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막한 달밤에 칼머리의 바람은 세찬데/칼끝에 찬 서리가 고국생각을 돋구누나/삼천리 금수강산에 왜놈이 웬말인가/단장의 아픈 마음 쓰러버릴 길 없구나.
-장군의 시 단장지통(斷腸之痛)- | |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
백야(白冶) 김좌진(1889. 11. 24 ~ 1930. 1. 24)장군은 1889년 음력 11월 24일 충남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에서 김형규(金衡圭)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문충공 김상용(金尙容)이 장군의 11대조이며 안동 김씨 수북공파의 시조인 광현(光炫)이 장군의 10대조가 된다. 장군의 집안은 많은 재산과 노비를 소유한 부호였다고 한다. 그러나 장군이 3세 되던 해 부친상을 당해 편모슬하에서 성장하였고 13세 되던 해에 형 경진(景鎭)이 김덕규(金德圭)의 양자가 되어 서울로 떠난 후 실질적인 가장으로서 집안 살림을 떠맡게 되었다. 장군은 유년시절 글공부보다는 활쏘기, 말타기, 병정놀이를 즐겨 했는데 동네아이들과 병정놀이를 할 때는 항상 대장 노릇을 하였다. 특히 병정놀이 때에는 대장기에 “억강부약(抑强扶弱)”이라고 썼다고 한다. 즉 ‘강한 것은 누르고 약한 것은 돕는다’는 뜻을 유년시절부터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장군은 삼국지, 수호지를 통달할 정도로 읽었으며 군사학에 관련된 책을 탐독하였고 무술연마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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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런 강직한 성격 이면에는 약한 자를 돕는다는 생각이 항상 자리 잡고 있었다. 장군은 남루한 옷을 입은 친구를 보면 자신의 옷과 바꿔 입고 들어오는 경우가 많았으며, 거지를 보면 밥을 먹이고 자신을 옷을 입혀 보냈다고 한다. 장군은 유년시절 김광호(金光浩), 김복한(金福漢)으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김광호 선생과의 만남은 장군에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것은 장군이 앞으로 계몽운동과 독립운동을 함께 할 김석범을 만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김석범은 고향인 홍성을 떠나 여러 해 동안 서울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당시 대한제국의 상황을 자세히 알고 있었고, 계몽의식을 소유한 인물이었다. 장군이 일찍이 계몽의식을 갖게 되는 데에는 그의 영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장군은 김복한으로부터도 사사를 받았다. 김복한은 1895년부터 1896년에 걸쳐 전개된 홍주의병의 총수였으며 을사조약 반대항쟁과 1919년 파리장서운동에 참여하는 등 전 생애를 항일운동에 바친 애국지사였다. 장군은 김복한으로부터 의리정신과 민족수호정신을 배웠으며 그것은 이후 항일투쟁을 전개하는 정신적 기반이 되었다. | |
무관학교 졸업 후 고향에서 호명학교 설립, 계몽운동에 힘쓰다
장군은 구국운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먼저 자신의 집에서 거느리고 있던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집안에는 30여 명의 노비가 있었다고 한다. 장군은 1905년 집안의 모든 노비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인 후에 노비문서를 불태우고,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전답을 노비들에게 무상으로 분배하였다. 장군은 노비해방을 단행한 후 무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상경하였다. 그 이유는 어려서부터 군사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정식으로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서였다. 장군이 무관학교에 재학하던 시절은 대한제국이 일제의 준 식민지 상황이 되면서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던 시점이었다. 당시 서울에서는 계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장군은 계몽운동을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기회를 가졌을 것이다. 1907년 장군은 김항규, 김홍진 등과 함께 자진하여 상투를 잘랐다고 한다. 이는 서울에서 생활하면서 당시 대한제국이 처한 상황을 직시하게 되었고, 국권회복운동에 전념하기 위한 의식의 변화였다고 볼 수 있다.
