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67.jpg 고려 제23대 고종의 능으로 1259년 6월에 고종이 사망한 뒤 3개월 뒤인 9월에 축조되었다. 원래 능역은 3단의 축대로 이루어져 제일 아래에 정자각(丁字閣), 제2단에 석인(石人)이, 그리고 최상단에 왕릉(王陵)이 배치된 형식이었다.

1919년의 조사에 의하면 원분은 직경이 4미터 남짓한 작은 규모였으나 봉토 아랫부분에 호석(護石)(병석(屛石))이 3판 정도 남아 있었으며, 능 주위에 난간으로 두른 돌 일부가 남아 있었다고 전한다. 능의 네 모서리에는 석수(石獸)가 한 마리씩 배치되어 있었으나 없어졌고, 현재는 석인(石人) 두쌍만 남아 있다. 최근 난간을 보수하고 봉토 아랫부분에 호석도 설치하였으나 원형이 많이 손상되었다.

고종(高宗)(1192-1259)은 강종(康宗)의 맏아들로 이름은 철이다. 1212년(강종 1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어머니는 원덕태후 유씨(元德太后 柳氏)이고, 비는 제21대 희종(熙宗)의 딸인 안혜태후(安惠太后)이다. 1213년 즉위하여 1259년 69세로 사망할 때까지 46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재위하였다.

왕이 즉위할 당시에는 최충헌(崔忠獻)이 정권을 잡고 있었는데, 고종 6년(1219)에 그가 죽자 아들 최이(崔怡)(우(瑀))가, 그후에는 그의 자손인 최항(崔沆)과 최의(崔誼)가 잇달아 권력을 계승하였다. 고종 45년(1258)에 유경(柳璥)·김준(金俊) 등이 최씨정권의 마지막 실력자인 최의를 죽임으로써 정권은 일단 국왕에게 돌아가게 되었다. 그러나 정치적 실권은 여전히 무인들이 장악하고 있었다. 왕의 재위기간은 대외적으로도 북방민족이 침입하여 어려움이 계속되었는데 고종 13년(1216)에는 거란족이 침입하자 김취려(金就礪) 조충(趙沖) 등이 이를 격퇴하였다. 고종 18년(1231)에 몽고족이 쳐들어오자 당시의 실력자 최이는 이듬해 서울을 강화(江華)로 옮겨 강도(江都)라 부르면서 몽고와의 전면 장기전을 채택하여 이후 28년간을 항쟁하였다. 몽고는 이 기간 동안 6차례나 고려에 침입하면서 국토를 황폐화시키고 인구와 재산에 막대한 손실을 입혔다. 귀중한 문화재도 많이 손실되었는데 특히 경주(慶州) 황룡사 구층탑(皇龍寺 九層塔)과 현종(顯宗) 때에 간행한 대구 부인사(大邱 符仁寺) 소장의 ≪대장경판(大藏經板)≫이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고려는 부처의 도움으로 난국을 타개하기 위하여 고종 24년(1236)부터 고종 38년(1251) 사이에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고 강화도에서 대장경을 조판하였다. 이것이 현재 합천 해인사(陜川 海印寺)에 남아 있는 정교하기로 유명한 이른바 ≪고려대장경(高麗大藏經)≫이다. 산성(山城)이나 해도(海島)로 피난간 농민들이 성을 지키며 몽고와 용감히 싸우고 있는 동안, 강화에 들어간 귀족들은 안전한 환경 속에서 호사스런 생활을 계속해 나갔다. 이러한 속에서 국왕과 문신들을 중심으로 하여 몽고에 대한 강화의 여론이 일어나게 되고, 마침내 최씨정권을 몰락시킨 문신 유경과 무신 김준 등은 몽고에 대한 강화를 결정하기에 이르렀다. 그 결과 다음해인 고종 46년(1259)에 태자 전(후일의 원종(元宗))이 몽고로 가서 강화의 뜻을 표시하고, 항쟁을 단념한다는 표시로 강도의 성곽을 헐어버렸다. 그러나 고종은 이 해에 사망함으로써 강화에 묻히게 되고, 그의 능은 홍릉(洪陵)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후 원종 11년(1270) 마침내 무인정권이 몰락하면서 고려는 개경으로 환도하였고, 강화에 반대하는 삼별초(三別抄)의 항쟁에도 불구하고 몽고와의 기나긴 전쟁은 끝이 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