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95.jpg 완귀 안증 선생이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안증 선생은 인종이 세자로 있을 때 학문을 가르쳤던 중종 때 학자이다. 명종 1년(1546)에 지은 집으로 안채·사랑채를 비롯하여 여러 채의 건물로 구성되었다.

사랑채는 안증의 호를 따서 완귀정이라 이름하였는데 숙종 21년(1695) 성재 안후정이 지은 건물이다.

신청인(申請人)의 기록(記錄)에 따르면 중종시(中宗時) 대청원사서(待請院司書), 설서(設書) 등을 역임(歷任)한 안증(安贈)이 밀양(密陽)에서 옮겨오면서 창건(創建)한 집을 효종 4년(孝宗四年)(1563)에 중수(重修)하였다 한다.

완귀정(玩龜亭)은 금호강(琴湖江)의 지류(支流)인 호계천(虎溪川) 기슭에 남향(南向)한 자리를 골라 고정(古定)하였다. 지금도 그 개울에는 물이 있고 붕어가 노닌다고 하나 활기찬 개울로는 보이지 않는다.

5096.jpg 완귀정(玩龜亭)은 사랑채의 당호(堂號)이며 정면3간(正面三間)에 측면3간(側面三間)의 팔작기와지붕 반륙(半陸)의 누사(樓사)이며 그 서(西)쪽에 있는 부속가(副屬家) 식호와(式好窩)는 정면5간(正面五間) 측면2간(側面二間) 맞배지붕의 집이나 북단일간(北端一間)은 누(樓)처럼 꾸며졌다.

완귀정(玩龜亭) 일곽(一郭)은 토병(土병)으로 둘러쌓여 있고 협문(挾門)을 통하여 정침(正寢)에 드나들게 되었고 정침(正寢)에도 방형(方形)의 일곽(一郭)이 구성되어 역시 토병(土병)으로 쌓았다. 각구(各區)는 대문(大門)이 각각 있어서 출입(出入)하게 되었다. 안채에는 행랑채가 대문 좌우로 설비되어 있다.

완귀정(玩龜亭)으로 들어가는 대문(大門) 안에 이르면 반듯한 내정(內庭)에 당도한다. 약간(若干)의 왜색(倭色)이 가미(加味)된 조원(造園)이 대부분(大部分)을 차지한 내정북변(內庭北邊)에 남향(南向)한 건물(建物)이 있어 완귀정(玩龜亭)이 된다.

정면좌우(正面左右)로 보이는 어간(御間)의 문비(門扉)가 조화(調和)를 이룬 아름다움에 취(醉)하여 문을 열고 들어서며 대청(大廳)이 전개(展開)된다.

대청(大廳)은 완귀청좌우(玩龜廳左右) 협문(挾門)의 각(各) 일간방(一間房)을 제외(除外)한 전역(全域)을 차지하고 있어 매우 넓직한 맛이 짙다.

방(房)의 측벽(側壁)에는 쪽문이 달려 광창(光窓)처럼 쓰이게 되었다. 머름바친 것은 정면문비(正面門扉)와 동일(同一)하다.

측벽(側壁)에서 보면 이 방문과 그것에 이웃하는 마루와는 머름높이에 낙차(落差)가 있다. 그 낙차(落差)의 꾸밈은 묘미(妙味)를 얻은 득의(得意)한 표현(表現)으로 그 기법(技法)은 주목(注目)할 만하다.

대청(大廳)은 후면벽(後面壁)과 측면(側面)은 판벽(板壁)이며 바라지 창(窓)이 달려있다. 바라지창 밖으로 난간이 둘러졌고 난간 학자각(鶴子脚) 아래 누주(樓柱)가 높직하게 버티고 섰다.

좌우단(左右端)의 누주(樓柱)는 팔각주(八角柱)이나 내진(內陣)의 평주(平柱)는 환주(丸柱)인데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집은 반(半)은 육축(陸築)과 기반(其半)은 누사(樓사)로 꾸며지는 당정형(塘亭形)을 따르고 있다.

완귀정(玩龜亭) 서편(西便)에 동향(東向)한 건물(建物) 일동(一棟)이 있어 식호와(式好窩)라 편액(扁額)하였다. 정면5간(正面五間)과 중앙3간(中央三間)은 방(房)이고 좌우단(左右端) 각(各) 일간(一間)은 누(樓)가 되어 우물마루를 깔았다. 시영(詩詠) 등의 소연(小宴)을 베풀기에 알맞은 공간(空間)이다. 남북(南北)에 이는 청(廳)은 계절(季節)이나 달의 유무(有無)에 따라 쓰임이 선택(選擇)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풍류(風流)를 사랑하는 마음이 주인(主人)은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남북루(南北樓)중 북루(北樓)는 완귀정(玩龜亭)과 마찬가지로 누사형(樓사形)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북벽(北壁)이 완전(完全)히 개방(開放)되었는데 흐르는 개울이 면하(眠下)에 있다.

정침(正寢)이 있는 안채의 일곽(一郭)도 정침(正寢)과 대문행랑(大門行廊)채와 외양간이 부속건물(附屬建物) 1동(棟)이 있는 반듯한 방형(方形)의 대지(垈地)로 이루어졌다.

정침(正寢)과 완귀정(玩龜亭)이 있는 사랑채와의 사이에 낮은 토병(土병)이 있어 구획(區劃)되었고 여기에 사주간(四柱間)이 있어 출입(出入)하게 되었다.

