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고창군 아산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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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 |
선운사의 유래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도솔산(兜率山)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이다.
도솔산은 선운산(禪雲山)이라고도 하며, 조선 후기 선운사가 번창할 무렵에는 89개의 암자와 189개에 이르는 요사(寮舍)가 산중 곳곳에 흩어져 있어 장엄한 불국토를 이루기도 하였다.
도솔산 북쪽 기슭에 자리 잡고 있는 선운사는 김제의 금산사(金山寺)와 함께 전라북도의 2대 본사로서 오랜 역사와 빼어난 자연경관, 소중한 불교문화재들을 지니고 있어 사시사철 참배와 관광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특히 눈 내리는 한겨울에 붉은 꽃송이를 피워내는 선운사 동백꽃의 고아한 자태는 시인ㆍ묵객들의 예찬과 함께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선사가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 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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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의 꽃무릇/한국관광공사제공 |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재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선운사의 연혁
백제 27대 위덕왕 24년(577)에 검단(檢旦, 黔丹) 스님이 선운사를 창건한 뒤 통일신라기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며, 고려 공민왕 3년(1354)에 효정(孝正) 스님이 퇴락한 법당과 요사를 중수하였다.
조선시대에 절을 크게 중창한 이는 행호 극유(幸浩克乳) 스님이다. 1472년(성종 3) 선운산의 한 암자에 머물며 수도하고 있던 행호스님은, 구층 석탑만이 외롭게 남은 채 폐허화된 선운사를 보고 안타까이 여겨 중창을 발원하였다. 이듬해(1473년) 제자 종념(終念) 스님과 함께 상경하여 성종의 작은아버지 덕원군(德源君)에게 중창의 뜻을 밝히고 도움을 청하자, 덕원군은 재물과 함께 직접 원문(願文)을 써주었다. 이에 나주 보을정도(寶乙丁島)에 가서 재목 1천여 그루를 구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기와 20여 가마를 구워, 1474년 가을에 2층의 장륙전(丈六殿)과 관음전(觀音殿)을 완공하였으며 이듬해 봄에는 선왕(先王)의 영혼을 추모하는 수륙재(水陸齋)를 크게 열었다. 1476년에는 천불대광명전(千佛大光明殿)을 조성하였고, 1481년에는 모든 건물의 단청을 마쳤을 뿐만 아니라 지장전(地藏殿)ㆍ동상실(東上室)ㆍ금당(金堂)ㆍ능인전(能仁殿)을 짓고 영산회(靈山會) 등 53불회탱(五十三佛會幀)을 조성하였다. 이와 같이 10여 년에 걸친 극유스님의 중창불사로 인해 선운사는 옛 모습을 되찾아, 숭유억불의 조선사회에서도 왕실의 원찰(願刹)로서 법등(法燈)을 환히 밝히게 되었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1597년(선조 3)의 정유재란 때 어실(御室)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불에 타서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이후 1608년(광해군 즉위년)부터 2년간 승려 수십 명이 근근이 선방과 요사를 마련하고, 수년 동안 힘을 모아 법당 3칸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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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운사가는 길/한국관광공사제공 |
이러한 사정을 안타까이 여기고 있던 무장현감 송석조(宋碩祚)가, 선운사의 어실은 왕실의 재(齋)를 여는 곳이었으므로 나라의 도움을 얻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여 1613년(광해군 5) 봄 일관(一寬) 스님에게 중창을 의논하였다. 이에 일관스님은 원준(元俊) 스님과 힘을 합하여 수많은 집을 돌며 시주를 모으고, 어실을 구실삼아 도백(道伯)으로부터 고창 문수산의 재목을 얻어 보전(寶殿) 5칸을 세운 다음, 상하 누각과 동서 양실(兩室)을 건립하였다.
