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 남산(南山)의 서쪽 삼릉계곡(三陵溪谷) 입구에 송림(松林)으로 둘러싸여 있다. 원형봉토분(圓形封土墳)으로 지름 13.8m, 높이 4.2m이다. 봉분만 있을 뿐 다른 시설은 보이지 않으며 전면(前面)에 놓인 상석(床石)은 최근에 설치된 것이다.
신라 제55대 경애왕(景哀王)(재위(在位) 924-927)은 본명이 박위응(朴魏膺)이고, 경명왕(景明王)의 동생이다. 재위기간은 신라 말기의 가장 혼란한 시기였다. 서기 927년 11월에 왕은 포석정(鮑石亭)에서 비빈(妃嬪)·종척(宗戚)들과 연회를 하고 있던 중 신라 왕경(新羅 王京)으로 침입한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에게 사로잡혀 협박에 의해 자진(自盡)하였다고 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경애왕(景哀王)을 남산(南山) 해목령(蟹目嶺)에 장사지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해목령(蟹目嶺)은 지금의 경애왕릉에서 2㎞ 정도 떨어져 있어 맞지 않으며, 해목령(蟹目嶺) 가까이에 있는 지금의 일성왕릉(逸聖王陵)을 경애왕릉(景哀王陵)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