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과 역사

원광

문성식 2010. 10. 4. 15:38

 

원광(圓光)의 ‘세속오계’는 뜻하는 바가 구체적이고, 유교와 불교의 덕목을 합치하였으며, 신라에서 나라의 스승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의의가 있었다. 특히 세 번째의 이 오리지널리티야말로 무엇보다 자랑스럽다. 우리 역사에서 이만한 가르침의 덕목은 원광 이전에 만든 이가 없었고 이후에도 없다. 그런 그는 신라의 고유 신앙과 불교의 접목이라는 신라 불교의 특징을 만들어냈다. 일연은 한 마디로 ‘원광이 길을 연 것’이라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길을 연 민족의 스승 원광이다. 

 

 

'세속오계'를 만든 나라의 스승

스님을 뜻하는 글자로 사(師)를 쓴 것은 이미 중국에서 시작한 전통이다. 좀 더 높여서 대사(大師)라는 말이 생기거니와, 이밖에 승계를 정할 때 왕사(王師)니 국사(國師)가 나오고, 선종의 승려에게는 선사(禪師)를 따로 쓰기도 하였다. 그밖에 법사(法師), 율사(律師), 성사(聖師) 등도 결국 ‘사’를 바탕으로 만든 말이다.

 

‘사’란 곧 스승이다. 스승이 여러 종류이지만, 스님에게 스승이란 뜻의 이 글자를 쓴 것은 스님의 역할 가운데 무엇보다 교육적인 그것을 중요시 여긴 까닭이라 하겠다.   

 

우리나라에서도 이 같은 전통은 불교가 수입된 이후 바로 시작되었다. 그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이가 원광이다. 그는 단지 불교만이 아니라 뭇 사람의 사표(師表)가 될 만한 일을 했기 때문이다. 바로 세속오계(世俗五戒)를 두고 하는 말이다.

 

원광이 세속오계를 만든 경위는 [삼국사기] 열전에 나온다. 김부식은 열전 가운데 귀산(貴山)에 대해 썼는데, [삼국유사]도 이를 인용하며 좀 더 자세한 소식을 전해 준다. 귀산은 사량부(沙梁部) 사람인데, 같은 마을의 추항(箒項)과 함께 ‘사군자(士君子)와 더불어 지내기로 하면서, 먼저 마음을 바로 하고 몸을 닦지 않는다면 욕되게 되지 않을까 두려우니, 현명한 이의 곁에서 도(道)를 묻자’고 다짐한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현명한 이’에게서 ‘도를 묻자’는 의도였다. 여기서 ‘현명한 이’로 ‘원광법사’가 선택된다. 원광은 그들에게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불교에는 보살계가 있고 따로 열 가지가 있다. 자네들은 남의 신하가 된 몸으로 감당할 수 없을 듯싶다. 그래서 세속오계를 주노라. 첫째, 임금을 섬기되 충성으로 할 것이요, 둘째, 부모를 섬기되 효성스럽게 할 것이요, 셋째, 친구와 사귀되 믿음으로 할 것이요, 넷째, 싸움에 나가서는 물러서는 일이 없을 것이요, 다섯째, 산 것을 죽이되 가려 해야 할 것이다. 자네들은 이를 행하고 소홀히 하지 말라.”

 

 

정확하지 않은 생몰연대

그렇다면 원광은 누구인가? [삼국유사]에서는 당 나라의 [속고승전(續高僧傳)]에 실린 원광의 전기를 가져왔다. 그 첫 대목에 “신라 황룡사의 승려 원광(圓光)은 속성이 박(朴)씨이다. …… 집안이 해동에서는 대대로 뿌리가 깊었으며, 타고난 그릇이 넓디넓고 글짓기를 좋아하였다”는 소개가 나온다. 기실 이 소개만으로 원광의 자세한 출생담을 알기 어렵다. 그나마 [삼국사기]에서는 진평왕 11년(589) 3월, 진(陳)에 들어가 불법을 탐구하였다는 소식밖에 알려주지 않는다. [삼국유사]는 [속고승전] 외에 [수이전]을 통해 그의 생몰연대를 추정할 자료를 나열하였는데, 연대 차이가 많이 난다. 이를 표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삼국사기

속고승전 

수이전

유학

진평11(589)

25세에 도중(渡中), 오월(吳越)에서 공부를 마치고 589년 수(隋)의 서울로 감. 

34세(589) 

귀국

× 

×

45세(진평22 : 600)

사망

× 

99세
①건복58 : 636

②정관14 : 640

84세(639)

생년(추정)

× 

①536

②541

556 

 

이 표에 따르면 그의 태어난 해와 죽은 해는 세 가지로 나뉜다. 누린 해도 99세와 84세로 두 가지이며, 99세가 되는 해에 대해 두 가지 설이 있다. 심지어는 정관 4년을 [삼국유사]에서 일연이 14년으로 고쳐놓고 있지만, 그래도 다르기는 마찬가지이다. 결론은 자세하지 않다는 것이다. 심지어 일연조차 마지막에 “정관(貞觀) 연간에 나이 80여 세로 돌아가셨다”는 두루뭉술한 표현으로 마감하고 만다.