곧이어 법당ㆍ천불전ㆍ지장전ㆍ능인전 등을 창건하여 1619년까지 6년에 걸쳐 사찰의 골격을 갖추게 되었다. 이후로도 일관ㆍ원준스님 등의 뜻을 이어받은 스님들에 의해 중수와 중건이 계속되어 1620년에 정문ㆍ향운각(香雲閣)과 1624년에 천왕문(天王門)을 세우고 1634년 법당에 삼존상을 조성ㆍ봉안하였으며, 1658년에 시왕전(十王殿), 1659년에 해납료(海納寮)ㆍ삼선료(三仙寮), 1676년에 약사전(藥師殿), 1677년에 나한전(羅漢殿), 1678년에 극락전(極樂殿), 1682년에 칠성료(七星寮)ㆍ청심료(淸心寮), 1691년에 대승전(大乘殿) 등을 창건하였다.
이 무렵 절에서 수행하던 대중은 무려 260여 명에 달하여 당시 사찰의 규모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어 1693년에 동운암(東雲庵)을 창건하고 1699년에 미륵전(彌勒殿), 1705년에 관음전ㆍ양계료(養鷄寮)ㆍ양봉료(養鳳寮), 1706년에 팔상전(八相殿), 1709년에 한산전, 1713년에 장육전 등을 창건하였다.
선운사에서는 특히 걸출한 고승대덕(高僧大德)들이 많이 배출되어 사격(寺格)을 드높였다. 조선 후기 화엄학의 발전에 큰 발자취를 남긴 설파 상언(雪坡尙彦) 스님과 선문(禪門)의 중흥주로 추앙받는 백파 긍선(白坡亘琁) 스님을 비롯하여, 구한말의 청정율사 환응 탄영(幻應坦泳) 스님, 근대불교의 선구자 박한영(朴漢永) 스님 등이 선운사에서 수행하면서 당대의 불교를 이끌어갔던 것이다. 현존하는 전각은 대웅보전과 관음전ㆍ영산전ㆍ팔상전ㆍ명부전ㆍ산신각ㆍ만세루ㆍ천왕문이 있고, 대웅보전 앞에는 6층 석탑과 괘불대ㆍ당간지주ㆍ석주 등이 있으며, 산내암자로는 참당암(懺堂庵)ㆍ도솔암(兜率庵)ㆍ동운암(東雲庵)ㆍ석상암(石上庵) 등 네 곳이 있다.
선운사 대웅보전은 보물 제290호로 지정되어 있고, 보물 제279호인 선운사 금동보살좌상이외에도 영산전목조삼존불상ㆍ육층석탑ㆍ범종ㆍ만세루ㆍ백파율사비를 비롯하여 『석씨원류』ㆍ『선운사사적기』 등이 전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경내의 동백나무숲ㆍ장사송ㆍ송악은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선운사에 전해오는 이야기들
1. 진흥굴
흥왕은 삼국시대 불교가 성행했던 신라에서 제23대 법흥왕의 태자로 태어났다. 태자 당시의 이름은 아사달로서, 그는 어릴 때부터 불도에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었다. 어느 날 아사달이 꿈을 꾸었는데, 인도의 왕자로 탄생한 석가모니가 구중궁궐과 애처를 버리고 승려가 되어 몸소 고행을 하여 득도하고 불도를 중흥시켜 대성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아사달은 그 후 자기도 그렇게 될 수 없을까 하는 생각에 잠길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는 부친의 대통을 이어 왕위에 오르지 않으면 안 될 신라의 법전에 따라 부득이 24대의 왕을 계승하여 진흥왕이 되었다. 그러나 나라의 일을 하면서도 불도의 뜻을 버리지 못해, 끝내는 왕위를 물려주고 평소 많은 시주와 관심을 가져온 선운사로 수도의 길을 떠났다. 진흥왕은 왕위를 떠나올 때 왕비와 사랑하는 중애(重愛) 공주를 데리고 선운사를 찾아 삭발하고 승려가 되었다.
