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지 : | 창녕군 창녕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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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참조 및 출처 :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사진출처 : | 문화재청 |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관룡산(觀龍山)에 있는 절.
〔창 건〕
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관룡산은 구룡산(九龍山)이라고도 한다. 신라시대 8대 사찰 중의 하나로서 많은 문화재와 경치 좋은 사찰로 널리 알려졌지만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사기(寺記)에 의하면 34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한 근거는 없다.
그러나 이 사실은 지리산 칠불암(七佛庵)의 창건설화에 나타난 것과 같이 불교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가야에 전해졌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예증이 되기도 한다. 그 뒤 583년(진평왕 5) 증법(證法)이 중창하였는데, 보통 이를 창건으로 삼기도 한다. 삼국통일 뒤에는 원효(元曉)가 1,000명의 중국 승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고 대도량을 이룩하였다.
관룡사(觀龍寺)는 신라시대 8대 사찰 중의 하나로서 많은 문화재와 경관이 수려한 사찰로 널리 알려졌지만 절의 역사에 관한 뚜렷한 기록은 없다. 관룡사의 ‘관룡(觀龍)’은 사적기에 화왕산 정상의 삼지(三池)에 숨어 있던 아홉 마리의 용이, 절이 창건될 때 구름 위로 승천하는 것을 많은 무리들이 목격하였다 하여 ‘용을 바라본다는’는 의미에서 지은 것이라 전한다. 초창시기는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약사전에서 발견된 묵서에 ‘영화오년기유(永和午年己酉)’라고 기록하였으며, 절에 비장된 사기(寺記)에도 신라 349년(訖解王 40)에 창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불교가 인도에서 바다를 건너 가야(伽倻)에 전해졌다는 남방전래설을 뒷받침하는 또 하나의 예증이 되기도 한다. 반면 『창녕군지(昌寧郡誌)』에 따르면, 583년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초창하여 신라의 8대사찰로서 원효대사가 제자 1천여 명과 더불어 화엄경을 설법한 도량이었다고 한다.
전설에 따르면 원효가 제자 송파와 함께 이곳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는데, 갑자기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서 오더니, 화왕산 마루인 월영삼지로부터 아홉 마리의 용이 등천하는 것이 보이므로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하였다고 한다. 이 기록 역시 사기에 적혀 있는 내용으로 일반적으로 관룡사의 창건을 583년(신라 진평왕 5)으로 보고 있다. 이후 748년(경덕왕 7)에 추담(秋潭)이 중건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관련기록이 전하는 바 없어 알 수 없으나 약사전의 석조여래좌상(보물 제 519호)과 관룡사 부도(유형문화재 제 19호) 등 고려시대 유물들이 전하여 고려시대에도 법등이 이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1401년(태종 원년) 대웅전이 중수되고, 1507년(중종 2) 약사전이 중건되었으나, 임진왜란 때 대부분의 당우가 소실되었다. 사적기에 의하면, “불전(佛殿)ㆍ승사(僧舍) 등이 독봉(毒蜂)의 피해 불에 타버리고 …유일하게 약사전만 불에 그을 린 흔적이 있는 채로 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당시 경내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이후 관룡사는 전란으로 거의 폐허가 된 사역을 17세기에 대대적인 중창을 하게 된다. 1617년(광해군 9) 영운스님의 대웅전 재건을 시작으로 1619년(광해군 11) 향적전을 창건하고, 1622년(광해군 14) 금당을 건립하는 등 전각과 승사를 중창하여 17세기 관룡사는 불전ㆍ누각ㆍ부속건물 등 13개의 건물 및 6개의 부속암자를 거느린 대찰(大刹)로 면모를 일신하게 된다.
