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김홍일

문성식 2010. 10. 4. 15:36

"놈들의 발굽 아래 정의가 유린되고 민족으로서 혹은 인간으로서의 권리가 말살되는 이 마당에서 우리가 취할 길은 오로지 투쟁에 의해 국권을 회복하는 길밖에 없다고 나는 판단한 것이다. 또 일본 군국주의 세력의 파괴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역사가 우리에게 부여한 제일차적인 과업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러자면 한국인 스스로의 군비가 절실하게 필요하다는 사실을 나는 느꼈던 것이다. 나는 그제서야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의 내가 장차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를 확실히 깨달은 셈이다."

-선생의 회고록 [대륙의 분노] 중에서-

 

 

오산학교 졸업 후 독립운동 위해 상해로 망명

김홍일 선생(金弘壹, 1898. 9. 23∼1980. 8. 8) 은 평안북도 용천군 양하면 오송리에서 태어났다. 고향 동네에서 가장 큰집이 선생의 집이었다고 하니, 아마도 상당히 유복한 집안에서 성장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선생이 태어난 곳은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와 이웃하고 있었는데, 용암포는 1904년 2월 러일전쟁 당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한 곳이었다. 처음에는 러시아 군대가, 그들이 후퇴한 다음에는 일본군이 이곳을 군항으로 삼으며 주둔하였다. 이때 일제가 주둔하며 행한 만행을 목격한 선생은 비록 어린 나이었지만 강한 반일의식을 갖게 되었고, 민족의식에 눈을 뜨게 된다. 나아가 1905년 11월 강제 체결된 을사조약에 분개하고 원통해 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면서 선생은 반일 민족의식을 더욱 성장시켜 갔다. 당시의 개화 인사들은 을사조약에 따른 국권 상실의 위기 상황을 민족의 실력 결핍 탓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때문에 이들은 국권 회복을 위해서는 우선 민족의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며 실력 양성을 위한 계몽운동에 주력하고 있었다.


 

이러한 민족 사회의 열기는 선생의 고향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의 부친도 선대부터 경영하던 풍곡재(楓谷齋)라는 서재를 사립학교로 개조하여 민족 교육운동에 동참한 것이다. 선생도 이 학교에서 한학과 신학문을 수학하며 실력을 쌓아 갔다. 하지만 1910년 8월 경술국치를 당하자, 선생의 부친은 "왜놈의 통치하에 사느니보다는 자유를 찾아야겠다"고하여 가족과 함께 만주 봉천으로 이주하였다. 이에 따라 선생도 봉천에서 고등과정을 수학하다가 1914년 정주에 있는 오산학교 2학년에 편입하는데, 아마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민족교육을 받은 것으로 생각된다.

 

1918년 3월 선생은 오산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남강 이승훈의 권유와 알선으로 황해도 경신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였다. 이곳에서 선생은 오산학교 시절 배운 신지식과 열화와 같은 민족의식을 바탕으로 후진 양성에 온 정열을 쏟았다. 하지만 경신학교에서의 교직 생활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것은 선생이 비밀결사 조직 혐의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선생은 황해도 지역의 민족운동자들을 순방하면서 독립운동에 대한 그들의 의견을 구한 적이 있었는데, 일경은 이것을 꼬투리 삼아 선생을 체포한 뒤, 비밀결사를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기도한 것으로 몰아 갔다. 모진 고문 속에서도 혐의를 부인하여 다행히 석방은 되었지만, 이를 계기로 선생은 중국으로의 망명을 결심하였다. 선생은 "상해로 가서 본시부터 내가 원했던 중국 군관학교에 유학하여 일본 군국주의 세력과 맞서서 싸울 수 있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하여 선생은 일경의 눈을 피해 1918년 9월 신의주를 거쳐 상해에 도착하였다.

