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33.jpg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술정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주택.

 

초가인 안채는 하씨의 입향시조 하자연(河自淵)이 1425년(세종 7)에 지었다고 전하나 확실치는 않다. 초가 앞쪽으로는 기와로 이은 사랑채가 하나 더 있다. 이 사랑채는 1898년에 새로 지었다고 한다. 사랑채 남쪽에는 대문이 있다.

 

기와를 이은 아담한 사랑채 뒤편으로 초즙(草葺)한 안채가 양명(陽明)한 방향으로 반듯이 앉았다. 이 안채가 지정되어 있다. 보통 초가삼간(草家三間)이라 부르는 一자형 홑집의 구성이다.

우측의 첫간이 부엌이다. 다음이 안방이고 이어서 대청 그리고 건넌방이 차례로 있는데 각각 1간씩이어서 합하면 4간이 된다. 옛 사람들은 부엌을 간수에 합산하지 않았다. 그것은 반빗간 있었던 옛날엔 부엌이 거기에 없었던 것이고 고상(高床)의 구조인 살림집엔 원래 부엌이 없었던 것이어서 평면에서 부엌은 제외하고 헹가림 하는 일이 보통이었다. 산석(山石)을 떠다 마당에 쌓아 댓돌을 만들었다. 죽담이다. 죽담 높이는 장대의 두 벌대 높이이다.

사랑채 대청 앞쪽과 부엌문 앞에 층층대를 두고 죽담에 오르내릴 수 있게 꾸몄다. 역시 산석을 다듬지 않고 주초(柱礎)로 사용하였다. 그 위에 방주(方柱)를 세웠다. 세운 기둥 높이는 높지 않은 편이나 기둥과 기둥간사이는 비교적 넓어서 안정감이 높다. 기둥 사이의 담벽은 중깃 엮고 맞벽친 것인데 원래는 토벽이었을 것이나 여기에 사는 이들이 현대식 생각에서 분벽(粉壁)으로 바꾸고 말았다. 이런 변형은 안방과 건넌방의 미닫이에서도 볼 수 있다.

유리창을 눈꼽재기창처럼 단 완자무늬 미닫이가 달렸으나 이는 원형이랄 수 없는 신식의 맛이 강한 모양이다. 부엌의 판비((板扉)두짝의 판비)도 역시 개조되어서 예스러운 나이와 멋을 잃었다.

남방(南方)의 집은 대략 고상형(高床形)발상지다운 요소를 지니고 있는 것이나 이 집은 오히려 산곡간(山谷間)의 저상식(低床式)의 집처럼 전퇴(前退)를 생략하고 있으며 방 앞에 겨우 쪽마루를 만들었는데 이것도 당초에는 없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이런 집의 골격은 토방(土房)의 봉당 구성에서 연유되는 것이라고 믿어진다. 이 골격에 필요에 따라 새로운 요소들이 가미되었던 것이라고 해석된다. 오랜 세월을 두고 약간씩의 첨가와 변환이 있어왔다고 할 수 있다.

안채천장 처마는 남쪽 특성에 따라 깊게 구성하였다. 이 집에서 가장 대표적인 특성이라할 부분이다. 기둥 높이를 100이라 기준하였을 때 처마 깊이가 거의 100%에 가깝다고 할 정도이다. 이 점은 살림집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태양의 남중고도에 따른 여건과 강우량을 고려하고 순화시켜 완성한 내용이 거기에 내재하여 있기 때문이다.

지붕은 이엉 대신에 억새풀을 이었다. 같은 초즙이라도 수명이 장구할 뿐만 아니라 바라다 보는 감각에서도 고졸(古拙)한 맛을 느끼게 한다. 앞마당은 취평(取平)된 반듯한 것이나 뒷마당에는 화계(花階)가 있고 동산이 생겨 몇 그루의 거목들이 숲을 이루고 있다.
 
술정리란 창녕현감 한강 정구가 지은 정자를 술정(述亭)이라 한데에서 지어진 마을 이름으로

지정 당시에는 창녕하병수씨가옥(昌寧河丙洙氏家屋)이었으나, 마을이름(술정리), 거주한 내력부억천장 (하씨), 가옥의 형태(초가) 등을 나타내는 ‘창녕 술정리 하씨 초가’로 명칭을 변경(2007.1.29)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