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남원시 산곡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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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
사진출처 : |
전라북도 남원시 산곡동 교룡산성(蛟龍山城) 내에 있는 절.
〔연 혁〕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 본사인 금산사(金山寺)의 말사이며, 산성 내에 있다고 하여 산성절이라 부르기도 한다.
창건은 685년(신문왕 5) 삼국통일 직후 전국의 행정구역을 재편할 때 남원 소경(小京)이 설치되면서 함께 창건되었다고 전한다. 당시 이곳에 용천(龍泉)이라는 맑은 샘물이 있어 절 이름을 용천사라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지금의 선국사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밖의 연혁은 전하는 것이 없어 알 수 없으나 창건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교룡산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교룡산성이 언제 축조되었는지 현재까지 명확하지 않으나 예로부터 국방의 요충지로 큰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 말 빈번한 왜구의 침입과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등 국난이 있을 때마다 전라좌영이 있었던 남원부에서는 곡성, 옥과, 구례, 창평, 장수, 운봉 등 6개 군현에서 거둬들인 군량미를 이곳 교룡산성 안에 보관했음이 여러 문헌에서 확인된다.
이렇듯 국가적으로 중요시되던 교룡산성이기에 이곳을 지키고 운영하기 위해 지금의 선국사가 나름대로 역할을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선국사는 산성을 지키는 본부로도 사용되어 수성장(守城將)과 별장(別將)이 배치되었고, 그래서인지 전성기에는 승려가 300여 명이 머물렀다고 한다.
현재 선국사에 대한 내력이 전하는 것으로 가장 앞선 기록은, 사찰에 전하는 「숭정삼회기해선국사법당신건시주질(崇禎三回己亥善國寺法堂新建施主秩)」이라는 현판내용이다. 이에 따르면 1779년(정조 3) 법당을 새로 짓고 1808년(순조 8)에 약사전을 중창했으며, 1826년(순조 26)에 다시 법당을 중수했다고 한다. 그 후 1890년(고종 27)에는 산내암자인 덕밀암의 칠성각을 세웠다.
1895년에는 동학혁명 당시 동학 접주 김개남이 남원과 교룡산성을 점령하여 관군과 일대 접전을 벌였는데, 이 와중에 선국사는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이후 1917년 현암스님이 대웅전과 약사전, 칠성각을 중수하고 보제루를 새로 지었다. 이러한 전말은 사찰에 전하는 「선국사중수기(善國寺重修記)」 현판에 기록되어 있다.
근래에 들어와서는 1984년에 삼성각을 새로 짓고 1991년에 미륵불상을 세웠으며, 1994에 보제루와 1998년에 대웅전을 중수하고, 1999년과 2002년에 관음전과 칠성각을 각각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우 및 문화재〕
현존하는 당우로는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14호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칠성각·요사채·보제루 등이 있는데, 그 가운데 보제루는 군사용으로 많이 사용되었던 건물이다. 문화재로는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5호인 대북과 전라북도 민속자료 제27호로 지정된 ‘蛟龍山城僧將印(교룡산성승장인)’이라고 새겨진 철인(鐵印)이 있다.
이 도장은 1960년 보월(寶月)이 보제루 마루 밑에서 발견한 것으로, 산성 별장이 동학군에게 성을 빼앗길 때 빠뜨리고 간 것이다. 절 밑 산곡리에서 생산되는 닭은 예로부터 진상닭으로 이름나 있고, 이백면은 초동쌀과 송동면의 세동쌀, 관왕묘의 미나리는 모두 진상품으로 지정되었으며, 절 일대에서 만들었던 산성엿은 지금도 산곡리의 특산물로 남아 있다.
〔사찰풍경〕
교룡산이 이름 높은 것은 속에 교룡산성(蛟龍山城)을 품고 있어서이다. 교룡산성은 남원지역 20여 개의 산성 중 형태가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성으로, 백제 때 신라와 대적하여 처음 쌓았다고 전한다. 또한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이 왜구를 맞아 싸웠고, 임진왜란 당시 승장 처영이 크게 수축한 곳이다. 그런가하면 동학혁명 때는 접주 김개남이 이끄는 농민군이 관군과 큰 접전을 벌인 역사적인 유적지이기도 하다.