 

 

독립군에 합류, 병사들을 이끌고 시베리아행을 감행하다

중국 상해에서 선생은 신규식, 여운형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물론 중국 혁명가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그 가운데 선생은 1918년 육군강무학교에 입학하였고 이곳에서 일년간 근대식 군사교육을 받고 임관한 뒤 중국군 장교로 근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3·1운동의 영향으로 만주와 노령지역에서 독립군 항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자 선생은 이에 동참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리하여 1920년 11월 중국 군대를 나와 상해 임시정부를 찾아간 선생은 법무총장 신규식과 군무총장 노백린 등을 만나 독립군에 투신할 결심을 밝혔다. 당시 한국독립군은 청산리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지만, 이후 내부 갈등으로 침체기를 겪고 있었다. 바로 이러한 시기에 선생이 임시정부의 군무총장인 노백린을 찾아간 것이다. 이 때 노백린은 ‘흩어져 있는 독립군 및 그 지원자들을 모두 한곳으로 집결시키는 중’ 이며 집결의 목적지는 시베리아 자유시(自由市)라 하였고, 이에 선생은 그 자리에서 시베리아행을 결심하였다고 한다. 그것은 독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이나마 부득이 러시아의 지원을 얻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때문으로 이해된다.

 

중국의 장개석 총통과 김홍일 장군의 모습.


노백린으로부터 "첫째 이번 국제군 창설을 위해서 남·북만주와 국내에서 최대한으로 지원병을 모집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둘째 혹시 가는 도중에 독립군을 만나거든 그들을 한 곳에 모아 시베리아로 인솔하라"는 지시를 받은 선생은 1921년 상해를 떠났다. 이후 선생은 장백현에 아직 일부 독립군 부대가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고, 이들을 인솔하여 시베리아 이만으로 이동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리하여 그 해 3월 29일 장백산백의 밀림을 헤치고 안도현에 도착하여 의군부의 잔여 부대인 군비단을 찾아갔다. 선생은 이들에게 국제군 창설의 취지를 설명하고 이만으로 이동할 것을 제의하여 동의를 얻었다. 그리하여 선생은 4월 5일 이들을 이끌고 안도현을 떠나 시베리아로 가는 2천여 리의 대장정에 나섰다. 35일 간의 강행군 끝에 5월 10일 드디어 시베리아의 이만에 도착한 선생은 독립군 병사들을 각 촌락에 분산 배치하여 숙식, 훈련케 하면서 최종 목적지인 자유시로의 이동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때, 한국 독립군 역사상 최대의 비극인 자유시참변이 발생하였다. 자유시에 집결한 한인 독립군 부대의 통솔권을 둘러싸고 아군끼리 유혈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이로써 쌍방간에 대충돌이 발생하여 사상자가 속출하고, 대한의용군 부대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한국 독립군의 투쟁역량이 크게 훼손되고 말았다. 이러한 참변으로 말미암아 선생은 자유시로의 이동을 포기하고 계속해서 이만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때 대한의용군 지도부와 일부 독립군 부대가 피신해 왔고, 이들은 이만에 주둔하고 있던 독립군 부대와 연합하여 그 해 7월 '소·만 한국 독립군의 총연합'을 목표로 대한의용군사회를 조직하였다. 이 위원회의 위원장에는 김규면이 추대되었고, 그 무력인 대한의용군사령관에는 이준 열사의 장남인 이용이 선임되었다. 선생은 대한의용군 제2중대장에 임명되었고, 위원회가 설립한 무관학교의 교관으로 활약하기도 하였다.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며 독립운동가들에게 필요한 탄약 제공