진흥왕이 맨 먼저 찾아온 곳은 지금 선운산의 사자암 앞에 있는 석굴로서 좌변굴이라 불렸는데, 후세에 이 굴의 명칭을 진흥굴이라 고친 것은 진흥왕이 친히 거처하며 수도하였기 때문이라 한다. 진흥왕은 승려가 된 후 이름을 법운자(法雲子)라 칭하고 사랑하는 공주 중애를 위하여 중애암(重愛庵), 왕비의 별호 ‘도솔’을 따서 도솔암(兜率庵)을 건립하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쳤다고 한다.
2. 마애불의 비밀
도솔암 서편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은 인근주민들에게 ‘미륵불’로 불리면서 많은 이야기를 안고 있는데, 특히 미륵신앙의 배경 하에 동학농민운동과 밀접히 관련된 역사를 지니고 있다.
미륵신앙은 미래불 彌勒이 출현하여 현실의 모순과 괴로움을 타파하고 이상세계를 구현하리라는 구원론적 신앙으로서, 특히 억압받고 있는 하층민에게 널리 수용되었다. 이 마애불이 조성된 후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불상의 배 부분에 표시된 사각형의 복장(腹藏)에 세상이 깜짝 놀랄 만한 비기(秘記)가 들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1820년에 『춘산채지가(春山採芝歌)』라는 예언서를 쓴 이서구(李書九)가 1787년 전라도 감찰사로 부임하였을 때의 일이다. 부임한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미륵불이 있는 곳에서 서기가 뻗쳐오르는 것을 보고, 비기를 열어보고 싶은 강렬한 호기심에 이끌려 복장 속에 있는 한 권의 책을 꺼내고 말았다. 첫 장을 펼치자마자 갑자기 맑은 하늘에 뇌성벽력이 내려치는 바람에 부랴부랴 다시 복장에 넣고 봉하였는데, 비기의 첫머리에 “전라감사 이서구가 억지로 열다(全羅監司 李書九 開坼)”라는 문구만을 보았다고 한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비기를 함부로 꺼내면 벌을 받는다는 생각에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였고, 숱한 전설만을 남긴 채 세월이 흘렀다.
그뒤 100여 년이 지나 전라도 고부를 중심으로 동학농민운동이 무르익던 무렵, “미륵부처님의 배꼽에 신기한 비결이 들어있는데 그 비결이 나오는 날 한양이 망한다”는 말이 은밀하게 나돌았다. 이에 1892년(고종 29) 8월 어느 날, 동학 정읍대접주인 손화중(孫華仲)의 접중(接中)에서, 민중을 구원할 이상세계를 만들기 위해서는 미륵의 비기가 반드시 필요하며 지금이 바로 비기를 열어볼 때임을 결의하였다. 이에 동학도 300여 명이 도솔암으로 올라가서, 청죽 수백 개와 새끼줄 수천 다발로 임시가교를 만들어 암벽에 올라간 뒤 비기를 꺼내었다.
그후 미륵의 비기에는 “이조 500년 후에 미륵석불의 복장을 여는 자가 있을 것이며, 그 비기가 세상에 나오면 나라가 망할 것이요, 그러한 후에 다시 새롭게 흥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 동학도가 천지개벽의 비결을 입수했다는 소문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무장ㆍ고창ㆍ영광ㆍ흥덕ㆍ고부ㆍ정읍ㆍ태인ㆍ전주 등 전북의 동쪽지역 일대에서 동학도의 수가 수만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미륵신앙(彌勒信仰)과 동학(東學)이라는 사상적ㆍ실천적 물결의 합류는, 민중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희구해온 혁세(革世)의 불씨에 거대한 불길을 일으켰던 것이다. 실제로 동학도들이 비기를 꺼내었는지 또는 그 내용이 어떠하였는지 등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미륵불의 힘을 통해 모순에 찬 현실을 타파하고 이상세계를 이루고자 한 당시 민중들의 간절한 염원과 실천적 행동은 엄연한 역사적 현실이었다.
