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문호 개방기의 교회(1882∼1911년)
2-1. 교회의 성장
조선 사회는 문호 개방 이후 일대 전환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이 새로운 사회상의 여파는 천주교회에도 미치고 있었다. 곧 개항 이후 조선 천주교회는 1866년의 박해에 따른 파탄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프랑스 선교사들이 비밀리에 다시 입국해서 박해로 흩어진 신자들을 모았고, 신앙의 자유를 확대하려고 노력하였다. 곧, 1876년에는 블랑(Blanc, 白圭三, 1844~1890년) 신부 등이 입국하였다. 그리고 1866년에 순교한 베르뇌(Berneux, 張敬一, 1814~1866년) 주교의 뒤를 이어 제6대 조선교구장으로 임명된 리델(Ridel, 李福明, 1830~1884년) 주교는 1877년 조선에 다시 입국하여 비밀리에 선교에 착수하였다. 그러나 그는 입국한 지 4개월 만에 체포되어 중국으로 추방되었다. 조선 정부가 체포한 선교사에게 사형을 언도하는 대신 추방을 결정한 것은 정책상의 중대한 변화를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리델 주교와 함께 체포된 최지혁(崔智爀)과 같은 신자는 옥사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선교사 추방은 선교 자유의 새로운 가능성을 암시해 주는 주목할 만한 변화로, 1880년에는 공주에서 체포된 신자가 배교를 강요당하지 않고 석방되기도 하였다.
개항기 교회는 조선교구의 제7대 교구장에 블랑 주교가 임명된 1883년 이후 큰 발전을 보인다. 물론 그 뒤에도 정부에서는 선교사의 활동에 제한을 가하고 교회의 토지 구입을 문제삼기도 하였다. 또한 개항 이후 서울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묵인되고 있었지만 일부 지방 관리들은 신자들을 계속해서 박해하였다. 그리하여 거제도 출신 윤봉문(尹鳳文)은 1888년 진주에서 순교하였다. 그리고 전라도 장성, 강원도 안협(安俠)을 비롯한 여러 곳에서 신자들이 핍박을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박해의 시대는 지나가고 있었다.
당시 교회는 얼마 안 가서 이루어질 신앙의 자유를 전망하며, 이에 대한 대비책을 마련하였다. 그리하여 리델 주교가 조선에 다시 입국하던 1877년 이후 신앙의 자유가 묵인된 1882년에 이르기까지 뮈텔(Mutel, 閔德孝, 1854~1933년) 등 6명의 선교사들이 입국하여 흩어진 신자들을 모으고 교회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들은 박해가 이완되고 신앙의 자유가 묵인된 분위기를 활용하여 1882년 처음으로 서울에 본당을 창설했고 교세 통계를 집계하기 시작했으며, 성당 건립을 위해 토지를 매입해 나갔다(1883년). 한편 블랑 주교의 뒤를 이어 1890년 교구장에 뮈텔 주교가 취임하였다. 개항기 교회 상황은 다음 <표 2>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신자 증가율이 높아지고 있다.
<표 2> 개항기 조선 천주교회
연도 | 신자 수 | 전년대비 증가율 (%) |
본당수 | 프랑스 선교사 |
한국인 신부 |
신학생 |
1883 | 12,035 | - | 1 | 10 | 0 | 0 |
1885 | 14,039 | 3.03 | 2 | 11 | 0 | 6 |
1890 | 17,577 | 5.96 | 9 | 22 | 0 | 20 |
1895 | 25,998 | 5.12 | 18 | 38 | 0 | 32 |
1900 | 42,441 | 11.02 | 40 | 40 | 12 | 39 |
1905 | 64,070 | 5.81 | 45 | 44 | 11 | 20 |
1910 | 73,517 | 3.18 | 54 | 47 | 15 | 41 |
한편 1886년 한불 조약이 체결된 이후 신앙의 자유에 대한 묵인의 폭이 더욱 확대되면서, 교회는 제물포(1883년)와 원산(1887년), 부산(1889년) 등 개항장에 본당을 창설해서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이와 동시에 1889년에는 개항장뿐 아니라 대구, 전주 등 조선의 전통적인 도회에도 본당을 세웠고, 1892년에는 서울의 두 번째 본당인 약현(藥峴, 지금의 중림동) 성당이 최초의 서양식 벽돌 건물로 건축되었다. 1898년 서울 종현(鍾峴, 지금의 명동)에는 주교좌 성당이 완공되어 조선의 선교 자유를 상징해 주었다.
개항 후 입국한 선교사들은 조선인 신학생을 선발하여 말레이 반도 페낭(Penang)에 설치된 신학교에 파견하였다. 당시의 교회는 1885년 원주 부엉골(현재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금평리)에 예수 성심 신학교를 개교하였다. 이 학교는 1887년 서울 용산으로 이전해서, 중등 교육 단계인 3년 교육 과정의 소신학교(小神學校)와 고등 교육 단계인 2년 과정의 철학과, 3년 과정의 신학과로, 이 과정을 모두 이수한 조선인들을 성직자로 서품하였다. 개항기에 이르러 예수 성심 신학교는 조선인 성직자를 양성하는 새로운 요람이 되었다. 이 신학교에서 1896년 이후 조선인 성직자들이 다시 배출될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00년에는 주교 1명과 프랑스인 신부 39명 그리고 조선인 사제 12명이 선교 활동을 하였다. 1910년에 프랑스인 선교사 신부는 46인으로, 조선인 사제가 15명으로 늘어났다.
