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찰,불화,탱화

고운사 孤雲寺

문성식 2014. 11. 10. 18:02
소재지 : 의성군 단촌면 
원문참조 및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전통사찰종합정보 
사진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9034.jpg 경상북도 의성군 단촌면 구계리 등운산(騰雲山)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이다.

 

〔창 건〕

고운사의 창건에 대해서는 신라의 고승 의상 대사가 창건하였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현재 전해지고 있는 고운사 관련 각종 자료에서는 예외 없이 의상 창건설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의상 관련 자료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찾아볼 수 없어 역사적 사실 여부에 대한 판단은 유보할 수밖에 없다.

 

현재까지 밝혀진 고운사의 창건과 관련한 가장 오랜 기록은 1729년(영조 5) 신유한(申維翰, 1681∼?)이 지은 「고운사사적비」라는 자료이다. 조선 중기의 명문장가로 알려진 그는 1728년 「운수암기」를 지은 데 이어 고운사사적비도 지었는데, 이 자료에서 다음과 같이 고운사의 역사를 밝혀놓고 있다. 

 

“신라의 의상 조사께서 자리를 잡은 이후 이 사찰을 개창하였다. 고려 건국 초에는 운주화상(雲住和尙)이 계속해서 이 곳을 중수하였으며, 송나라 천우선사(天祐禪師)가 더욱 새롭게 정비하였다. 또한 도선 스님이 발원하여 석조 약사여래불을 봉안하였으며, 다층의 부도도 봉안하였다.”

 

위의 내용은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고운사 역사의 큰 줄기에 해당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아쉽게도 신유한이 어떠한 자료를 근거로 하여 이 사적기를 찬술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시까지 전해지고 있던 사중의 기록이나 인식 내용을 바탕으로 하여 작성했을 것이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된다. 그런데 위의 자료에서는 현 고운사의 절 이름과 관련한 내용, 즉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 857∼?) 선생과의 관계는 밝혀져 있지 않다. 이와 관련한 내용은 후대의 자료에서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먼저 1918년 오시온(吳始溫)이 지은 「고운사사적비」의 다음 내용을 검토해보도록 하겠다.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당 의봉(儀鳳) 원년에 의상 국사께서 왕의 명을 받들어 여러 사찰들을 넓혀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등운산은 소문현의 북쪽에서 가장 웅장하고 봉우리와 계곡이 지극히 아름답다.”는 말을 하고, 신문왕 원년 신사년(辛巳年, 681년)에 고운사(高雲寺)를 창건하였다. 이어서 최문창공(崔文昌公, 최치원)이 여지(如智)·여사(如事) 두 분 스님과 함께 가운루와 우화루를 세웠으며, 사찰 이름도 고운사(孤雲寺)로 바꾸게 되었다.”

 

오시원의 사적비에서는 681년이라는 고운사 창건 연도를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아울러 신라 하대의 대학자인 최치원과의 관계, 특히 그의 호를 따서 사찰 한자 표기를 바꾸게 되었다는 내용을 수록하고 있어 눈길을 끈다. 1728년의 사적비에 없던 내용이 1918년의 사적비에 와서 이렇게 수록된 경위에 대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밝히기 어렵다. 다만 문소현(聞韶縣, 의성군)의 읍지(邑誌) 자료에서 이와 유사한 내용이 보이는데, 이것으로 미루어본다면 1918년 사적비의 최치원 관련 내용은 지역 전승 자료를 기초로 하여 작성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여 볼 때, 고운사는 신라시대 창건설이 유력하게 전승되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681년의 의상 스님 창건설에 이은 9세기 후반 무렵의 최치원에 의한 중창설이 그것인데, 비록 조선 후기에 편찬된 자료들에 의한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고운사의 신라시대 창건설은 비교적 신빙성이 높은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현존하는 고운사 석조 여래좌상(보물 제246호)은 9세기에 조성된 불상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으므로 시대적으로 최치원과의 상관성도 매우 높아 보인다. 아울러 의상의 화엄 사상을 높이 평가했던 최치원의 태도로 보아 의상에서 최치원으로 이어지는 고운사의 역사는 신라 화엄사상사 전체에서도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인식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한다.

 

〔연 혁〕

헌강왕 때는 도선(道詵)이 약사여래석불과 석탑을 안치하였고, 948년 운주(雲住)가 중창하였다.

