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연개소문(淵蓋蘇文

문성식 2010. 10. 4. 17:21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극과 극을 달린다.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임금을 죽인 역적이며, 고구려의 멸망을 초래한 장본인으로 기록한 반면,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위대한 혁명가로, 박은식은 [천개소문전]에서 독립자주의 정신과 대외경쟁의 담략을 지닌 우리 역사상 일인자로 평가했다. 유교사상의 지배를 받던 조선시대까지 왕을 죽이고 나라를 망친 인물로 평가받았으나, 민족의 자주정신이 요구되던 20세기 자주적인 혁명가로 재인식된 것이다.

 

 

정권을 장악하다

642년 가을,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수도, 장안성 남쪽에서 대대적인 군대 사열식을 개최했다. 술과 음식이 성대히 차려지고 많은 귀족이 초대받았다. 화려한 식이 거행되던 중 연개소문의 신호를 받은 부하들은 순식간에 100여 명의 귀족을 처단했다. 그리고 그 길로 궁으로 달려가 고구려 제27대 왕인 영류왕을 시해하고는 시신을 몇 토막으로 잘라 시궁창에 던져버렸다. 정권을 장악한 연개소문은 영류왕의 조카를 새로운 왕으로 삼아 보장왕이라 하고, 자신은 인사권과 군사권을 총괄하는 막리지에 올랐다.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과 연개소문의 갈등은 연개소문이 정계에 등장할 무렵부터 시작되었다. 연개소문의 아버지는 동부대인 겸 대대로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다. 대대로는 고구려 최고의 관직으로 지금의 총리에 해당된다. 대대로는 귀족회의에서 선출되는데, 부자상속이 가능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사망하면서 연개소문이 그 직위를 계승하고자 하자 대부분의 귀족이 반대하고 나섰다. [삼국사기]에서는 그의 성품이 포악하고 잔인했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 문제가 됐던 것은 당나라에 대한 견해 차이였다.

 

당태종 이세민이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구축하려는 팽창정책을 쓰면서 고구려와 당나라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런 당나라에 대해 영류왕을 비롯한 귀족들은 굴욕적인 저자세 외교로 일관했다. 포로로 잡혀 있던 수나라 군사 1만 명을 당나라의 요구에 따라 조건 없이 송환했고, 왕세자를 당에 보내 조공을 하기도 했다. 어쨌든 한창 성장하는 당나라와의 전쟁은 피하자는 입장이었다.


고구려를 침공한 당태종 이세민, 고당전쟁에서 연개소문
에게 패한 후 얻은 병으로 사망하였다.
<출처 : Yug at ko.wikipedia.com>

 

반면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이라는 세계관, 그리고 30여 년 전 수나라의 침략을 물리친 자부심을 가진 고구려의 무장 세력들은 이런 영류왕의 정책에 반발했다. 연개소문의 집안은 대당 강경파의 선봉이었다. 게다가 어릴 때부터 지략과 재주가 뛰어나다는 칭송을 받은 이십 대의 혈기왕성한 연개소문은 당시 집권층에게 매우 위험한 인물이 아닐 수 없었다.

 

정치적 소수파였던 연개소문은 대대로의 직위를 임시로라도 맡겨줄 것을 간청하며, 만일 자신이 적합하지 않다고 여겨지면 그때 해임되더라도 후회하지 않겠다고 머리를 굽혀 겨우 아버지의 직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막상 대대로에 오른 뒤에도 강경한 태도를 바꾸지 않아 영류왕과 귀족들은 그를 매우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제거하려는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이 정보를 먼저 입수한 연개소문이 선수를 친 것이다.

 

 

당태종 이세민과의 대결

연개소문이 권력을 장악한 직후, 신라의 김춘추가 찾아와 군사 지원을 요청했다. 김춘추는 백제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진 신라를 도와달라고 했다. 보장왕은 “고구려의 옛 땅인 한강 유역을 돌려주면 구원병을 보내겠다.”라고 대답했다. 보장왕 뒤에 선 연개소문의 의견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한강 유역을 돌려주면 구원병을 보내주겠다는 말은, 신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이었다. 연개소문도 신라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신라 대신 백제를 파트너로 선택했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 연개소문은 이후 백제와 동맹을 맺고 신라를 공격했고, 한반도에서 고립된 신라는 당나라에 도움을 요청했다.

