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면 화랑은 무엇이었을까. [화랑세기]를 읽어 나가다 보면 이에 대해 다시 묻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충신과 맹장을 배출시킨 신라 호국의 간성으로서 화랑은 [화랑세기]를 통해 보건대 그렇게 단선적이지 않다. 이 책의 서문을 통해 정리해보기로 하자.
서문에서는 먼저 한 마디로 화랑이 선(仙)의 무리임을 내세운다. 선의 무리는 무슨 일을 했던가. 신라는 신궁(神宮)을 받들어 하늘에 큰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마치 중국의 연 나라에 동산(東山)이, 노 나라에 태산(泰山)이 있는 것과 같다 하고, 연부인(燕夫人)이 선의 무리를 좋아하여 미인을 많이 기른 것과 같이 원화(源花)를 두었다고 하였다. 그들처럼 아리따운 여자를 길러 신라의 자기 종교인 신궁에서 봉사하게 한 것이다. 제도를 본뜨기는 중국에서 하되, 신라만의 고유 종교로 자기 나라의 독특한 개성을 만들어 나갔다. 이것이 [화랑세기]가 말하는 원화요 화랑의 뿌리이다.
그러다가 법흥왕의 부인인 지소태후가 원화를 폐지하고 화랑을 두었다. 화랑이라는 말은 법흥왕이 위화랑을 사랑하여 여기서 유래한다고 하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일반적인 화랑의 그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다만 “본디 선의 무리는 단지 신을 받드는 일만 했으나, 국공(國公)들이 반열에 들어 거행한 후로 도의(道義)로서 서로 권면하였다”는 설명에 이르러서야 화랑은 지금 우리가 아는 화랑과 닮아간다. 그리고 “어진 재상과 충성스러운 신하가 이로부터 나왔고, 훌륭한 장수와 용맹한 병사가 여기에서 생겨났다”는 말로 이어진다. 김부식이 그토록 좋아했던 화랑의 가치 그것이다.
김부식은 [화랑세기] 서문의 이 마지막 문장만을 인용한 것이 된다. 선의 무리이니 신궁에서 제사 받드는 일을 했다는 기록은 제외되었다. 도의로서 서로 권면했다는 일면만 여러 화랑의 사례를 들 때 제한적으로 사용하였다.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는 화랑의 한쪽만 알고 있었던 것이다. 화랑은 신라 고유의 신관제도에 뿌리를 두고 있었고, 초창기에 그 일을 김대문의 집안이 독점하다시피 했다. 이는 일종의 무당이다. 그러기에 김대문은 차차웅의 뜻을 무당이라 풀 수 있지 않았을까. 자신의 집안에서 내려오는 정보가 있었기 때문이다. 김대문의 집안은 무당이었다.
제정일치 시대에 왕은 정치인이요 무당이었다. 그러다 차츰 정치에 충실해진다. 정치의 역할과 권한이 더 커진 것이다. 신라의 경우, 법제가 만들어지는 법흥왕 때, 정치로서 통치는 왕의 절대적인 권력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제사 또한 여전히 소홀할 수 없었다. 어여쁜 여자를 길러 원화라 이름 붙인 이들이 신궁에서 제사를 지냈다. 나라의 평안과 백성의 안녕을 비는 일은 오랜 전통 속에 있었다. 이를 좀 더 체계화하자고 화랑이라는 이름의 조직을 만들어냈다. 이를 주도한 것은 김대문의 집안이었을 것이다. 이는 초대 풍월주로부터 그들 집안 식구가 차례차례 그 자리에 오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하지만, 갈수록 정치에 비해 비중이 작아지는 쪽이 제사였다. 김대문의 집안이 화랑을 자랑스레 여기지만 벼슬자리에 나오라 유혹이 이어지는 것은 어느쪽의 비중이 더 큰지 웅변하는 사태이다. 결국, 도의로 권면하는 화랑으로 성격이 변하고, 그 출신들이 나라의 일을 맡아 하는 관리가 되었다. 김대문은 이런 변화의 한 자리에 서 있던 인물이다.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특히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 신라 정부로서는 화랑을 조직적으로 이용하였다. 김대문은 화랑의 변하기 이전의 모습부터 충실히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집안의 전통을 생각하면 다른 누구보다 자신이 나서야 할 일이었다. [화랑세기]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