3. 지장보살의 구원
우리나라에서는 일찍부터 지장보살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여 대표적인 불교신앙 중의 하나로 정착되었다. 지장보살은 죄고(罪苦)에 빠진 모든 중생을 구원하기 전에는 자신의 성불을 미루겠다는 대원을 세우고, 천상에서 지옥에 이르는 육도(六道)의 중생을 낱낱이 교화시켜 성불하도록 인도하는 대자대비(大慈大悲)의 보살이다. 따라서 지장보살은 육도윤회를 심판하는 저승세계의 구세주로 등장하게 되었고, 조상의 천도를 위한 도량으로 이용되고 있는 명부전(冥府殿)의 주존으로 널리 신앙하고 있다. 선운사는 예로부터 지장보살의 도량으로 일컬어져 왔다.
관음전ㆍ도솔암 도솔천내원궁ㆍ참당암 약사전에 각각 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어, 지장 삼장(三藏)을 탱화가 아닌 불상으로 모시고 있는 유일한 사찰이다. 이는 성종 때의 중창이 왕실의 원찰(願刹)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선왕(先王)의 명복을 비는 뜻에서 먼저 지장을 모시고, 이에서 나아가 삼장을 모심으로써 이곳을 지장신앙의 중심지로 삼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지장보살과 관련된 각종 영험담이 이어지고 있어, 우리나라 제일의 지장기도 도량으로서 사시사철 기도하러 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관음전에 봉안된 지장보살상(보물 제279호)과 관련된 대표적인 영험담은, 일제강점기에 도난을 당하였다가 다시 선운사로 돌아오게 된 일이다.
1936년 당시 일본인 2명과 우리나라 사람 1명이 공모하여 보살상을 훔쳐간 뒤, 거금을 받고 팔아넘겨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다. 그런데 이때부터 지장보살상이 소장자의 꿈에 수시로 나타나서 “나는 본래 전라도 고창 도솔산에 있었으니, 어서 그곳으로 돌려보내 달라”고 하였다. 소장자는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이후로 병이 들고 가세(家勢)가 점점 기울게 되자 꺼림칙한 마음에 보살상을 다른 이에게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지장보살이 소장자의 꿈에 나타났고, 이를 무시하여 집안에 우환이 끊이지 않게 되자 그 역시 다시 다른 이에게 넘기게 되었다. 그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이 보살상을 소장한 사람들이 겪은 일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으며, 마지막으로 소장하게 된 사람이 이러한 사실을 고창경찰서에 신고하여 모셔갈 것을 부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당시 선운사 스님들과 경찰들이 일본 히로시마로 가서 보살상을 모셔오게 되었는데, 이때가 도난당한 지 2년여 만인 1938년 11월이었다. 당시 잃어버린 보살상을 다시 모시고 온 사실을 기념하기 위해 찍은 사진에도 사건에 대한 이러한 개요가 간략하게 기록되어 있다.