그러나 1704년(숙종 30) 여름의 대홍수로 금당과 부도 등이 유실되고 승려 22명이 익사당하는 참변을 당한 뒤 1712년(숙종 38)에 대웅전과 기타 당우들이 재건되는 중창이 따른다. 18세기 사적기에 기록된 관룡사의 중창은 대규모의 것으로, 1712년 대웅전의 중수를 시작으로 천왕문 건립과 함월당 개축, 1726년(영조 2) 미타전 창건, 1729년(영조 5) 영산전 창건 등을 이루었다. 이에 경내에는 대웅전ㆍ16나한전ㆍ약사전ㆍ영산전ㆍ관음전ㆍ미타전ㆍ명부전ㆍ문수전 등의 불전과 향로전ㆍ노전ㆍ선당ㆍ승당ㆍ상실ㆍ청풍당ㆍ제월당ㆍ함월당ㆍ반연료ㆍ얀양료ㆍ현당ㆍ지사ㆍ해회당ㆍ천왕문ㆍ종루ㆍ행랑 등 부속건물이 있는 대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학령ㆍ홍순 스님이 1749년(영조 25)에 3중창하여 옛 가람의 사세를 유지하였으나, 19세기에 가람이 쇠락하여 경내에 수많은 전각과 요사들이 사라지고 대웅전, 약사전, 명부전, 원음각, 벽파당 만이 남게 되었다. 19세기에는 다시 한번 중창하여 1883년(순조 33)에 대웅전을 중수하고 1882년(고종 19)에 여러 건물을 중수함으로써 옛 가람을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근래에는 6.25로 화왕산 일대가 공산군의 집결지가 되면서 팔상전이 소실되고 대웅전 일부가 소실되었으나, 큰 피해는 입지 않아 현재의 가람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문화재〕
중요 문화재로는 보물 제212호로 지정된 대웅전과 보물 제146호인 약사전, 보물 제519호의 석조여래좌상, 보물 제295호인 용선대석조석가여래좌상,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1호인 약사전삼층석탑,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83호인 관룡사사적기, 경상남도 민속자료 제6호인 석장승,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9호인 부도,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로 지정된 원음각 등이 있다.
그 중 대웅전 안에는 비로자나삼존불이 봉안되어 있고, 약사전은 임진왜란 때 전화를 면한 관룡사 유일의 건물로서, 부석사조사당·송광사국사전과 함께 건축사 연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이 약사전 안에 봉안된 약사여래좌상은 고려시대의 작품이며, 약사전 앞에 있는 높이 2m의 삼층석탑은 기단부의 4면에 각각 2개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된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의 작품이다.
또한, 절의 서쪽 계곡 500m 위의 용선대(龍船臺)에 있는 석조석가여래좌상은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석불로서 산 정상에 안치된 드문 예이다. 관룡사 입구 좌우에 마주보고 선 높이 약 2m의 석장주(石將柱) 2주는 자연석에 남녀상을 새겼는데, 관룡사 경내를 표시하는 석표(石標)의 구실도 하고 있다.
〔산내암자〕
17세기 6개의 암자와 18세기 4개의 암자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옥천저수지 아래 청련암(靑蓮庵)과 삼성암(三聖庵)과, 관룡사 아래에 극락암(極樂庵), 화왕산 자하골에 도성암(道成庵)이 그 명맥을 이어오고 있다.
〔가람배치〕
관룡사의 가람은 전형적인 사동중정형(四棟中庭形)으로 산지가람의 모습이다. 사찰 초입은 사천왕문을 출입문으로 종각과 원음각이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자연석 축대를 따라 중정으로 오르면 대웅전과 약사전, 명부전, 칠성각, 산령각, 응진전, 요사채가 전개된다. 대웅전은 화왕산을 진산으로 자리한 관룡사의 주법당으로 좌우로 칠성각과 명부전이 남향하고 있으며, 칠성각 위로 산령각과 응진전이 자리하고 있다. 이외 중정에는 대웅전의 동서로 두 채의 요사채가 있는데, 서쪽의 요사채는 주지실 겸 종무소로 사용되고 있으며, 동쪽의 요사채는 승방으로 부전스님이 상주하고 있다. 또 원음각 우측에는 보물 제 146호인 약사전이 있으며, 그 앞으로 삼층석탑이 배치되어 있다.