그 해 9월 선생은 러시아 대사령관의 요청에 의해 사할린부대 출신의 독립군 병사 20여 명을 이끌고 니콜라예프스크로 갔다. 여기에서 선생은 적정 탐지활동은 물론 부하 병력을 이끌고 9월 23일 일본군 초소를 공격하여 12명의 적병을 몰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그리고 일본군의 사주를 받는 반혁명군인 백군과의 전투를 벌여 러시아혁명을 지원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일제가 시베리아 철병의 조건으로 노령 내의 한인 독립군 부대의 해산과 무장해제를 지속적으로 요구하자 러시아 정부는 볼셰비키 혁명의 완수를 위해 이를 수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당시 하바로브스크에 주둔하고 있던 선생의 독립군 부대도 결국 1922년 7월 20일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선생은 이만을 거쳐 다시 만주로 옮겨 갔고, 여기에서 동지들과 함께 1923년 9월 중학교를 세워 한 학기 동안 중국어와 수학, 그리고 체육을 가르쳤다. 그 후 선생은 1926년 10월 일본 헌병대의 촉수가 미치자 바로 그곳을 떠나 상해로 갔다. 이곳에서 선생은 다시 중국 국민혁명군에 들어가게 되었고, 혁명군 총지휘부 소령 참모로 북벌에 참여한 이래, 1927년 7월 절강성 수비 독립경비연대 부연대장 겸 제1대대장, 1929년 오송(吳淞)요새사령부 참모장을 거쳐 1931년에는 상해 병공창의 병기창 주임으로 근무하게 된다. 병기창 주임의 임무는 각종 병기와 탄약을 수집, 정리하여 각 군에 분배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선생은 약간의 권총과 수류탄 정도는 재량으로 언제든지 공급할 수 있었고, 이로써 한국 독립운동의 신기원을 열게 된 것이다.

윤봉길 의사 의거 시 폭탄 제조를 담당한 중국인 상차도(尙次導)와 함께(오른 쪽이 선생).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에 사용된 폭탄을 직접 제조하다

김구 선생과 김홍일 장군


이즈음 임시정부에서는 1923년 국민대표회의 이후 침체의 늪에 빠져 있던 독립운동의 새로운 돌파구와,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으로 야기된 한중 양 민족의 감정적 대립과 갈등을 해소하기 위한 특단의 방안을 강구하고 있었다. 그러한 요구는 그 해 9월 18일 일제의 만주침략 전쟁 도발을 계기로 더욱 고조되었다. 1931년 11월 임시정부의 별동대로 김구에 의해 조직된 한인애국단과 그에 의한 암살, 파괴 활동이 바로 그 같은 요구를 반영한 것이었다. 특히 이봉창 의거는 이러한 한인애국단에 의한 최초의 거사였다. 이봉창 의사는 1932년 1월 8일 동경 경시청 앞에서 신년 관병식(觀兵式)을 마치고 돌아오던 일왕 히로히도(裕仁)에게 수류탄을 던졌다. 이때 던진 수류탄이 바로 김구의 요청에 의해 선생이 마련하여 제공한 것이었다. 하지만 일왕을 암살하려고 한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것은 애석하게도 수류탄을 던진 거리가 너무 멀었고, 또 폭발 위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실패를 거울 삼아 선생은 보다 가벼우면서도 강력한 파괴력을 지닌 폭탄 제조에 나섰고, 그 결실이 바로 윤봉길 의거의 성공이었다. 윤봉길 의거를 위해 김구는 선생을 찾아와 의거에 사용할 도시락과 물통형 폭탄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였다. 그것은 이 날 행사장에는 도시락과 물통, 그리고 일본 국기만을 가지고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생은 김구에 요구에 따라 당시 포탄창 주임에게 도시락과 물통 폭탄을 만들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완성된 뒤에는 김구를 모시고 병공창에서 시험까지 하여 완벽한 폭탄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4월 29일 윤봉길 의거가 성공할 수 있었으니, 이에 대한 선생의 공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특히 윤봉길과 이봉창 의거를 계기로 중국 조야(朝野)의 여론은 한국 민족의 독립운동을 지지하고 후원해야 한다는 데로 모아졌다. 그 결과 중국 국민당 정부의 재정적 지원과 군사적 협조를 얻게 되어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 독립운동은 그간의 침체 상황을 불식하고 아연 활기를 띠게 되었으니 말할 나위도 없는 것이다.