대문(大門)이 있는 행랑(行廊)채는 지붕이 한가지로 구성되었다. 대문(大門)이 솟을이 아니다.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집 토호(土豪)의 제택(第宅)의 소박성(素朴性)이 여기에도 보인다.

대문(大門) 행랑(行廊)채는 줄로 판벽(板壁)이 있는 곳간(庫間)으로 구획(區劃)되어 있다. 원래 이것이 중문(中門)이고 그 외곽(外郭)에 대문(大門)채가 또 있어야 격(格)이 맞을 터인데 세거(世居)하는 후손(後孫)들은 별도(別途)의 대문(大門)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고 한다.

이 점은 매우 의심스럽다. 원래의 모습이 지금과 같았었는지 정침(正寢)과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門)을 중문(中門)으로 삼는 대문(大門)채의 1동(棟)이 있었던 것인지의 여부는 다시 탐색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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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자료 20-1

완귀정

숙종 21년(1695) 성재 안후정이 수리한 사랑채이다. 앞면은 1층으로 되어 있으나, 뒷면은 누마루 형식으로 꾸며 호계천을 향하여 누를 두었다

민속자료 20-2

식호와

완귀정(玩龜亭) 서편(西便)에 동향(東向)한 건물(建物) 일동(一棟)이 있어 식호와(式好窩)라 편액(扁額)하였다. 정면5간(正面五間)과 중앙3간(中央三間)은 방(房)이고 좌우단(左右端) 각(各) 일간(一間)은 누(樓)가 되어 우물마루를 깔았다. 시영(詩詠) 등의 소연(小宴)을 베풀기에 알맞은 공간(空間)이다. 남북(南北)에 이는 청(廳)은 계절(季節)이나 달의 유무(有無)에 따라 쓰임이 선택(選擇)되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풍류(風流)를 사랑하는 마음이 주인(主人)은 대단하였던 모양이다.

남북루(南北樓)중 북루(北樓)는 완귀정(玩龜亭)과 마찬가지로 누사형(樓사形)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북벽(北壁)이 완전(完全)히 개방(開放)되었는데 흐르는 개울이 면하(眠下)에 있다

민속자료 20-3

정침

완귀정(玩龜亭)으로 들어가는 대문(大門) 안에 이르면 반듯한 내정(內庭)에 당도한다. 약간(若干)의 왜색(倭色)이 가미(加味)된 조원(造園)이 대부분(大部分)을 차지한 내정북변(內庭北邊)에 남향(南向)한 건물(建物)이 있어 완귀정(玩龜亭)이 된다.

정면좌우(正面左右)로 보이는 어간(御間)의 문비(門扉)가 조화(調和)를 이룬 아름다움에 취(醉)하여 문을 열고 들어서며 대청(大廳)이 전개(展開)된다.

대청(大廳)은 완귀청좌우(玩龜廳左右) 협문(挾門)의 각(各) 일간방(一間房)을 제외(除外)한 전역(全域)을 차지하고 있어 매우 넓직한 맛이 짙다.

방(房)의 측벽(側壁)에는 쪽문이 달려 광창(光窓)처럼 쓰이게 되었다. 머름바친 것은 정면문비(正面門扉)와 동일(同一)하다.

측벽(側壁)에서 보면 이 방문과 그것에 이웃하는 마루와는 머름높이에 낙차(落差)가 있다. 그 낙차(落差)의 꾸밈은 묘미(妙味)를 얻은 득의(得意)한 표현(表現)으로 그 기법(技法)은 주목(注目)할 만하다.

대청(大廳)은 후면벽(後面壁)과 측면(側面)은 판벽(板壁)이며 바라지 창(窓)이 달려있다. 바라지창 밖으로 난간이 둘러졌고 난간 학자각(鶴子脚) 아래 누주(樓柱)가 높직하게 버티고 섰다.

좌우단(左右端)의 누주(樓柱)는 팔각주(八角柱)이나 내진(內陣)의 평주(平柱)는 환주(丸柱)인데 자연석(自然石) 주초(柱礎) 위에 세워져 있다.

이 집은 반(半)은 육축(陸築)과 기반(其半)은 누사(樓사)로 꾸며지는 당정형(塘亭形)을 따르고 있다

민속자료 20-4

행랑채

대문(大門)이 있는 행랑(行廊)채는 지붕이 한가지로 구성되었다. 대문(大門)이 솟을이 아니다. 벼슬하지 않은 선비의 집 토호(土豪)의 제택(第宅)의 소박성(素朴性)이 여기에도 보인다.

대문(大門) 행랑(行廊)채는 줄로 판벽(板壁)이 있는 곳간(庫間)으로 구획(區劃)되어 있다. 원래 이것이 중문(中門)이고 그 외곽(外郭)에 대문(大門)채가 또 있어야 격(格)이 맞을 터인데 세거(世居)하는 후손(後孫)들은 별도(別途)의 대문(大門)채가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은 바 없다고 한다.

이 점은 매우 의심스럽다. 원래의 모습이 지금과 같았었는지 정침(正寢)과 사랑채로 들어가는 문(門)을 중문(中門)으로 삼는 대문(大門)채의 1동(棟)이 있었던 것인지의 여부는 다시 탐색되어야겠다

민속자료 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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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속자료 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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