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제27대 덕만(德曼)은 시호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이고, 성은 김씨이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632년에 왕위에 올라 16년간 나라를 다스렸다. 법흥왕 무렵부터 성골만이 왕위에 오르게 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어, 법흥 이후 직계후손으로 불리는 진흥·진지·진평으로 이어졌지만, 진평에게는 아들이 없어 왕위 계승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여는 기회였는지 모른다. 성골 계승의 틀이 강력히 잡힌 상황인데다, 비록 아들이 아니었지만, 선덕은 천성이 맑고 지혜로웠다. 그런 그에게 첫 여왕의 영예가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여왕으로서 받는 정치적인 위험성은 컸고, [화랑세기]에 따르면 두 명의 남자와 세 번에 걸쳐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아이를 낳지 못했다. 강력한 신라로 가는 갈림길에 선 왕으로서 선덕은 어떤 고민을 하였고 어떤 왕정을 펼쳤을까. | |
남편 복은 없었던 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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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위서(僞書)의 혐의를 벗지 못하고 있지만, [화랑세기]에는 선덕여왕이 두 사람과 세 번 결혼했다고 적혀 있다. 두 사람이란 용수(龍樹)와 용춘(龍春) 형제이다. 이들은 모두 25대 진지왕의 아들인데, 아버지가 죽고 사촌인 진평왕이 26대 왕으로 즉위한 뒤, 형인 용수는 진평의 딸 천명 공주와 일찌감치 결혼하였고, 용춘은 진평의 후계로 거의 결정된 다음의 선덕(덕만) 공주와 결혼하였다. 사실 용수를 사위로 맞을 때 진평은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었다. 그러나 선덕이 자라면서 ‘용봉(龍鳳)의 자태와 천일(天日)의 위의를 지녀’ 천명에게 용수가 왕에 오르는 것을 양보하라 명령하였던 것이다.
용춘과 선덕 사이에는 아이가 없었다. 그래서 용춘은 스스로 물러났다. 이때 진평왕은 용수에게 선덕을 모시라고 하였다. 이미 천명과 결혼했는데도 말이다. 선덕의 두 번째 결혼이다. 그러나 용수와의 사이에도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이 사이에 용수는 죽으면서 첫 부인 곧 천명 공주와 아들을 용춘에게 부탁한다. 이 아들이 바로 김춘추이다. 선덕은 왕으로 즉위하자 다시 용춘을 남편으로 맞아들인다. 도합 세 번째, 같은 사람과는 두 번째 결혼이다. 그런데도 아이가 없어 용춘은 다시 한 번 스스로 물러났는데, 그 뒤 선덕이 다시 결혼을 했는지는 [화랑세기]에도 기록이 없다. 비록 용봉과 천일 같은 여자로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여왕이 되었지만, 선덕에게 남편 복과 자식 복은 없었던 것 같다. | |
용수와 용춘에 대해서는 기록에 따라 엇갈린다. [삼국사기]에서는 각기 다른 사람으로 나오는 경우가 세 군데이고, 한 군데는 같은 사람이라 하였다. [삼국유사]에서는 한 사람으로 보았다. [화랑세기]의 기록을 믿는다면, 용수가 죽으며 용춘에게 부인과 아들을 맡겼으므로, 김춘추를 기준으로 후대 사람들에게 두 사람이 같은 이처럼 보이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다른 한편, [삼국유사]에서는 ‘왕력’ 편에 선덕여왕의 배필이 음갈문왕(飮葛文王)이라 하였다. 아마도 용춘을 그렇게 부른 것 같다.