무관학교를 졸업한 후 장군은 다시 홍성으로 귀향하였다. 귀향하게 된 이유는 몸소 체험한 계몽운동을 홍성에서 직접 실현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귀향 후 먼저 시작한 것은 바로 교육운동이었고, 그 결실이 호명학교의 설립이었다. 호명학교의 교명은 “호서지역을 밝게 한다"는 것으로 호서지역을 개명(開明)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었고, 개화와 신학문에 대한 교육을 목적으로 갖고 있었다. 장군은 혼자 교사(校舍)를 마련하고 학교를 설립하는 것에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이미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켰고 전답들도 노비들에게 분배한 상태였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어려웠을 것이다. 하여 장군은 안동김씨 문중에 도움을 요청했고 문중의 도움으로 호명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다. 호명학교는 홍성지역의 젊고 유능한 학생들에게 개명과 부강을 교육하였고, 신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을 학생들에게 교육하였다. 학생 수는 1908년 당시 100여 명에 달할 정도의 규모였으며 1908년부터 소학과와 중등과로 나누어 가르쳤다. 또한 법률전문과를 설치하는 등 홍성지역에서 사립학교 설립을 주도할 정도였다. 한편 장군은 1909년 기호흥학회 홍주지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기호흥학회는 경기도와 충청도의 학문증진과 민중계몽을 위해 1908년 1월에 조직되었으며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사업은 교육사업이었다. 홍주지회는 1909년 1월 16일에 인가를 받았는데 장군을 비롯해 회원이 50여 명에 달하였다. 이처럼 장군은 경술국치 이전 교육사업과 계몽운동에 전념하면서 기울어져 가는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 |
장군의 서신. 1901년 7월 23일 스승에게 올린 안부의 편지이다.
경술국치 후 본격적인 항일투쟁운동 시작
장군은 1910년 일제에 의해 조선이 강점되자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주로 군자금 모집과 대한광복회 활동이었다. 장군은 1910년을 전후해 이창양행(怡昌洋行)이라는 위장상점을 차려 항일운동의 근거지로 삼는 한편, 신의주에 염직회사를 차려 해외와의 연락거점으로 삼았다. 이창양행은 서울 관수동에 있었으며 의병들과의 관계로 인하여 일본경찰의 수색을 받기도 하였다. 이창양행과 염직회사는 상점으로 위장한 독립운동의 근거지였다. 장군은 일제강점 후 국내에서 독립운동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서간도 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마련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문제는 군자금의 확보였다. 때문에 장군은 서울의 부호들을 대상으로 군자금 모집에 착수했는데, 이 사건으로 장군은 1911년 6월 2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다. 서대문형무소 수감은 장군에게 또 다른 인연을 제공하였다. 바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이후 대동단에서 활동하게 되는 전협과 최익환을 만난 것이 그것이다. 최익환은 만주 망명자금 마련 사건과 관련해 7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 수감 중이었고, 전협도 3년 형을 선고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 중이었다. 전협과 최익환은 이미 의기투합에 만주에서 활동하기로 결의하고 각자 활동하던 중 서대문형무소에서 다시 만난 상황이었고, 장군도 이때 서대문형무소에서 수감생활을 했던 것이다. 장군과 전협은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 결의형제를 맺었다고 하며, 최익환과는 만주로 망명하기 전까지 함께 활동하였는데 그 계기가 바로 서대문형무소 수감 중에 이루어졌던 것이다.
장군은 1913년 9월 출감하였으며 홍성으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전개하다 다시 홍성헌병대에서 10개월 수감되기도 하였다. 홍성헌병대에서 풀려난 후에는 1910년대 국내 독립운동단체 중 가장 규모가 크고 활동범위가 넓었던 대한광복회에 가입해 활동하였다. 대한광복회는 만주에 부사령을 상주시켜 국내조직과의 연계를 통해 독립군을 양성하는 책임을 맡겼는데 초기에는 이진룡이 부사령에 임명되었고, 이진룡이 피체된 후에는 장군이 그 책임을 맡아 파견되었다. 장군은 만주로 파견되기 이전 국내에서 광복회를 혁신 강화하는 모임에 참여하는 한편 평안도, 황해도지부원들과 함께 활동하기도 하였다. 또한 1915년 길림광복회를 조직하는 모임에도 참석하였다. 이처럼 장군은 만주로 파견되기 전 대한광복회 내에서 많은 활동을 했는데, 주로 군자금모집이었다. 장군은 1915년 11월 최익환과 함께 경북지역에서 군자금모집을 추진하다가 피체되기도 하였다.