1018년(현종 9) 천우(天祐)가 대웅전·약사전·극락전·적묵당(寂默堂)·설선당(說禪堂)·동별실(東別室)·서별실(西別室)·관음전·금당(金堂)·백련당(白蓮堂)·회운당(會雲堂)·청풍당(淸風堂)·문수전(文殊殿)·양로당(養老堂)·백련암(白蓮庵) 등을 중창하였는데, 극락전에 봉안한 관음상은 천해(天海)가 꿈에서 본 것과 똑같은 불상을 송도 대흥산(大興山)에서 찾아내어 고운사로 옮겨 봉안한 것이라고 한다.

1482년(성종 13) 석가여래불상을 안동 갈라산 낙타사에서 옮겨 와 대웅전에 봉안하였으며, 1646년(인조 24) 소영(昭影)의 사리탑을 건립하였다. 1668년 극성(克成)·승묵(勝默)·덕종(德宗) 등이 가운루를 중수하였고, 처순(處淳)이 천왕문(天王門)을, 설행(雪行)이 봉황문을 신축하였다.

 

1670년(현종 11) 숭해(崇海)·묘선(妙善)·성준(性峻)·인준(印峻) 등이 명부전을 신축하고 시왕상(十王像)을 조성하였으며, 종헌(宗憲)과 설휘(雪輝)는 영각(影閣)을 짓고 영정을 만들어서 봉안하였다. 1681년(숙종 7) 천왕문을 중수하였고, 1683년 관헌(灌憲)·인잠(印岑)·선초(善初)가 팔상전(八相殿)을 신축하였으며, 1686년 4월 명부전을 중창하였다.

 

8224.jpg 1695년 도청(道淸)과 선조(禪照)가 극락전에 아미타불과 대세지보살상을 봉안하여 이전의 관음상과 함께 삼존불상을 구비하였으며, 행옥(幸玉)은 설선당, 태운(泰運)은 적묵당을 중건하였고, 선특(禪特)과 성담(性談)은 동별실을, 성관(性觀)은 서별실을 중수하였다. 또 태눌(泰訥)은 청풍당을 중건하였고, 승하(勝下)는 응향각(凝香閣)을, 의율(義律)과 의잠(義岑)은 백련당을 중수하였다.

 

1724년(영조 즉위년) 법존(法存)·지훈(智勳) 등이 운수암(雲水庵)을 창건하였고, 1729년 신유한(申維翰)이 사적비를 지었다. 1744년 어첩봉안각(御帖奉安閣)을 건립하였으며, 1797년 의암(義巖)이 백련암을 중창하였다. 1803년(순조 3) 4월 적묵당과 서별실이 화재로 소실되자 1804년 2월 문찰(文察)이 중건하였고, 1812년 의암이 운수암을 중건하였다.

 

1835년(헌종 1) 2월 백련당·금당·관음전·군포고(軍布庫)·직사고(直舍庫)·영전 등이 화재로 소실되자, 나라에서 홍종호(洪鍾浩)에게 명하여 만송(晩松)·호암(虎巖)·수열(守悅) 등과 함께 대웅전과 금당을 중건하게 하였다. 같은 해 12월 운수암이 소실되자 1838년 함홍(涵弘)이 중건하였고, 1868년 눌암(訥庵) 등이 만성제(晩惺齊)를, 해송(海松)이 우의당(禹儀堂)을 건립하였다.

1906년 안동·예안·의성·지례·선산·금산·용궁·비안·군위·의흥·청송·진보·순흥·봉화·영천군 등에 있는 사찰에 대한 관리를 종무원(宗務院)에서 부여받았으며, 1912년 30본산(本山)의 하나가 되었다.

1913년 2월 사찰령(寺刹令)에 의하여 고운사 본말사법(本末寺法)이 시행되면서 경상북도 내의 46개 사찰을 말사로 관장하였다. 1924년 주지 만우(萬愚)가 약사전을 중수하고 대정암(大定庵)을 창건하였으며, 1935년 주지 영호(泳鎬)가 대웅전을 중수하고 가운교(駕雲橋)를 만들었다.

 

1936년 명부전과 선열암을 중수하고 천왕문을 옮겨 지었다. 또한, 1934년에는 불교전문강원을 개설하였고, 안동 포교당·와룡 포교당·의흥 포교당 등을 두었다.