지정문화재 목록 및 해설
사찰풍경
관룡사를 찾아가는 길은 많이 변했지만 아름다운 풍광은 예전 그대로이다. ‘창녕의 금강산’이라 불리는 화왕산 기암절벽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관룡사는 창녕일대에서는 비교적 큰 규모에 속하는 천년 고찰이다. 수려한 산세를 배경으로 좁은 땅을 잘 활용한 입지와 그 입지에 걸맞은 조촐한 분위기는 산중사찰의 고아한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관룡사는 신라 때 창건되어, 원효대사가 제자 천명에게 화엄경을 설법한 8대 사찰 중 하나이다. 지금은 규모가 축소되어 대웅전을 비롯한 약사전이 가람의 주법당으로 전하지만, 17~18세기에는 20여 동의 전각과 10암자가 빽빽이 들어서 있던 대찰이었다. 이러한 고찰의 면모와 역사의 흔적은 빛바랜 단청이 아른거리는 대웅전을 중심으로 아담한 약사전, 그 안에 모셔진 약사여래상 등 4점의 보물과 5점의 지방문화재들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그러나 이곳 관룡사에서 가장 유명한 곳은 절 뒤편 등성이 위에 있는 용선대(龍船臺)이다.
용선대에는 이곳 지역민들이 토함산 석굴암 부처님에 비견될 만큼 신령스럽게 받드는 돌부처님이 산 아래 올망졸망한 사바세계를 바라보면 좌정해 있다. 화왕산의 한 능선이 남서쪽으로 내려오다가 불쑥 솟은 곳에 자리한 널찍한 바위 위, 그곳에 높은 대좌를 놓고 불상을 앉힌 것이다. 불상의 양식은 석굴암 본존에 못 미칠지 모르지만 현재 여러 보호장치에 의해 그 시선이 가려진 석굴암 본존을 생각해 본다면, 해 뜨는 동쪽을 향해 자비로운 미소로 중생을 맞이하는 용선대 불상의 안복(眼福)은 그 무엇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 누군가 용선대는 그 모양이 마치 큰 바다를 가르는 배의 모습과 같다고 하며 반야용선(般若龍船)에 비유한 바 있다. 법화신앙에서는 대웅전을 지혜를 실어 나르는 배 또는 중생을 고통이 없는 극락의 세계로 건너가게 해 주는 배로 비유하는데 이것이 곧 반야용선이요, 용선대가 바로 이 반야용선에 해당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용선대 부처님은 반야용선의 선장으로서 이곳 하늘과 땅의 무수한 존재들을 싣고 항해의 키질을 하면서 반야용선의 설법을 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그 피안(彼岸)으로 가는 뱃길의 원(願) 자리에는 오늘도 기도하는 이들이 끊이지 않는다. 관룡사를 찾는 마음은 이 용선대에 이르러 한숨을 돌리며 가다듬어 세우는 원(願)으로 매듭짓게 된다.
교통안내
1) 서울출발의 경우 강남에서 부곡행 고속버스 이용. 남부터미널에서 창녕행 이용.
2) 대구, 부산, 마산, 합천, 밀양 등지에서 창녕행 또는 영산행 직행 이용. 계성에서 하차.
현지교통
구마고속도로- 창녕 나들목이나 영산 나들목- 5번 국도-계성리-1000번 지방도 옥천리방향 -관룡사.
(도로안내 표지판이 잘 되어 있음)
주변관광지
부곡온천, 화왕산, 영산만년교, 영산 호국공원, 옥천계곡
입 장 료
어른 1,000원 / 학생,군인 600원 / 어린이 200원
단체 30인이상 - 어른 800원 / 학생,군인 400원 / 어린이 150원
주차시설
227여대 수용(소형 2,000원 / 대형 3,000원)
도움전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