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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문성식 2015. 6. 28. 03:14

조선왕조실록 세계 최대 단일왕조 역사서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조선왕조실록은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한,<br>인류 역사상 단일왕조 역사서로서 가장 규모가 큰 책입니다.

여러분들은 조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요? 혹시 당쟁만 일삼고 여성들을 억압한 문제 많은 왕조라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나요? 당쟁을 하거나 여성을 억압한 건 우리 선조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전근대 시대에는 모든 나라가 그랬습니다. 이런 보편적인 사실을 조선에만 들이대는 것은 자학적인 태도입니다.

기록유산으로는 세계 6위, 아시아 1위의 우리나라

조선은 그렇게 간단한 나라가 아닙니다. 아니, 한글과 같은 세계 최고의 문자를 만들어낸 왕조가 어떻게 그렇게 형편없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조선을 보는 눈을 달리 해야 합니다. 조선은 물(物)이 아니라 문(文)으로 접근해야 하는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사치를 하거나 기념비적인 건물을 세우는 등의 화려한 문화를 뽐낸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대신 조선은 문자나 역사기록 같은 ‘문’에 치중한 국가입니다. 문이란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문자나 활자, 역사기록, 철학 등 인문적인 것 모두를 말합니다. 조선은 이 면에서 세계 최고입니다. 이것은 이제 보게 될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인조대 무인년간의 사초(仁祖戊寅史草).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실록은 아시다시피 유네스코가 선정한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현재 9개의 항목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어 있습니다. 이미 본 코너를 통해 살펴본 직지고려대장경, 그리고 실록, 승정원일기,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의궤, 동의보감, 일성록, 5.18 민주화운동 기록물이 그것인데, 이 가운데 6개가 조선의 것입니다. 이것만 보아도 조선이 얼마나 문에 뛰어난 국가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기록유산의 숫자로 볼 때 우리나라는 세계 6위를 점하고 있고 아시아에서는 1위입니다. 그런데 일본은 세계기록유산이 아예 하나도 없답니다. 더더욱 놀라운 것은 우리가 중국도 능가했다는 사실입니다(중국이 보유한 세계기록유산은 5개). 이것은 모두 조선이 문에 치중한 문화를 만들어낸 덕일 겁니다. 그러니 조선은 세계 최고의 문화국가라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중에 우리가 볼 실록은 단연 빼어납니다. 실록은 한 마디로 인류 역사상 단일왕조 역사서로서 가장 규모가 큰 책입니다. 태조부터 철종까지 472년간의 역사를 기록했으니 말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300년 가는 것 자체가 힘든데 조선은 500년 이상 갔을 뿐만 아니라 그 기간의 역사까지 꼼꼼하게 기록한 것입니다. 이런 일은 세계 역사에 전무후무한 일입니다. 중국에도 명(明)실록이니 청(淸)실록이니 하는 게 있지만 유네스코에는 하나도 선정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알면 우리의 실록이 얼마나 뛰어난 기록유산인지 알 수 있습니다.

권력의 견제 역할로서의 ‘기록하기’