 

 

바람난 공주의 아들

이런 와중에 [화랑세기]의 기록이 또 다른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뜻밖에 이 책은 원광의 아주 자세한 출생담을 남겨 놓았다. 그는 바로 [화랑세기]의 저자 김대문의 큰할아버지인 것이다.

 

김대문의 집안은 제1세 풍월주 위화랑으로부터 화려한 화랑 집안의 전통을 만들었다. 이에 대해서는 앞서 김대문을 소개하며 자세히 설명하였다. 여기서는 원광의 탄생까지를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  

 

위화랑의 아들 이화랑은 준실 부인이 낳았다. 준실 부인은 수지공의 누이이고 자비왕의 외손으로 얼굴이 예쁘고 문장을 잘하였다. 부인은 처음에 법흥왕의 후궁이 되었다. 그러나 아들이 없었다. 결국, 왕을 떠나 위화랑과 결혼하였다. 거기서 낳은 아들이 이화랑이다. 이런 결혼이 성립하는지 우리로서는 자세히 알 길이 없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화랑세기]를 진본으로 믿는다면, 신라 왕실의 특이한 결혼 풍속을 확인할 뿐이다.

 

이화랑 또한 얼굴이 잘생기고 문장을 잘하였다. 그래서 지소태후가 총애하여 항상 곁에서 모시고 있게 하였다. 지소태후는 법흥왕의 부인이다. 태후에게는 숙명공주라는 딸이 있었다. 이 딸이 이화랑을 좋아하여 둘이 함께 도망하여 아들을 낳았다. 이이가 바로 원광이다. 그러므로 원광은 바람난 공주의 아들인 셈이다. 또 다른 아들이 보리공인데, 김대문의 할아버지이다. 그러니까 원광은 김대문의 큰할아버지가 된다.

 

여기까지는 위화랑에 대한 기록에서 뽑은 것이다. 이화랑 대목에 가면 우리는 바람난 공주의 보다 자세한 정황을 알 수 있다. 숙명공주는 본디 진흥왕에게 시집을 갔다. 태후의 후견을 업고 왕의 총애를 받았는데, 그것을 믿고 제멋대로 굴더니 태자를 낳아 황후로 봉해지자 더욱 꺼리는 바가 없었다. 그런데 공주의 눈길이 이화랑에게 꽂히고 말았다. 남몰래 이화랑과 자주 만나더니 덜컥 아이를 갖고 말았다. 왕이 숙명공주의 침실에 간 적이 없었는데도 임신하였으므로 누구의 아이인지는 자명했다. 드디어 숙명공주는 이화랑과 함께 도망하였던 것이다.

 

진흥왕으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사실 숙명공주를 향한 그의 마음은 진정한 사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도리어 이로 인해 마음의 상처를 받은 이는 어머니의 바람기로 태어난 아들 원광이었나 보다. 원광의 출가는 이런 출생의 비밀과 왠지 이어져 보인다.

 

 

생각을 푸른 하늘에 두고

생몰연대 등은 불명확하지만 원광의 유학한 때는 기록마다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삼국유사]가 말한 진평왕 11년(589)을 기준 삼을 수 있으며, 이때의 나이는 [수이전]에서 말한 34세가 근사할 것 같다. [속고승전]에서는 25세에 진(陳)에 도착하였다고 하나, 이어 남쪽 지방인 오월(吳越)에서 공부를 마치고 589년 북쪽 지방의 공부를 하기 위해 수(隋)의 서울로 왔다고 했는데, 589년을 34세로 보아 무리가 없을 듯하다.

 

원광의 공부는 화려하기 그지없다. 그는 먼저 도교와 유교를 두루 섭렵하고, 경전과 역사서를 함께 연구하여, 명성이 벌써 유학하기도 전에 신라에서는 높았다. 그러나 학문의 본토로 가고 싶었다. 스스로 우물 안 개구리라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장엄사(莊嚴寺) 민공(旻公)의 제자에게 공부하면서 원광은 근본적인 변화를 보인다. “평소 세상의 경전에는 익숙해 이치를 궁구하는 데는 신통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불교 공부를 하자 도리어 썩은 풀 같았다”는 것이다. 그는 불교에 귀의한다.