 

한편, 당태종은 중원을 장악하고 나서 돌궐을 복속시키고, 서역의 고창국을 멸망시키며 천하통일의 야망을 하나씩 실현해가고 있었다. 동북아시아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한 고구려는 그가 넘어야 할 마지막 산이었다. 그런 그에게 연개소문의 반역 사건은 좋은 빌미가 되었다. 여기에 신라마저 도움을 요청하는 상황이었다. 당태종은 고구려에 사신을 보내 신라에 대한 공격을 당장 중지하고, 만일 다시 신라를 공격한다면 고구려를 공격하겠다고 통보하는 등 신라를 빌미로 고구려를 압박했다. 연개소문이 그 말을 들을 리 없었다.

 

644년 마침내 당태종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며 고구려 정벌을 선포했다.
“연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대신들을 살육했으며, 그 백성을 참혹하게 대하더니 지금 또 나의 명령을 위반하고 이웃 나라들을 강제로 침략하니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명분일 뿐이었다. 중국 역사서를 살펴보면, 당태종은 연개소문이 집권하기 전부터 몇 차례나 고구려 정벌의 뜻을 드러내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 중심의 천하를 꿈꾸는 이세민에게 고구려는 제압해야 할 상대였고, 여기에 반발하는 연개소문과의 충돌은 피할 수 없는 대결이었다.

 

이렇게 고당전쟁이 시작되었다. 요하 강을 건넌 당나라 군사들은 개모성을 점령하고 요동성을 함락시켰다. 전쟁 초반에는 당나라의 공세가 성공적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거센 반격을 통해 신성, 건안성 등을 지켜내며 당나라 군사의 발길을 묶었고, 전쟁이 장기전으로 접어들면서 차츰 승기를 잡아갔다. 시간이 지날수록 당나라 군사들은 고립되고 굶주렸다. 그리고 마침내 5개월에 걸친 안시성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고구려군은 당나라 군사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당태종이 퇴각할 때 연개소문이 그 뒤를 쫓아서 만리장성을 넘어 당나라로 쳐들어갔다고 하는데, 현재로서는 근거를 찾기 어렵다. 퇴각하는 길에 병을 얻은 당태종은 이후 직접 군대를 이끌지 못한 채 고구려를 공격하라는 명령만 내리다가 결국 성공하지 못하고 649년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그 명령에 따라 당나라는 647년, 648년 계속 고구려를 침입했으나 연개소문이 이끄는 고구려군은 번번이 이를 물리쳤다.

 

 

그의 죽음 뒤 고구려는 멸망에 이르고 

1923년 중국 하남성 낙양 북망에서 출토된 고구려 말기의 대대로인 연개소문의 맏아들 남생의 묘지인 천남생묘지. 당나라에 투항하여 묘가 중국에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NIKH.DB-fl_004_002_000_0001)


분명 전쟁에서는 계속해서 당나라 군사들을 물리쳤지만, 당시 국제 정세는 고구려에 불리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고구려의 동맹국이었던 설연타가 멸망했고, 거란과 신라는 당나라와 더 밀착했다. 반면 당은 서역과 북방 지역에 대한 지배력을 더욱 확고히 하며 그 세를 확장시키고 있었다. 그리고 660년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고구려를 고립시키고 나서,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까지 공격했다. 연개소문이 직접 전투에 나선 고구려는 당군 전원을 몰살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후 665년 연개소문이 죽을 때까지 당나라는 더는 고구려를 공격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은 후계자를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 그의 후계자가 된 큰아들 남생이 동생들과의 권력 다툼 끝에 당나라에 투항하였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자, 이 기회를 놓치지 않은 나당연합군의 공격에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다.

 

연개소문은 뛰어난 군사지도자로서 고당전쟁을 승리로 이끌었고, 강력한 리더십으로 동북아시아를 지배하던 강한 고구려를 이끌었다. 하지만, 당시의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읽어내지 못해 외교적으로 고립되고, 후계자를 제대로 기르지 못했다는 비난은 여전히 그를 따라다니고 있다.

 

 

 

윤희진/역사저술가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역사 인물을 찾아내고, 왜곡된 인물들의 참모습을 찾아내는 일에 관심이 많다. [한국사 인물이야기] [제왕의 책] [고추장 담그는 아버지] 등의 책을 썼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이미지 제공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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