또한 도솔암 도솔천내원궁에 봉안된 지장보살좌상(보물 제280호) 역시 많은 영험을 보이고 있는데, 대표적인 영험담은 1996년 대구에 사는 한 여성신도가 겪은 일이다. 당시 유방암에 걸려 있었던 이 신도는 온갖 약과 명의를 찾아 치료에 정성을 다했으나 암은 말기까지 진행되어 죽음 직전에 이르렀다. 가족들 역시 마음의 준비를 하였고, 신도는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해 도솔암을 찾아 백일기도를 시작하였다. 병이 깊어진 때라 몸을 가누기가 어려웠지만 정성을 다해 절을 하면서 지장보살의 명호를 부르는 기도에만 열중하였다. 그러나 23일째 되던 날 밤에 몸을 가누지 못해 쓰러지고 말았는데,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을 차려라. 저승사자가 기다리는데 어찌 잠만 자고 있느냐?” 그 소리에 고개를 들어보니, 지장보살이 성큼 내려와 가슴 뒤쪽의 등을 어루만지며 큰 대바늘로 세 번을 찔렀다. 마지막 침을 빼는 순간 잠에서 깨어났는데, 혼미한 가운데서도 가슴 주위가 시원해지며 오르내리기에 힘들기만 하던 요사채로 단숨에 뛰어 내려갈 수 있었다. 같은 시각에 새벽 도량석을 하던 스님이 내원궁에서 환한 빛이 하늘로 오르는 것을 보고 불이 났다며 여러 대중과 함께 달려가 보니, 그 빛은 화염이 아닌 지장보살이 내뿜는 방광(放光)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랍고 벅차오르는 환희심에 그 자리에서 엎드려 부처님께 절을 올렸다.
편안한 마음으로 죽음을 맞이하고자 백일기도를 시작한 그 신도는 씻은 듯이 병이 나았고, 이후 도반들과 함께 ‘도솔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정기적으로 내원궁 지장보살님에게 참배를 올리고 있다. 도솔회는 도솔암에서 기도를 하여 영험을 본 이들의 모임으로서, 전국 각지에 회원이 있어 도솔암 지장보살의 영험을 가히 알 수 있게 한다.
4. 창건설화
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 진흥왕이 창건했다는 설과 백제 위덕왕 24년(577)에 고승 검단(檢旦, 黔丹)이 창건했다는 두 가지 설이 전하고 있다. 첫 번째 설은 신라의 진흥왕(재위기간 540~576)이 만년에 왕위를 내주고 도솔산의 어느 굴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이때 미륵삼존불이 바위를 가르고 나오는 꿈을 꾸고 크게 감응하여 중애사(重愛寺)를 창건함으로써 이 절의 시초를 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왕이 이곳에 사찰을 창건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따라서 시대적ㆍ지리적 상황으로 볼 때 검단선사의 창건설이 정설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검단스님의 창건과 관련해서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해오고 있다. 본래 선운사의 자리는 용이 살던 큰 못이었는데 검단스님이 이 용을 몰아내고 돌을 던져 연못을 메워나가던 무렵, 마을에 눈병이 심하게 돌았다. 그런데 못에 숯을 한 가마씩 갖다 부으면 눈병이 씻은 듯이 낫곤 하여, 이를 신이하게 여긴 마을사람들이 너도나도 숯과 돌을 가져옴으로써 큰 못은 금방 메워지게 되었다.
이 자리에 절을 세우니 바로 선운사의 창건이다. 검단스님은 “오묘한 지혜의 경계인 구름[雲]에 머무르면서 갈고 닦아 선정[禪]의 경지를 얻는다” 하여 절 이름을 ‘禪雲’이라 지었다고 전한다. 또한 이 지역에는 도적이 많았는데, 검단스님이 불법(佛法)으로 이들을 선량하게 교화시켜 소금을 구워서 살아갈 수 있는 방도를 가르쳐주었다.