 

“[성실론(成實論)]과 [열반경(涅槃經)]을 터득해 쌓은 것을 마음속에 두고, 삼장(三藏)의 불교론을 두루 찾아 탐구하였다. …… 염정(念定)을 이어 나가고 각관(覺觀)을 잊지 않아 …… 4함(含)을 두루 섭렵하고 8정(定)에 공을 들여, 세상의 선함을 쉽게 풀이하고 정직한 마음에 어그러짐이 없었다.” ([삼국유사]에서)

 

이는 원광이 공부한 차례이다. 가장 기본적인 경전의 공부에서부터 수행에 이르기까지 빠짐이 없다. 염정은 정념(正念)과 정정(正定)을 합친 말이다. 참된 지혜로 정도를 생각하고 산란해지지 않는 상태들이다. 각관의 각(覺)은 총체적인 사고, 관(觀)은 분석적인 사고를 이른다. 그리고 4함은 4아함경의 준말이다. 아함경은 일체의 소승불경이다. 8정은 팔선정(八禪定)의 준말이다. 색계의 4선정과 무색계의 4공정(空定)을 합친 것이다. 이만한 공부가 이루어졌으니 생각을 푸른 하늘 위에 두고 세상일에서 멀리 떠나고자 했다. 아예 귀국하지 않고 중국에서 살려 결심했다.

 

 

신라불교가 여기서 시작하다

그러나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치자 제 나라에 가서 도를 펼쳐야겠다고 생각을 바꾸었다. 특히 본국에서도 멀리 소문을 듣고 귀국을 재촉했다. 그가 유력한 왕족이기에 그 같은 요구는 더 강했으리라 보인다. 원광이 여러 해 만에 돌아오자 노인 아이 모두 기뻐하고, 왕이 만나보고 마치 성인을 대하듯 경건히 우러러 모셨다고, [삼국유사]는 쓰고 있다. 원광은 적어도 1년에 두 번씩 강설해 후학들을 양성했고, 시주받은 재물은 모두 절 짓는 데 쓰게 했다. 남은 것은 오직 가사와 바리때뿐이었다. 위대한 스승의 최후이다.

 

그런데 원광과 관련하여 가장 흥미로운 이야기는 [수이전]에 실려 있다. 지금 이 책은 없으나, [삼국유사]에 인용된 것을 통해 접할 수 있는데, 원광이 설(薛) 씨라 하고, 그의 나이 34세에 겪은 일 하나를 소개하였다. 한 비구가 원광이 있는 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따로 암자를 짓고 주술(呪術)을 닦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 신(神)의 목소리가 원광을 불렀다. 비구의 행실과 수행이 나쁘니 거처를 옮기라고 전해달라는 것이었다. 원광이 그대로 따랐더니 비구는 ‘지극히 수행한 사람도 마귀의 현혹에 걸리는군. 법사는 어찌 여우 귀신의 소리에 걱정하시는가요?’라고 하며 들은 체도 않았다. 도리어 원광이 수모를 당한 꼴이었다.

 

이에 대한 신의 형벌은 가혹했다. 밤중에 벼락같은 소리가 나더니, 날이 밝아 살펴보자 산이 무너져 내려 비구가 살던 암자를 덮어버렸다. 대체 이 신의 정체는 무엇일까? 의아해 하는 원광에게 신은 자신이 세상에 산 지 거의 3천 년이요, 신령스런 술법이 한창이라 말한다. 그러면서 ‘자리(自利)만 행하고 이타(利他)의 공이 없으면, 지금에는 높은 이름을 떨치지 못할 것이요, 나중에는 좋은 결과를 얻지 못할 것’이라며, 중국에 가서 더 공부하고 큰 공덕을 쌓으라고 말한다. 사실 그것은 원광이 바라던 바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로서는 백제와 고구려가 막고 있어 중국 유학이 쉽지 않았다. 신은 원광에게 그 방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결국, 원광의 중국 유학은 이 신의 도움 덕분이었다. 다시 묻거니와 이 신은 누구일까? 적어도 불교의 신인 것 같지는 않다. 이는 신라의 고유 신앙과 불교의 접목을 절묘하게 설명하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신라 특유의 캐릭터 아닐까. 거기에 신라 불교의 특징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일연은 “당나라와 우리나라의 두 전기의 글에서, 성씨가 박(朴)과 설(薛) 그리고 출가(出家)가 우리나라와 중국으로 나와 마치 두 사람처럼 보인다. 분명히 정할 수 없어서 두 가지 모두 둔다”라고 하였다. 나 또한 이 차이점에 대해 분명히 밝힐 수 없어 그대로 두자 한다. 분명하기로는 “원광의 다음에는 발꿈치를 밟으며 서쪽으로 공부하러 간 이가 많이 나왔다. 곧 원광이 길을 연 것이다”는 일연의 마지막 언급이다. 

 

 

 

고운기 / 한양대 문화콘텐츠학과 교수
글쓴이 고운기는 삼국유사를 연구하여 이를 인문교양서로 펴내는 일에 주력하고 있다. 필생의 작업으로 [스토리텔링 삼국유사] 시리즈를 계획했는데, 최근 그 첫 권으로 [도쿠가와가 사랑한 책]을 펴냈다. 이를 통해 고대의 인문 사상 역사를 아우르는 문화사를 쓰려한다.

그림 장선환 / 화가, 일러스트레이터
서울에서 태어나 경희대학교 미술교육학과와 동대학원 회화과를 졸업했다. 화가와 그림책 작가로 활동을 하고 있으며, 현재 경희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http://www.fartzz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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