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16.jpg 경상북도 안동시 신세동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탑. 높이 16.8m.

 

전탑(塼塔)이란 흙으로 만든 벽돌을 이용하여 쌓아 올린 탑을 말한다. 법흥동에 세워져 있는 이 탑은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법흥사에 속해있던 탑으로 추정되나, 탑 주위로 민가와 철도가 들어서 있어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安東 新世洞 7층 전탑은 중심가를 조금 벗어나 낙동강 줄기를 끼고 안동댐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도로와 병행하는 기차길 왼쪽에 우뚝 솟아 있다. 도로보다 높은 중앙선의 철길에 가려 자칫 지나쳐 버리기 쉽다. 높이 16.8m, 기단 폭 7.75m로서 우리나라에서 最古·最大의 전탑이다. 단층 기단에 7층의 몸돌(塔身)을 차츰 크기를 줄여 가며 쌓았다.

安東의 향토지인 「永嘉誌(영가지)」에는 7층 전탑이 8세기 통일신라시대의 건조물로서 조선 成宗 18년(1487)에 개축되었는데, 당시까지 法興寺가 세 칸 정도 남아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전탑이 있는 동네 이름 역시 法興洞이다. 전탑 이외의 유물은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이 터에는 固城李氏 塔洞派 宗宅(고성이씨 탑동파 종택)이 들어서 있다.

한국 최고(最古) 최대의 전탑이다. 기단(基壇)은 단층에 평면은 방형(方形)인데 현재는 지표에 팔부중상(八部衆像) 또는 사천왕상(四天王像)을 돋을새김한 화강석 판석을 1면에 6매씩 세우고 남면 중앙에는 계단을 설치하였다.

팔부중상이나 사천왕상들의 조각수법으로 보아 제작연대에 서로 차이가 있을 뿐 아니라 배치순서도 무질서하고 기단 상면은 비스듬히 둥글게 시멘트를 칠하여 어느 정도 원형이 보존되어 있는지 의문이다. 또한, 단층 기단 측면에 이렇게 많은 조상(彫像)을 배치한 예는 없다.

전탑 축조는 당시로는 첨단 공법이었다. 그러면 그 대표적인 신세동 7층 전탑은 어떻게 만들어진 것일까?

벽돌 크기는 길이 28cm, 너비 14cm, 두께 6cm 정도다. 이런 벽돌들을 벽면에 평평하게가 아니라 길이쌓기와 마구리쌓기를 섞어 가며 들쭉날쭉 쌓았다. 이렇게 지그재그로 쌓아야 위에서 누르는 힘이 균등하게 전달되어 탑이 안전하다는 것이다. 모서리 부분에는 바닥 벽돌과 같은 정사각형 벽돌을 따로 사용했다.

팔부중상 처마인 옥개 부분의 하단은 조금씩 내쌓기를 하고, 상단은 들여쌓기를 했다. 하단의 층수보다 상단의 층수를 한 단씩 더 많게 만들어 落水面(낙수면)의 기울기를 높였다.

신세동 7층 전탑은 치밀한 사전설계에 따라 만들어진 것이었다. 벽돌 하나하나를 만드는 데서부터 상당한 공력이 들었을 것이다. 한 대학 토목학과 연구팀은 다음과 같이 추산한 적이 있다.

전탑에서 가장 폭이 넓은 1층에만 1만 개의 벽돌이 사용되었다(전탑의 내부도 벽돌로 채워져 있다고 가정할 경우). 벽돌 하나의 무게는 4kg. 그렇다면 벽돌수를 곱한 1층의 무게는 40t이다. 탑은 위층으로 갈수록 부피가 조금씩 줄어들지만, 이를 무시하고 환산하면 전탑 전체의 벽돌수는 7만 장. 그 전체 무게는 280t이나 된다.

이 많은 벽돌을 어디서 만들었을까? 근처에선 벽돌을 굽던 가마터가 발견되지 않았다. 어른이 혼자 운반할 수 있는 무게가 50kg이라면 5600명이 동원되어야 나를 수 있는 규모이다. 어떻든 이런 공사는 사찰 경제력이 뒷받침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다. 安東은 조선왕조 이후 「儒林(유림)의 고장」이라고 불리게 되지만, 안동의 향토지 「永嘉誌」에 따르면 신라·고려시대까지만 해도 경주에 버금가는 불교의 중심지였다.

 

탑신부(塔身部)는 각 층을 길이 약 28㎝, 너비 약 14㎝, 두께 약 6㎝의 회흑색 무문전(無文塼)으로 어긋나게 쌓았다. 초층 옥신(屋身)은 매우 높고 남면 중앙 하반부에 화강석으로 테를 둘러서 작은 감실(龕室)을 개설하였는데, 내부는 위를 방추형으로 줄여 1면 48㎝의 네모난 구멍이 정상에 나 있어 찰주공(擦柱孔)으로 보인다.

 

2층 옥신은 1층 옥신의 높이에 비하여 약 4분의 1로 높이가 급격히 줄었을 뿐 3층 이상의 체감률은 심하지 않아, 7층이라는 고층인데도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다. 옥개석(屋蓋石)은 전탑 특유의 형태로서 처마 상하에 층단이 나타나며 처마는 수평이고 각 층 옥개의 너비는 석탑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었다.

기단부

 

밑의 받침 수는 초층부터 9단·8단·7단·6단·5단·3단이고, 옥개 상면의 층단 수는 초층부터 12단·10단·9단·8단·7단·6단·5단으로 상층으로 갈수록 체감되었다.

 

현재 낙수면에는 극히 일부에 기와를 입혔던 흔적이 남아 있음을 보면 당초에는 각 층 낙수면에 모두 기와를 입혔던 듯하다. 이것은 전탑에 앞서 목탑이 존재하였고 전탑은 목탑을 번안(飜案)한 것임을 보여 준다.

 

상륜부(相輪部)는 현재 노반(露盤)만이 남아 있으나 ≪영가지 永嘉誌≫에 기록된 ‘부동5리(府東五里)’에 있다는 ‘법흥사전탑(法興寺塼塔)’이 이 전탑에 비정되고 있다.

만약 그렇다면, 법흥사전탑에 관하여 ‘上有金銅之飾李股撤而納官鑄成客舍所用什物(상유금동지식이고철이납관주성객사소용집물)’이라는 각주(脚註) 내용으로 보아 원래는 금동 상륜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탑은 1487년(성종 18)에 개축된 바 있다.

 

12.gif 안동역 → 외룡터널방향 → 신세동7층전탑, 안동버스터미널 옆 버스정류장에서 3번 시내버스로 10분 가량 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