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34.jpg 고려의 마지막 왕인 제34대 공양왕과 그의 부인 순비 노씨(順妃 盧氏)의 능으로, 쌍능(雙陵) 형식이다.

능 앞에는 각각 비석(碑石)과 상석(床石)이 하나씩 놓여 있고, 양릉의 가운데에는 장명등(長明燈) 하나와 그 앞에 석호(石虎) 하나가 남아 있다. 능 양쪽에는 문무석(文武石) 두 쌍이 마주보고 서 있다. 문무석은 모두 1미터 내외 크기로 능에 가까운 것이 보다 작고, 손에는 아무것도 쥐지 않은 채 두 손을 마주잡고 있는 공수(拱手) 형태를 하고 있다. 그 옆의 것은 키가 좀더 크고, 손에는 홀(笏)을 쥐고 서있다. 석호는 고려의 전통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나, 조선 초기의 왕릉인 건원릉(健元陵)(태조(太祖)의 능)과 헌릉(獻陵)(태종(太宗)의 능)의 것과 양식이 비슷하다. 장명등은 하대(下臺) 받침 위에 4각으로 된 간석(竿石)과 화사석(火舍石), 8각으로 된 옥개석(屋蓋石)이 올려져 있으며, 화창(火窓)은 두 개이다. 석호 옆에는 8각의 화사석이 있는데, 이것이 원래 장명등의 화사석이 아닌가 추측된다. 석물의 양식과 수법은 다른 고려 왕릉의 것과 같이 대체로 소박하나 왜소한 느낌을 준다. 상석 뒤에 서있는 비석은 능을 처음 만들 때 세운 것으로 보이지만, '고려공양왕고릉(高麗恭讓王高陵)'이라는 글씨가 씌어 있는 능 가운데의 묘표석(墓表石)은 조선 고종 때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공양왕(1345-1394)의 이름은 요(瑤)인데, 신종(神宗)의 7대손이고 아버지는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인 균(鈞)이다. 1389년 위화도 회군(威化島 回軍)에 의하여 정치와 군사의 실권을 장악한 이성계(李成桂) 등이 이른바 폐가입진(廢假立眞)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왕(禑王)과 창왕(昌王)을 신씨(辛氏)로 몰아 폐위시키고, 공양왕을 즉위시켰다. 공양왕은 재위 3년 동안 정치·경제·사회 등 여러 부문에 걸쳐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이는 이성계로 대표되는 신흥사대부들이 고려의 구귀족인 권문세족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종래의 공사전적(公私田籍)을 모두 불사르고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한 전제개혁(田制改革)(1391)은 구질서인 고려왕조가 몰락하고 신질서인 조선왕조가 수립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과정에서 폐위된 우왕과 창왕은 강릉과 강화에서 각각 살해되었다. 개혁반대파인 정몽주(鄭夢周)와 같은 최후의 적대세력을 쓰러뜨린 이성계 일파는 공양왕의 양위를 강요하고, 이성계를 추대하여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리하여 공양왕 4년(1392) 7월에 이씨(李氏)의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이루어져서 고려왕조는 멸망하였다.

조선 건국 직후 공양왕은 원주(原州)로 추방되었다가 간성군(杆城郡)으로 옮겨졌고 공양군(恭讓君)으로 강등되었으며, 태조 3년(1394) 4월 삼척부(三陟府)에서 두 아들과 함께 50세의 나이로 목이 졸려 살해되었다. 이후 태종 16년(1416) 공양왕으로 추봉하고 능을 고양현(高陽縣)에 마련하였으며, 경기도 안성 청룡사(靑龍寺)에 안치되어 있던 공양왕의 어진(御眞)을 능 옆의 암자로 옮겨오게 하였다. 왕과 함께 묻힌 왕비는 순비 노씨(順妃 盧氏)로 교하(交河) 출신 창성군 노신(昌城君 盧愼)의 딸이며, 세자로 책봉된 석(奭)과 숙녕(肅寧)·정신(貞信)·경화(敬和) 세 공주를 낳았다.

한편 사적 제191호로 지정된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의 공양왕릉 이외에도 공양왕이 살해된 삼척지역의 근덕면 궁촌리(近德面 宮村里) 178번지의 해안가 언덕에 이 지역 주민들에 의해 공양왕릉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있는데, 이 무덤은 1995년 강원도 기념물 제71호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