그렇다면 선덕은 자신과 오촌간인 진지왕의 두 아들과만 결혼한 셈이다. 진지왕은 형인 동륜태자가 일찍 죽자 왕위에 오를 수 있었는데, 행실이 좋지 않고 나랏일을 잘 보지 못한다 하여, 불과 이십 대 후반의 나이에 왕위에서 쫓겨나 죽은 이이다. 이런 비극적인 아버지를 둔 이들이 용수와 용춘이다. 아마도 그들이 아직 어린 나이에서였을 것이다. 사실 일찍 아버지를 여읜 용수∙용춘 형제야말로 비극적인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 그런 그들을 사촌인 진평왕은 어떻게 보았기에, 왕위를 물려줄 만큼 믿는 딸 선덕의 사위로 차례차례 삼았을까. 더구나 용수는 처음에 천명에게, 다음에는 다시 선덕에게까지 장가 들이면서 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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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대에 완공된 것으로 알려진 황룡사와 9층 목탑 복원 모형, 황룡사는 고려시대 몽골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렸다. | |
성골이라는 아리송한 신분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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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골품제(骨品制)라는 신분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골(骨)과 품(品)으로 나뉘고, 귀족인 골과 중간관리 계급 이하인 품은 건널 수 없는 신분의 벽으로 막혀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잘 알려져 있다. 골은 다시 성골과 진골로 나뉘며, 품은 1에서 6까지 있는데 육두품이 그중 위이다. 이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성골과 진골을 나누는 기준이다.
이 기준에는 아직 학계에 정설이 없다. 지금까지는 흔히 성골은 부계와 모계가 모두 순수한 왕족이고, 진골은 한쪽만이 왕족인 것으로 구별하였다. 그러나 김춘추는 양계가 다 왕족인데도 진골이라 부른다. 진골로서 최초의 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왜 진골일까? 가야 출신인 김유신의 동생 문희와 혼인하여 성골의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이란다. 그러나 이것은 입증할 근거가 부족하다. 그러므로 양계 혈통만으로 성골과 진골의 차이를 설명할 수 없다.
성골은 진평왕 때에 와서야 성립된 개념이라는 주장이 있다. 진지왕은 형이 죽자 형의 아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왕에 올랐다. 그러나 4년 만에 폐위된다. 그러자 형의 아들이 비로소 적자 자격으로 왕에 오른다. 바로 진평왕이다. 진평왕은 이후 왕위 계승에서 자신의 직계에 힘을 실어주기 위해, 직계를 중심으로 하는 울타리를 성골이라는 개념으로 튼튼히 쳤다는 것이다. 이는 장자 세습이라는 제도가 서 있지 않은 상황에서 왕위 계승의 안정화를 꾀하려는 노력의 하나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평왕 대에 시작했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고 보아, 같은 개념이기는 하나 그 범위를 좀 더 넓혀 보는 주장이 나오기도 하였다. 곧 신라 왕실이 안정화되는 법흥왕 때부터, 왕과 함께 왕궁에 사는 지근간의 왕족만 성골로 보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새 왕이 즉위하면 그를 중심으로 3~4촌 이내의 왕족만을 성골이라 부르고, 나머지는 강등되어 진골이라는 이름을 가진 채 왕궁 밖으로 거처를 옮긴다는 것이다. 이를 족강(族降)이라 부른다. (이종욱 지음, [신라의 역사]에서) 예를 들어 김춘추는 할아버지인 진지왕이 폐위되고 진평왕이 즉위하자, 새 왕과 오촌 간이 되어 진골로 내려앉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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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흥왕대의 성골집단, ⓑ진흥황대의 성골집단, ⓒ진지왕대의 성골집단, ⓓ진평완대의 성골집단(각 왕의 손·증손도 출생한 자는 성골집단에 속하였음)
<출처 : 이종욱 지음,[신라의 역사1]에서>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인다. 김춘추의 아버지인 용수 또는 용춘이 진평왕의 부마가 되었는데도 족강을 당하는 것일까? 아버지를 기준으로 하면 춘추는 진평과 5촌이 되지만, 어머니를 기준으로 하면 외손자인데 말이다. 성골은 참 아리송한 제도이다. | |
지혜로 위기를 극복했던 여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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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진 첨성대. 선덕여왕 16년에 세워졌다. <출처 : Zsinj at ko.wikipedia.com>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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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의 정확한 개념이 무엇이든 간에 ‘성골로만 왕위를 이어야 한다.’라는 강력한 분위기가 신라 왕실의 첫 여왕을 탄생시켰음은 분명하다. 누가 성골인지 왕실 안의 그들만은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선덕은 [화랑세기]가 표현한 대로 ‘용봉(龍鳳)의 자태와 천일(天日)의 위의’를 지녔고, [삼국사기]에서는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총명하고 민첩’한 이였다. 나라 사람들은 ‘성조황고(聖祖皇姑)’라고까지 했다. 시대의 분위기와 하늘로부터 받은 자질을 두루 갖춰 기회를 잡은 셈이다.