세종 실록에 실린 악보.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처: 국가기록원 부산지원>

저는 TV 사극을 거의 보지 않습니다. 사실 왜곡이 너무 심해서 그런데, 예를 들어 사극을 보면 왕이 신하들과 독대하는 장면이 많이 나옵니다. 그런데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로써 조선의 왕은 원칙적으로 실록을 적는 사관(史官)이나 승정원일기를 적는 주서(注書)와 같은 기록자가 없이는 어느 누구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정치술로 왕의 모든 언행을 적게 함으로써 왕권을 견제하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됩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던 옆에서 다 적고 있고 그것이 후대에 영원히 남는다면 어느 누가 함부로 말을 하겠습니까? 매사에 신중할 수밖에 없겠지요? 그런데 생각해보십시오. 여러분들이 아침에 일어나서부터 웬 사람이 계속해서 여러분들의 언행을 기록하고 있다면 얼마나 스트레스가 많겠습니까? 이렇게 생각해보면 조선에서 왕 노릇 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한번은 태종이 사냥을 가는데 사관이 또 따라붙은 모양입니다. 태종이 “놀러 가는 것이니 올 필요 없다”고 하자 그 사관은 변복을 하고 쫓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사관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관이 소신껏 기록한 것을 왕은 볼 수 없었습니다. 만일 왕이 이것을 볼 수 있었다면 사관이 유교적인 기준에 따라 엄격하게 왕의 언행을 판단내릴 수 없었겠지요. 이게 춘추필법이라는 것인데 사관은 이 기준에 따라 왕이 유교의 윤리에 맞게 정치를 하는지를 판단해 적게 됩니다. 한번은 세종대왕이 자기 아버지인 태종에 대해 쓴 기록을 보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그런데 신하들이 그 부당함을 고하자 어진 세종은 단념하고 맙니다. 그 뒤로는 어떤 임금도 대놓고 실록을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연산군조차 이 실록에는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서 무서운 것은 사관뿐이다”라고 했답니다. 그 역시 자신이 패륜적인 짓을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것이 후대에 전해져 자신의 악명이 길이 남을까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조선은 바로 이런 자세로 정치를 했기 때문에 500년 이상을 간 것입니다. 이렇게 공정한 역사 기록을 통해 정치를 잘하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이 기록에는 사관의 이름을 남겨놓지 않았습니다. 익명성을 보장받은 것이지요. 만일 사관이 자신의 이름을 적어야 한다면 후환이 두려워서 누가 사실(事實 혹은 史實)을 있는 그대로 적으려 하겠습니까? 그런데 안타깝지만 이 정책은 100% 지켜지지는 않았습니다. 압력 때문에 사관의 이름을 적는 경우가 더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객관성, 공정성, 익명성을 유지한 조선의 실록

어떻든 우리의 실록은 이와 같이 역사기록으로서 객관성이나 공정성, 익명성이라는 부문에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세계기록유산이 된 것입니다. 동북아 삼국 중 일본은 이런 역사 기록이 아주 일천한 반면, 중국은 이런 기록 시스템을 처음으로 만들어놓고도 제대로 가동시키지 않았습니다.

정종실록의 표지 사진.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소장처: 국가기록원 부산지원>

예를 들어 어떤 황제는 사관 제도를 제멋대로 없애버린 적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조선의 왕들은 그 기록들을 보지 못한 반면 중국의 황제들 가운데 일부는 보고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지우라고 명하기도 했답니다. 게다가 중국의 실록은 그냥 손으로 썼기 때문에 알아보지 못하는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실록은 단 4부를 만들면서도 아름다운 활자를 만들어 찍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도대체 어떤 나라가 문화국가인지 아시겠지요?

우리 실록과 관련해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임진왜란 때 소실될 뻔한 것을 선비 두 분이 구해냈다는 것입니다. 임난 전 이 실록은 도성을 비롯해 4 군데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임난 때 전주에 있는 것 빼고 모두 소실되고 맙니다. 사실 전주에 있는 것 역시 소실될 운명이었는데 ‘안의’와 ‘손홍록’이라는 선비 두 분이 내장산 속으로 피신시켜 간신히 살아남습니다. 이 두 분이 세계유산을 살려내신 것이지요. 이 두 분이 안 계셨다면 실록은 ‘세계최대 단일왕조 역사서’라는 이름을 가질 수 없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의 교과서에는 이 두 분을 기리기는커녕 언급조차 없습니다. 고려대장경을 구해내신 김영환 대령님과 더불어 이런 분들을 하루빨리 우리의 문화영웅으로 모셔야 하겠다는 생각입니다.

최준식 이미지
최준식 | 이화여대 국제대학원 교수
서강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템플대학에서 종교학을 전공하였다. 한국문화와 인간의식 발달에 관심이 많으며 대표 저서로는 [한국인에게 문화는 있는가], [한국의 종교, 문화로 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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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편찬위원회 제공 http://sillok.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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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처: 국가기록원 부산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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