30본산 당시의 사재(寺財)로는 논 6만 3,664평, 밭 17만 9,634평, 대지 942평, 사사지(社寺地) 4,189평, 산림이 260정(町) 3반(反)이었다. 현재는 의성·안동·영주·봉화의 4개 시군, 54개의 말사를 관장하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대웅전·극락전·관음전·명부전·금강문·가운루·적묵당·우화루·동별실·서별실·금당·회운당·고운대암(孤雲大庵)·고금당(古今堂) 등 총 25동이 있다. 이 중 가운루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51호로 지정되어 있다.

 

〔문화재〕

중요 유물로는 보물 제246호 석조석가여래좌상과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호 고운사 삼층석탑, 사적비, 사보(寺寶)로 전해지고 있는 오동학촉대(烏銅鶴燭臺) 등이 있다.

 

〔사찰풍경〕

고운  최치원이 고운사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며 중심되는 건물을 지었다면 그것이 무엇일까요.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통과하면 풍류가 살아있는 누각으로 유명한 가운루와 우화루라는 2층 누각이 나타나는데, 이 건물을 최치원이 건립했습니다. 건물 속에 살아 숨쉬는 고운 선생의 이룬 도를 함께 느껴보며 살펴보는 것도 새로운 산사참배의 맛일 것입니다.

 

고운사(高雲寺)는 신라 의상스님이 창건하였으나, 신라말 불교와 유교ㆍ도교에 모두 통달하여 신선이 되었다는 최치원이 여지(如智)ㆍ여사(如事) 대사와 함께와 가운루(駕雲樓)와 우화루(羽化樓)를 건축한 이후 그의 호인 孤雲을 빌어서 孤雲寺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최치원이 두 승려의 도움을 얻어 계곡을 가로지르는 가운교(駕雲橋)를 놓고 가운루와 우화루를 짓고 양루에서 도를 닦았다고 합니다. 가운루는 계곡 바닥 가장 낮은 암반에 돌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다시 나무 기둥을 올린다음 마루를 놓아 하층을 만들고 상층은 기둥위에 공포를 두고 지붕을 올렸습니다. 계곡을 가로지르게 건축한 것으로 봐서 계곡을 건너는 다리 역할도 하지 않았을까 싶은데, 지금은 새로 난 다리와 복개한 길이 있어 제 모습과 가치는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가운루의 현판 글씨는 유명한 고려 공민왕 어필입니다. 공민왕은 두 번의 내란과 노국대장공주가 죽자 실의에 빠져 전국을 유람할 때 고운사를 찾아, 이후 학자로 구름에 몸을 싣고 만사를 잊고 선인(仙人)으로 돌아가고자 하여 가운루 현판을 어필로 남겼습니다.

가운루와 인접해 계곡을 비켜 앉은 누각이 우화루입니다. 우화루에는 현판이 두 개 달려있는데, 밖에는 신선이 된다는 도교적인 우화루(羽化樓)라는 현판이, 누각 안에는 불교적 용어인 꽃비가 내린다는 뜻을 가진 우화루(雨花樓)라는 현판이 달려 있습니다. 우화루 서쪽벽면에는 유명한 호랑이 벽화가 있습니다. 이리 저리 호랑이 눈빛을 벗어나고자 자리를 옮겨봐도 호랑이의 매서운 눈은 피할 길이 없다고 하지요. 아무리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라는 말을 실감케 합니다.

 

12.gif 교통안내

1) 중앙고속국도-남안동 나들목-930번 지방도 운산역 방향-의성 방향 5번 국도 1.2Km 진 행- 930번 지방도 단촌면 방향- 고운사
2) 중앙고속국도- 의성나들목-5번 국도 의성읍 방향- 5번국도 단촌 방향-단촌면 사무소- 하화리- 후평교-구계리-고운사

 

12.gif 현지교통

1) 안동-고운사간 시내버스 1일 4회 운행, 40분 소요.
2) 의성-고운사간 시내버스 1일 1회 운행, 45분 소요

 

12.gif 주변관광지

의성군 - 봉양 탑산온천, 점곡 사촌가로숲, 금성산 수정사, 춘산 빙계계곡 타시군 - 안동댐, 안동하회마을, 도산서원, 청송주왕산

 

12.gif 입 장 료

 

12.gif 주차시설

580㎡ 30대수용

 

12.gif 도움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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