한편 만주로 망명하면서 장군은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조국독립의 의지를 다졌다.
칼머리 바람이 센데 관산 달은 왜 밝은가 칼끝에 서릿발 차가워 그리운 고국이여 삼천리 무궁화동산에 왜적이 웬 말이냐 내 쉬임 없이 피 흘려 싸워 왜적을 물리치고 진정 님의 조국 찾고야 말 것이다 | |
대한군정서에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며 간부 양성에 힘쓰다
장군은 길림에서 대한독립의군부에서 활동하면서 대한독립선언서에도 서명한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장군은 1919년 3월 중순 이후 길림군정사를 조직하였다. 길림군정사는 장군과 같은 군사전문가들이 중심이 되어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한 조직이었으나 이를 뒷받침해 줄 대중적 기반을 갖고 있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놓여있던 장군은 1919년 가을 대한군정서에 참여하였다. 대한군정서는 1911년 3월 대종교도들이 북간도지역에서 조직한 중광단에서 시작되었는데,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하여 조직적인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하던 단체였다. 대한정의단은 이를 위하여 비밀리에 독립군을 편성하고 부대원을 모집하였으며 산하단체로 대한군정회를 조직하는 등 무장투쟁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대한정의단의 주요인물들은 군사부문에 비전문가로서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 수 없었다. 대한정의단의 서일 총재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장군과 조성환 등 한말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군사전문가들이 많았던 길림군정사와 연합을 추진했던 것이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10월 군정부로 개편하였다가 임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명칭을 변경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장군은 사령부의 총사령관으로 대한군정서의 군사부문을 전담하게 되었다. 대한군정서의 중앙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누었으며 총재부는 대외업무 및 행정 업무를 담당하였고 사령부는 군사부문을 전담하였다. 장군은 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이장령, 나중소 등과 함께 대한군정서 독립군 양성의 중책을 맡게 되었던 것이다. 장군은 이를 위하여 1920년 2월초 사관연성소를 설치하였다. 이는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가장 시급한 문제였던 독립군 간부를 양성할 목적이었다. 또한 장군은 신흥무관학교의 도움으로 교관과 각종교재를 도움을 받았으며 서대파 십리평 산림지대에 병영을 마련하고 독립군 양성에 주력하였다. 사관연성소의 총책임은 사령관인 장군이 맡았으며 교관으로는 이범석, 김규식 등이 훈련을 담당하였다. 사관연성소는 역사, 군사학, 병기사용법, 부대지휘법 등을 교육하였으며 특히 민족정신 함양을 위해 역사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또한 엄격한 군기와 규율 속에서 군사훈련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사관연성소는 1920년 9월 제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으며 이들을 중심으로 300여명의 교성대를 조직할 수 있었다. 이때 조직된 교성대는 최정예 부대로서 이후 장군과 함께 일본군을 섬멸하는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의 주축이 된다. | |
장군의 판결문. 장군은 1911년 북간도에 독립군 사관학교를 설립하기 위해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발각되어 검거되었고 장군은 징역 2년 형에 처해졌다.
청산리 대첩의 승리 이끌어
3․1운동 직후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많은 독립군 부대들이 편성되어 국내진입작전을 감행하였으며 1920년 6월 7일에는 독립군을 추격해 들어온 일본군을 봉오동에서 홍범도, 최진동이 지휘하는 독립군연합부대가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하는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이에 일본군은 ‘훈춘사건’을 일으켜 독립군을 토벌할 목적으로 간도에 출병하였다. 독립군부대들은 일본군을 상대로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10월 21일 청산리 백운평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전투, 천수평전투, 어랑촌전투, 맹개골전투, 만기구전투, 쉬구전투, 천보산전투, 고동하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패시키고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것이다. 특히 장군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은 청산리대첩의 대표적인 전투인 백운평, 천수평, 어랑촌전투 등에서 큰 전승을 거두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끄는 주력부대였다.