 

 

김구 주석의 요청으로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취임

선생의 지원과 후원은 임정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32년 10월 의열단 단장 김원봉조선혁명군사정치군관학교을 세워 독립투사를 양성할 때도 선생은 그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특히 1933년 김구와 장개석의 회담 결과 중국 군관학교에서의 한국 독립군 장교 육성 계획이 실현되었고 이에 따라 1934년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되어 운영되었는데, 이때 선생은 한인특별반의 운영을 총괄한 김구를 도와 한국 청년들을 독립군 장교로 육성하는데 힘썼다. 나중에 이들이 한국 광복군의 핵심 요원으로 성장한 것을 보면, 선생이 그 발판을 마련한 것으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나아가 1937년 12월에는 김원봉이 이끌던 민족혁명당의 청년 당원 83명이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성자분교의 특별훈련반에 입학하자 선생은 이들의 교관 노릇을 하였다. 그리고 이듬해 5월 선생은 소정의 교육을 마친 청년당원들을 인솔하여 무한(武漢)으로 이동시켰고, 이들이 그 해 10월 김원봉을 사령으로 조선의용대를 조직하는데도 힘을 보태 주었다. 그리하여 조선의용대원들이 중국 각 전구(戰區)에 배속됨에 따라 한중 연합작전을 통한 본격적인 대일 무력투쟁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한편 선생은 1939년 5월 대령에서 소장으로 진급함과 동시에 중국 제19집단군 총사령부의 참모처장으로 영전하였다. 하지만 중국군에서 복무하면서도 선생은 광복군에 대한 지원과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선생은 한국광복군을 중국군사위원회에 귀속시켜 통합 지휘하려는,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군으로서의 자주성을 훼손하는 '한국광복군행동 9개 준승(準繩)'의 고리를 풀기 위해서도 노력하였다. 그리하여 그것이 풀린 뒤 선생은, "바야흐로 우리 조국을 위해 가장 좋은 기회가 찾아 왔으니 한시도 지체할 것 없이 중국군에서 손을 떼라"는 김구 주석의 권유로 중국군에서 나와 광복군 참모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1945년 6월 1일 광복군 참모장에 부임한 뒤, 선생은 김구 주석과 지청천 사령관을 도와 미국 전략정보국(OSS)과 합작하여 진행되던 독수리 작전(Eagle Project)에 힘을 쏟았다. 이는 미국전략정보국의 지원 아래 광복군 요원을 잠수함이나 항공기로 국내에 투입시켜 적정을 탐지하고 공작 거점을 확보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작전 계획은 광복군 요원들이 OSS 교육훈련을 마치고 국내 침투를 기다리던 중 일제가 항복함에 따라 실현되지 못하였다.

 

해방 이후 선생은 다시 중국군에 복귀하게 되었다. 선생은 1945년 11월 동북보안사령부 고급참모 겸 한교사무처장에 취임하여 재만 한인동포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면서 귀국 편의를 도모하는데 앞장섰다. 1948년 8월 귀국한 뒤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선생은 육군사관학교와 육군참모학교 교장, 시흥지구전투사령관, 육군 제1군단장, 육군종합학교 총장 등을 역임하고 1951년 중장으로 예편하였다. 그 후 외무부 장관, 국회의원, 신민당 당수 등으로 활약하면서 조국의 근대화와 민주화에도 기여하다가 1980년 8월 8일 사망하였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광복 후 제1군단장 시절. 평택지구에서 포항 탈환 작전을 지휘할 당시의 모습. (1950년).

약력

1921 연해준에서 대한의용군사회 참모
1932 이봉창, 윤봉길 의거에 폭탄제공, 한국독립당 재정부장
1945 대한민국 임시정부 군무부 차장 겸 한국 광복군 참모장

 

 

 

자료 제공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채순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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