마을사람들은 스님의 은덕에 보답하기 위해 해마다 봄ㆍ가을이면 절에 소금을 갖다 바치면서 이를 ‘보은염(報恩鹽)’이라 불렀으며, 자신들이 사는 마을이름도 ‘검단리’라 하였다. 선운사가 위치한 곳이 해안과 그리 멀지 않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서 염전을 일구었던 사실 등으로 미루어보아, 염전을 일구어 재력을 확보할 수 있었던 검단스님이 사찰을 창건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산내암자
1. 도솔암
도솔암(兜率庵)의 정확한 창건사실은 알 수 없으나, 사적기에는 선운사와 함께 백제 때 창건되었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이에 따르면 신라 진흥왕이 만년에 왕위를 버리고 도솔산의 한 굴에서 머물고 있었는데, 어느날 밤 바위가 쪼개지며 그 속에서 미륵삼존불이 출현하는 꿈을 꾸고 이에 감응하여 중애사ㆍ선운사ㆍ도솔사 등 여러 사암(寺庵)을 창건하였다는 것이다. 당시 백제의 영토였던 이곳에 신라 왕이 머물렀을 가능성은 희박하여 창건사항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륵삼존의 출현이나 ‘도솔(兜率)’이라는 이름 등은 도솔암이 미륵신앙의 배경 하에 창건된 사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도솔암 서편의 거대한 암벽에 새겨진 마애불좌상(磨崖佛坐像)은 고려 초기의 마애불 계통 불상으로 크게 주목받고 있는데, 사람들이 이 마애불을 ‘미륵불’이라 부르고 있었던 데서도 도솔암과 미륵신앙의 깊은 관련성을 잘 말해주고 있다. 마애불좌상이 조성된 이래 이 불상의 배꼽에는 신기한 비결(秘訣)이 숨겨져 있다는 전설이 전하여, 동학농민전쟁 무렵에는 동학의 주도세력들이 현세를 구원해줄 미륵의 출현을 내세워 민심을 모으기 위해 이 비기를 꺼내가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하였다.
발굴조사에 따르면 이곳에서 출토된 기와에 ‘도솔산 중사(兜率山仲寺)’라는 명문이 있어 당시에는 절이름을 중사라고도 불렀음을 알 수 있다.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 도솔암은 상도솔암ㆍ하도솔암ㆍ북도솔암 등 세 암자로 나뉘어져 독자적인 이름을 갖게 된다.
상도솔암은 지금의 도솔천내원궁으로서 1511년에 지은(智誾) 스님이 중창한 뒤 1694ㆍ1829년에 각각 중수하고 1705년에 중종을 봉안하였는데, 조선 말 이후 내원궁만 남기고 퇴락하였다. 하도솔암은 현재 마애불상이 있는 곳으로서 1658년에 해인(海印) 스님이 창건하였으며, 북도솔암은 지금의 대웅전이 있는 자리로서 1703년(숙종 29)에 최태신이 창건하였다. 이처럼 각기 독자적인 암자였던 것이 근세에 와서 북도솔암을 중심으로 하나의 암자로 통합된 것이다.
현재 도솔암의 전각은 대웅전ㆍ나한전ㆍ도솔천내원궁ㆍ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도솔암내 원궁에는 보물 제280호인 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마애불좌상은 보물 제1200호, 나한전과 내원궁은 각각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2. 참당암
선운사 참당암(禪雲寺懺堂庵)은 암자 중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녔으며, 지금은 산내암자로 사격(寺格)이 위축되었지만 본래 참당사 또는 대참사(大懺寺)라 불리었던 거찰(巨刹)이었다. 삼국시대 의운(義雲) 스님에 의해 설립되었는데, 창건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설화가 전한다.
의운스님이 도솔산 법화굴(法花窟)에 살고 있을 때 산 아래 죽포(竹浦) 포구에 돌배 한 척이 들어왔다. 이 배는 속인들이 보려고 다가가면 바다로 멀어지곤 하다가, 의운스님이 제자들을 이끌고 포구로 나가서야 저절로 다가왔다. 이윽고 배에서 노를 젓던 한 금인(金人)이 나타나 여러 불상과 경전과 보인(寶印)을 스님에게 전해주고 떠났다. 그날 밤 스님의 꿈에 금인이 나타나서 “나는 우전국(于?國)의 왕인데 불상을 모실 곳을 찾아 해동의 여러 산천을 두루 돌아다니던 중, 도솔산에 대참(大懺)의 신령스러운 기운이 서린 것을 보고 이곳으로 왔으니, 청컨대 집을 짓고 편안히 모시도록 하시오”라고 당부하였다. 이에 스님은 산 가운데 터를 잡고 진흥왕의 도움으로 절을 세우고 ‘대참사’라 하였으니, 이때는 581년(백제 위덕왕 28)이었다.