청산리대첩 후 대한군정서의 서일 총재는 임시정부에 “김좌진 부하 600명과 홍범도의 부하 300여 명이 일본군 1300여 명을 격살”하였다고 보고할 정도로 일본군의 피해가 막대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청산리 전투는 한국독립군이 벌인 전투 중 가장 대표적인 전투였다. 또한 일본군의 간도출병을 저지시켰으며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전투였다. 이처럼 장군이 이끄는 대한군정서군이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은 사관연성소 졸업생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훈련이 잘 된 부대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총기 약 800정, 기관총 4정, 수류탄 약 2,000개, 박격포 2문을 갖추고 있어 무장이 구비된 정예부대였기 때문이었다. | |
궁극적으로는 국내로 진격해 독립을 성취하고자 했던 장군
장군은 청산리 전투 이후 북만지역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였다. 청산리전투 후 독립군부대들은 큰 시련을 겪게 되었는데, 그것은 봉오동과 청산리전투에서 타격을 받은 일본군이 독립군 부대 및 한인마을을 전멸시키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를 피해 러시아 국경지역으로 이동했던 독립군부대들은 자유시참변을 당하고 다시 북만지역으로 돌아와야 했다. 대한독립군단은 장군을 중심으로 한 공화주의 계열과 이범윤을 중심으로 한 복벽주의자 계열이 연합해 조직한 단체였다. 장군은 대한독립군단에서도 총사령관을 맡아 무력투쟁을 전개했으며 군자금 모집과 독립군 모집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편 대한독립군단은 1925년 북만지역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단체들과 통합을 추진하여 신민부를 조직하였다. 신민부는 무장활동, 교육 및 홍보활동, 산업활동 등 자치활동을 통해 한인동포들의 생활향상에 주력하였다. 신민부가 이러한 활동을 추진한 것은 무장투쟁을 전개하기 위해서 재만동포들의 절대적인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장군은 신민부를 조직하는데 선도적 역할을 하였고 총사령관 및 군사부위원장으로 군사부문의 책임을 맡았다. 또한 무장투쟁의 선구자로 신민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장군은 신민부를 통해 무장투쟁을 위한 기반을 마련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의무금과 모연금을 모집해 독립자금으로 활용하였다. 또한 신민부는 대한군정서 사관연성소와 마찬가지로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양성을 추진하였다. 신민부는 성동사관학교 졸업생을 바탕으로 정규군을 구성해 5개의 보안대와 그 통제를 받는 별동대를 두었으며 이는 신민부 무력투쟁의 근간을 이루었다. 장군은 성동사관학교 부교장으로 활동하였으며 총사령관으로서 보안대와 별동대를 자신의 휘하에 두고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신민부는 1928년 민정파와 군정파로 분열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결국 해제하게 된다. 장군은 군정파가 해체된 후 북만지역으로 이동해 1929년 7월 한족총연합회를 결성하였다. 이는 1917년 러시아 혁명 이후 만주지역에서 급속도로 전파되고 있었던 공산주의 사상과 대항하기 위해 무정부주의 이념을 수용한 결과였다. 장군은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과정에서 일관되게 대종교적 민족주의를 추구하였다. 그러나 공산주의사상에 대처하고 재만동포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무정부주의 이념을 수용했던 것이다. 장군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국내에 계속해서 밀사와 공작대를 파견했다. 1925년 3월에 신민부원을 파견해 조선총독을 암살을 계획했으며 특수공작대를 국내에 파견해 국내의 작전지도 등을 작성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장군이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하면서도 국내에 밀사와 군대를 파견했던 것은 궁극적으로 조선의 독립은 국내로 진격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며 평생을 조국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장군은 영안현 일대 동포들의 생활안정을 위해 중동선 산시역 부근에 설치한 금성정미소에서 고려공산당 청년회원인 박상실이 쏜 흉탄을 맞고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 |
장군의 사회장 당시 모습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발행일 2010.1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