사실 여성으로 왕이 된 다음 선덕의 앞길이 평탄하지만 않았다. 왕이 된 지 11년 곧 642년에 백제와 벌인 대야성 싸움은 위기 중의 위기를 불러들였다. 이 전쟁에서 김춘추의 사위인 품석이 죽는다. 상대가 의자왕이었다. 급기야 선덕왕은 다음 해 당 나라에 사신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 바, 당 태종은 세 가지 방책을 제시하는데, 그 가운데 세 번째에는 “여왕이 재위하고 있으므로 이웃나라가 깔본다. 내 종친 한 사람을 보내 국왕을 삼고 군대를 파견하겠다.”라는 말까지 나온다. 사신은 신라 국정에 큰 영향을 끼칠 일이므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물러 나왔다. 비담을 상대등에 임명한 것이 15년, 하지만 이듬해 믿었던 상대등이 도리어 모반을 일으키고, 그 와중에 선덕은 최후를 맞는다.
그러나 선덕은 지혜의 여왕이었다. 선덕의 그 같은 장점을 가장 부각시킨 사람이 일연(一然)이었다. 일연은 그의 [삼국유사]에서 ‘선덕왕 지기삼사(善德王知幾三事)’라는 제목을 달아 극적으로 묘사하였다. 이 제목은 ‘선덕왕이 기미를 알아차린 세 가지 일’이라는 뜻이다. | |
첫 번째가 모란 이야기이다. 당 나라 태종이 붉은색∙자주색∙흰색의 세 가지 색깔로 된 모란 그림과 그 씨앗을 석 되 보내주었다. 선덕이 그림을 보더니, 꽃에 향기가 없을 것이라 했고, 뜰에 씨앗을 심어 꽃이 피고 열매 맺기까지 기다리자 과연 그 말과 같았다. 이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도 나온다. 다만 선덕이 아직 공주로 있을 때라고 못 박은 점이 다르다. 627년에서 631년 사이의 일이다.
두 번째는 옥문지(玉門池) 사건이다. 영묘사(靈廟寺)의 옥문지에서 겨울인데 한 떼의 개구리들이 모여 사나흘 동안 우는 것이었다. 나라 사람들이 괴상스레 여겨 왕에게 여쭈었다. 왕은 급히 각간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잘 훈련받은 병사 2천 명을 뽑아, 빨리 서쪽 교외로 가라. 여근곡(女根谷)을 물어, 거기 반드시 적병이 있을 것이니, 잡아 죽여라.”라고 명령하였다. 과연 여근곡이 있고, 백제 병사 5백 명이 거기 와서 숨어 있었다. 모두 잡아 죽였다. 이 또한 [삼국사기]에서 선덕왕 5년(636년)의 일로 기록되었다.