이 절이 삼국시대 의운스님이 세운 것이라 하더라도, 당시 이곳은 신라와 세력다툼이 치열했던 백제의 영토였기 때문에 신라의 진흥왕이 시주한 것은 후일에 첨가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창건 이후의 역사는 전하지 않고 고려시대에 1328년(충숙왕 15)부터 이듬해까지 중수가 있었으며, 1346년(충목왕 2)부터 1398년(태조 7)까지 약 52년에 걸쳐 점찰신앙(点察信仰) 법회의 하나인 생회(?會)가 개설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여러 차례의 중건이 있었는데 먼저 1530년(중종 25)에 재중수하였고, 이어서 1614년(광해군 6), 병자호란 뒤인 1642년(인조 20), 1794년(정조 18) 등 4차에 걸친 중수가 있었다. 당시는 법당 동쪽에 승당, 서쪽에 미륵전, 위로는 약사전, 아래로는 명부전 등 여러 전각을 갖추어 조선 후기까지만 해도 독립된 사찰로서 번성하였으나, 성종대(1469~1494) 이후 선운사가 산중의 중심도량이 되면서 상대적으로 차츰 사세가 약화되었다.
현재 참당암의 전각은 대웅전과 약사전(藥師殿)ㆍ응진전(應眞殿)ㆍ명부전(冥府殿)ㆍ도솔선원ㆍ요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참당암대웅전은 보물 제803호이며, 약사전에 봉안되어 있는 약사여래불상(실제로는 지장보살상으로 보아야 함)과 참당암동종은 전북유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3. 동운암
동운암(東雲庵)의 창건연대는 알 수 없으나 무장현감 송석조(宋碩祚)와 일관(一寬)ㆍ원준(元俊) 스님 등이 대대적으로 중창을 하였던 1614년(광해군 6) 무렵인 것으로 추측된다. 그뒤 1693년(숙종 19)에 중창하여 1970년대까지만 해도 명맥을 이어왔으나, 지금은 법당과 칠성각만이 남아 있다. 법당에는 석가삼존불을 봉안하였으며, 근래에 조성한 석가모니후불탱화와 지장시왕탱, 신중탱화 등이 있다
4. 석상암
석상암(石床庵)은 선운사와 함께 백제 때 창건된 기록이 전하며, 이후 1665년(현종 6)에 학철(學哲) 스님이 중창하였다. 현재는 인법당과 칠성각만이 남아 있으나, 주변 네 곳에 건물터가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본래는 규모가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인법당은 조선후기의 건물로서 석가삼존상을 봉안하였고, 1939년에 응파(應坡)스님이 조성한 아미타후불탱화를 중심으로 칠성탱화ㆍ신중탱화 등이 좌우에 모셔져 있다.
교통안내
1) 서해안고속도로 선운사 IC → 선운사
2) 호남고속도로 정읍I.C에서 정읍시내 반대편 도로 진입 → (1.8km) → 22번 국도와 29번 국도 갈림길(주천삼거리) → 22번 국도 → 흥덕(22번, 23번 갈림길)→ 22번 국도 → 오산저수지 → 반암리 갈림길 → 우측도로로 2.8km → 왼편으로 선운산도립공원 진입로
현지교통
1) 고창→선운사 : 직행 4회, 완행버스 40분간격 운행/30분 소요/20km 거리
2) 흥덕→선운사 : 직행 4회, 군내버스 50분 간격 운행/35분 소요/16km 거리
3) 정읍→선운사 : 직행 4회/50분 소요/34km 거리
4) 광주→고창 : 직행 30분 간격운행/50분 소요/72km 거리
* 문의: 고창 군내버스 터미널(063-564-3943) / 군외버스 터미널(063-563-3388)
현지숙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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