 또는 그릇의 종류에 따라 각양 각색의 그림이 그려졌으며 중기 이후부터는 매우 복잡해져 여러 식물·동물·산수(山水)·십장생·문자 등을 복합적으로 그려넣었다. 대체로 초기의 문양이 간결하고 청초한 데 비해 시간이 흐를수록 둔하고 번잡하였다.
'문화재,도자기,사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보 제172호 진양군영인정씨묘출토유물(晋陽郡令人鄭氏墓出土遺物) (0) | 2015.09.09 |
---|---|
국보 제175호 백자상감연당초문대접(白磁象嵌蓮唐草文大楪) (0) | 2015.09.09 |
국보 제177호 분청사기인화문태호<내외호>(粉靑沙器印花文胎壺<內外壺>) (0) | 2015.09.08 |
국보 제178호 분청사기조화어문편병(粉靑沙器彫花魚文扁甁) (0) | 2015.09.08 |
국보 제179호 분청사기박지연어문편병(粉靑沙器剝地蓮魚文扁甁) (0) | 2015.09.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