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7.jpg 서울특별시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석탑. 2기(基). 동탑 높이 4.3m, 서탑 높이 4m.

 

갈항사터(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동 소재)에 동·서로 세워져 있던 두 탑으로, 일제시대에 일본으로 반출될 위기에 처하자 1916년 경복궁으로 옮겨지고,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옮겨 놓았다.

 

석탑의 이전 당시, 석탑을 해체하던 중 양 석탑이 똑같이 기단부에 한 변의 길이가 75㎝, 두께가 33㎝인 자연석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것을 조사한 바 다시 그 밑에 거의 같은 크기의 가공한 석재가 있고, 그 상면 중앙에 마련된 사리공(舍利孔)내에서 청동기와 도기의 파편 등 사리장치가 수습되었는데, 동탑에서는 청동사리합·금동제사리병이, 서탑에서는 금동병과 구리합·종이조각 등이 발견되었다.

 

이 동·서 쌍탑은 그 규모와 건조방법이 같은 것으로 2층기단 위에 3층의 탑신부를 건립하고 그 위에 상륜부를 형성했던 전형적인 신라식의 일반형 석탑이다. 현재 두 탑 모두 상륜부는 없어졌고 서탑의 경우에는 3층 옥신까지만 남아 있다.

 

기단부는 굽도리식으로 돌려진 기대와 하층기단 면석을 동일한 돌로 조성하여 결구하고 그 위의 하층기단 갑석과 상층기단의 각 부는 각기 별도의 석재로 조성하여 여러 개로 구성하였다.

하층기단 면석에는 각 면 양쪽 우주와 2주의 탱주가 정연하게 모각되고 갑석 상면에는 높직한 원호와 약간 낮은 각형(角形)의 2단 굄대를 마련하여 그 위에 상층기단을 받고 있다.

 

9064.jpg 상층기단 면석은 각 면 1매씩 도합 4매의 판석으로 조립하였는데, 각 면에는 양쪽 우주와 2주의 탱주(撑柱)가 모각되어 신라 융성기의 건조물임을 곧 알 수 있다. 상층기단 갑석은 하면에 부연(副椽 : 탑 기단의 갑석 하부에 두른 쇠시리)이 마련되고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 굄대를 조출(彫出)하여 그 위에 탑신부를 받고 있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을 각기 다른 돌로 조성하였으며 각 층 옥신에는 양쪽에 우주가 정연하다. 옥개석도 각 층 동일한 양식 수법인데, 하면에는 깊숙이 낙수홈이 오목새김되고 5단씩의 옥개받침이 마련되었으며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 굄대를 조출하여 그 위층의 부재를 받고 있다.

 

낙수면이 평박하고 4면의 합각(合角)머리가 예리하며 네 귀퉁이의 전각도 반전이 경쾌하여 세련된 탑신을 이루고 있다. 상륜부는 노반석부터 남아 있는 부재가 하나도 없는데, 옮겨 세울 때 원위치에서 수습하지 못하였던 것 같다.

탑신부에서 현재 남아 있는 유구로 보아 크게 주목되는 것은 표면에 별도의 장식물이 첨부되었던 것으로 초층 옥신석 각 면에 사천왕입상이 있었던 듯한 흔적이 보이고, 또 각 우주의 옆모서리에는 길이로 5개의 못구멍〔釘穴〕이 일렬로 있고 우주 내연(內緣)에는 각 7개의 못구멍이 두 줄로 있으며 면석 상하와 좌우에는 각각 4개의 못구멍이 보인다.

 

또, 초층 옥개석에는 네 귀퉁이 전각부에 마련된 풍경공 이외에 각 면 추녀에 6개씩의 못구멍이 있고 낙수면에도 못구멍이 많이 있다.

그리고 2·3층 옥신석 우주 내에 각기 4개씩의 못구멍이 있고 각 층 옥개석 추녀면에도 초층에서와 같이 못구멍이 각 면 5개씩 있으며 낙수면에도 역시 못구멍이 많이 있다. 이렇듯 많은 못구멍은 탑신 표면에 금동판(金銅板)으로써 장식한 것을 고정시키기 위한 것이라 하겠다.

 

기단 명문 금동판을 돋을새김의 모형상에 대고 두들겨 물상을 압출해낸 수법으로 한편으로는 이러한 추제사천왕상을 초층 옥신에 못질하여 장식하고 다른 부분에도 또한 상상할 수 없는 여러 물상의 추제품을 덮어 장식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수법은 이보다 앞선 때인 통일신라시대의 초반기 석탑에서는 볼 수 없었던 찬란한 수식(修飾)으로 통일 성대에 이르러는 일반적으로 옥개석 전각 양면에, 또는 전각 저면(底面)에 못을 쳐서 이른바 풍경을 달았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가지 면을 검토해보면 이 시기에 한국의 석탑은 구조적으로 매우 통일된 정제성을 형성하고 동시에 수식장각(修飾裝刻)의 급속한 발전을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의사(意思)는 전형적인 양식의 탑파에서만 발휘된 의사가 아니라 그와 동시에 특수한 별개양식의 발생을 촉진시킨 특별한 의미도 있는 것이다.

이 양 석탑은 규모가 크지는 않으나 상하기단부에 똑같이 탱주 2주씩을 모각한 점을 비롯하여 각 부 구성에서 통일 초반의 석탑양식을 잘 계승하였고 각 부의 비례가 균형 있는 조화를 보이고 있다.

 

동탑에는 상층기단부 면석에 유려한 필치와 높은 기품의 행서로 쓰여진 명기(銘記)가 오목새김되어 있어서 탑을 조성한 유래와 건립연대를 알 수 있어 주목된다.

이렇듯 탑 자체에 명문을 적어 놓은 것으로 신라시대 석탑으로서는 유일한 예이며 그 명기가 이두문을 사용한 점에서 더욱 귀중한 유례라 하겠다. 이 명문에 의하면 758년(경덕왕 17)에 이 2기의 석탑이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