선덕은 이런 일을 어떻게 알았을까. 먼저 모란의 경우,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각기 다르다. [삼국사기]에서는, ‘대개 여자가 지극히 어여쁘면 남자가 따르고, 꽃에 향기가 있으면 나비와 벌이 따르는 까닭’이라 했고, [삼국유사]에서는 ‘꽃을 그리면서 나비가 없으니 거기 향기가 나지 않음을 알지요. 이는 곧 당나라 황제께서 내가 배우자 없이 지냄을 놀린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향기가 없다는 결과는 같지만, 그 까닭을 자연의 이치에 맞추어 일반화시킨 [삼국사기]에 비해, [삼국유사]에서 선덕은 자신을 놀리는 것으로 더욱 개인화해서 해석했다. 후자가 왠지 더 극적이다. | |
삼국유사와 삼국사기가 보는 선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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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디테일한 면에서 차이가 날지언정, 선덕을 지혜로운 왕으로 보자는 데에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가 다르지 않다. 그 지혜로 그나마 16년간 왕위를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두 책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인다.
[삼국유사]에서는 [삼국사기]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지혜로운 일을 소개하였다. 왕이 아직 병이 없을 때였는데 여러 신하에게,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짜에 죽으리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가운데 묻어 주시오.”라고 말한다. 신하들이 그곳이 어딘지 모른다며 장소를 묻자, 낭산(狼山)의 남쪽이라고 하였다. 신하들은 선덕이 죽은 뒤 그 유언대로 따라 하였는데, 그 뒤 문무왕(文武王)이 선덕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지었다. 그때가 정확히는 문무왕 19년(679년)이므로 선덕이 죽은 646년으로부터 33년 뒤의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갑자기 사천왕사가 왜 나오는가. 불교에서는 ‘사천왕천 위에 도리천이 있다’라고 말한다. 사천왕천을 상징하는 사천왕사가 지어졌으므로, 그 바로 위인 선덕의 무덤은 도리천이 되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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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선덕왕 지기삼사'를 통해 첫 번째로 언급한 모란 꽃 이야기를 통해, 선덕여왕의 지혜로움을 말하고자 했다. <출처 : KENPEI at ko.wikipedia.com> | |
다분히 불교적인 이 이야기 끝에 일연은 선덕을 영험하고 성스러운 왕이라고까지 치켜세운다. 사실 그가 선덕의 일생을 세 가지 지혜로운 일로 정리하고 있는 것 또한 의도된 바이다. 비록 정세가 불안한 가운데 왕위를 이었지만, 다른 모든 일을 제외하고 이 세 가지 사건만 기술하여, 일연은 선덕의 특징을 한마디로 지혜의 왕이라 규정지은 것이다. 마지막에 선덕이 첨성대를 건립하였음을 부기(附記)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요즈음 선덕의 모란을 가지고 여왕의 과민반응이라 말하는 연구자가 있다. 본디 모란에는 꽃과 나비를 그려 넣지 않는 법, 더욱이 당 나라 황제쯤 되는 이가 어찌 작은 나라 여왕 하나 놀려먹으려 그런 짓을 했겠는가, 그래서 이것은 혼자 사는 여자 선덕의 제 발 저리기 아니면 그림 그리는 법을 모르는 일연의 실수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해석에 그림 그리는 법을 끼워 넣어서 안 되고, 당과 신라라는 나라의 크기를 말해서 안 된다. 급박한 외교전이 펼쳐지노라면 하찮은 글자 하나라도 예리하게 판단해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이 작은 나라의 비운일지 모르지만, 큰 적을 대항하여 이기는 지혜이다. 일연은 선덕에게서 그 점을 높이 샀을 뿐이다. 그렇지 않았던 김부식은 선덕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다. “어찌 늙은 할미로 하여금 규방에서 나와 국가의 정사를 재단하게 하였는가. 신라는 여자를 붙들어 세워 왕위에 있게 했으니 진실로 난세의 일이며, 이러고서도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삼국사기]에서) 냉정하다. 무릇 역사는 그렇게 평가해야 한다지만, 이것은 냉정이 아니라 비하처럼 보여 읽기가 씁쓸하다. | |
- 글 고운기 / 연세대 국학연구원 연구교수
-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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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