절이름에 ‘국(國)’자가 들어가는 사찰들은 대부분 나라를 위해 큰 역할을 담당해왔던 것처럼 선국사도 나라를 지켜낸 수난의 역사를 간직한 곳이다.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호남지역의 6개 군현에서 거둔 군량미(軍糧米)를 바로 이 교룡산성에 보관했는데, 이때 선국사는 교룡산성을 지키는 수비대의 본부 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전성기에는 300여 명의 스님이 머물 정도의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1960년 보제루에서 발견된 구리도장은 산성을 지키는 승군(僧軍)에게 조정에서 내려보낸 것으로, 교룡산성과 선국사를 나라에서도 중요하게 여겼음을 짐작할 수 있다.
선국사는 이러한 역사의 현장에서 평상시에는 불법 수행도량으로, 전시(戰時)에는 방어진지 역할을 하며 역사의 흥망을 함께 해왔다. 그러나 지금은 모든 시름을 뒤로한 채 허물어진 성벽과 더불어 인적 드문 깊은 숲에 홀로 고즈넉이 들어앉아 있다. 대웅전에 걸려있는 커다란 북과 백골(白骨)같은 보제루는 치열했던 시절을 말해주는 상징물로 남아, 찾는 이를 맞아준다.
〔가람배치〕
교룡산성 동문을 들어서 300m 정도 산길을 오르면 선국사에 이른다. 선국사로 가는 길 좌우에는 예전에 온갖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자취가 아련하다. 비교적 완만한 산길을 오르다 보면 허물어질 듯한 돌담을 경계로 요사인 관음전(觀音殿)이 눈에 들어온다. 관음전을 오른쪽을 끼고 돌면 남원시내를 굽어보는 보제루(普濟樓)가 동남향으로 서 있다.
보제루와 관음전 사이의 좁은 길을 올라서면 선국사의 중심 불전인 대웅전(大雄殿)이 우뚝 서 있다. 보제루와 대웅전 사이의 중정에는 오른쪽 산비탈 쪽으로 인접한 곳에 석조미륵불입상과 미륵불상 시주자의 공덕을 새긴 동참비가 세워져 있고, 대웅전 앞에는 500여 년의 세월을 지켜온 배롱나무와 칠층석탑이 서 있다. 대웅전의 왼쪽으로는 한 단 높은 곳에 위치한 삼성각(三聖閣)이 관음전을 내려다보고 있다.
〔교통정보〕
버스편
남원시내에서 내척동을 거쳐 서남대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호성병원 앞 삼거리에서 내린다. 이곳에서부터 교룡산성 입구까지는 1.5km 정도 걸어서 가야 하며, 다시 교룡산성 동문 입구에서 300m 정도 숲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선국사에 닿는다. 남원시내에서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며, 교룡산성 입구까지 요금은 3천원 정도이다.
승용차편
1. 88고속도로 남원 IC를 나와 우회전하여 시내로 진입한 후 첫번째 사거리에서 직진하여 순창방면(만복사지)으로 1km 정도 가면 길 오른쪽에 남원고속주유소가 있는 오거리가 나온다. 오거리에서 오른쪽 주유소 옆으로 난 길을 따라 600m쯤 가면 작은 다리를 지나 두 갈래로 길이 나뉘는데, 왼쪽 길로 접어들어 만인의총을 지나 조금 가면 다시 두 갈래길을 만나게 된다. 여기서 왼쪽 길을 따라가면 교룡산성 아래에 있는 교룡산 국민관광단지 주차장에 닿는다. 승용차는 주차장을 지나 산성 동문 앞까지 갈 수 있으나 대형버스는 이곳에 주차를 해야 한다. 남원고속주유소 앞에서 교룡산성 동문까지는 약 3.3km이고, 교룡산성 동문 입구에서 300m 정도 숲길을 따라 더 올라가면 선국사에 닿는다.
2. 전주를 거쳐 남원으로 올 경우에는 서남대학교를 지나 은하수주유소 앞 3거리에서 만인의총 방면으로 우회전한다. 계속 직진하다보면 KBS와 남원향교를 지나 만인의총 앞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 다시 우회전해서 가다가 교룡산성 아래에 있는 교룡산 국민관광단지 주차장에 닿는다. 교룡산성 동문 입구에서 300m 정도 더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선국사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