한편, 1888년에는 프랑스의 ‘샬트르 성 바오로 수녀회'가 한국에 진출하여 고아원과 양로원, 시약소 그리고 새롭게 세워진 여러 학교에서 봉사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본당에 파견되어 본당 신부를 도와서 직접 선교하게 되었다. 또한 1908년에는 뮈텔 주교의 초청으로 독일 오틸리엔에 모원을 두고 있는 ‘베네딕도 수도회'가 조선에 진출하였다. 이 남녀 수도자들의 봉사로 한국 교회는 새로운 활력을 얻게 되었다.
2-2. 교안(敎案)의 발생
개항기 천주교에 새롭게 입교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한국의 근대화를 추진하려는 지식인도 일부 있었다. 그러나 신입 신자들의 주류는 가난한 농민이었다. 이들 가운데 몇몇은 서양인 선교사나 교회의 힘을 빌려 부패한 관리들의 착취에서 벗어나거나 개인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었으니, 신앙의 자유가 공인된 이후 천주교 선교는 도처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었다. 일부 지방에서는 공급이 수요에 비해서 턱없이 부족했던 예비 신자용 교리서가 웃돈을 붙여 거래되기도 하였다.
박해 시대 이래 천주교 신자들은 국법을 어긴 죄인으로 천인 취급을 받았다. 그들이 생업으로 하던 옹기 제조업은 당시 농민들에게는 하대되고 있었다. 따라서 신앙의 자유를 확보하게 되자 기존의 신자들은 박해 과정에서 강등된 자신의 신분을 향상시키고자 하는가 하면, 일부 신자들은 박해 시대 몰수당한 순교자들의 재산을 되찾고자 하였다. 선교사들 역시 신자들의 신분을 향상시키고 사회적으로 정당한 대우를 받게 하는 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신자들의 특성 때문에 개항기 당시의 교회나 신자들은 그 지방의 유력자나 관리들과 자주 충돌하게 되었다. 이를 정부 당국자들은 ‘교안(敎案)'이라 하였다. 개항기 교안은 두 가지 측면을 가졌다. 첫 번째로 교안은 신자들의 사회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신앙 자유의 폭을 넓혀 가는 데에 기여하였다. 신자들은 이를 위해 도처에서 교안을 일으켰고, 정부에서도 ‘교안'을 수습하기 위해서 신앙의 자유를 용인하는 법 제정에 착수하였다. 이는 교안이 발휘한 긍정적 기능이다.
그러나 교안은 당시 사회에서 부정적 측면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신자들 가운데 일부는 교회를 일종의 세력 집단으로 보고 이에 의탁하여 자신의 안전이나 경제적 이득을 취하고자 하였다. 입교를 통해서 현실적 도움을 기대하는 사람도 있었다. 개항기 조선은 1890년대 이후 지방 행정의 난맥상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 상황에서 일부 신자들은 선교사 양대인(洋大人)에게 의존하여 사회적 혼란에서 자신을 지키고 자신의 이득을 확보하려는 불순한 의도를 갖기도 하였다.
이 당시 발생한 불행한 교안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은 1901년 제주도에서 일어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지방관의 착취와 폭정에 대한 제주도민의 저항과 ‘외세'에 대한 반발, 그리고 하급 관리들과 결탁한 일부 신자들의 위압적 행동 따위가 서로 결부되어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사건은 강화 진위대(鎭衛隊)의 출동과 프랑스 군함의 개입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러나 이 사건이 전개되는 과정에서 700여 명의 신자와 예비신자들이 민란 참여자에게 학살당했고, 민란에 참여한 도민 200여 명도 죽임을 당하였다.
이 사건의 마무리 과정에서 민란의 주모자인 이재수(李在守) 등 3인은 사형을 당하였다. 당시 교회는 선교사 두 명의 재산 피해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여 철저히 관철하였다. 이에 따른 배상금 5,160원은 제주도민 4만여 명에게 개인당 15전(錢) 6리(厘)씩 분할 징수하여 거두어들였다. 이 피해 배상 요구는 유사한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강행된 것이다. 반면에 학살당한 신자들에 대한 보상은 불가능했고, 1903년에 이르러 그들을 위한 매장지가 겨우 마련될 수 있었다. 제주 교안의 과정에서 외적 피해 보상이 일부 이루어졌다 하더라도 교회나 제주도민이 입은 마음의 상처는 오랫동안 치유되지 못하였다.
2-3. 신앙생활의 전개
개항기 교회는 신자 수가 급증하는 한편 전통 사회와 갈등을 빚었다. 그렇지만 신앙의 자유를 쟁취한 교회 안에는 새로운 활력이 넘치고 있었다. 이 활력은 교회 문화와 신심의 고양을 통해서 강화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개항기 교회는 1882년 교육 사업에 착수하여 인현서당(仁峴書堂)을 창설해서 신자의 자녀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대상으로 교육을 시행하였다. 이 학교는 흔히 최초의 근대 학교로 불리는 원산학사(元山學舍)보다 1년 먼저 창설되었다. 또한 교회는 1885년 서울 곤당골(美洞: 현재 중구 을지로 1가 부근)에 건물을 구입하여 보육원을 세워 23명의 고아들을 돌보기 시작하였으며, 비슷한 시기에 양로원도 건립하였다. 이 보육원과 양로원은 우리나라에 최초로 세워진 근대적 사회 복지 시설이다.
개항기 교회는 가난한 신자들의 생활을 향상시키기 위해 누에고치의 새로운 품종을 도입하여 보급하거나, 신품종 포도를 비롯한 특용 작물을 보급하고 그 재배 기술을 향상시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신자들 상당수가 무전농민(無田農民)이던 상황에서, 교회는 선교 자금의 상당 부분을 투입하여 토지를 구입하여 신자들에게 소작을 주어 경작시킴으로써 교회의 재정을 확보함과 동시에 신자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교회와 신자 사이에는 지주`-`소작인의 관계가 성립되었다. 이 관계는 교회의 토지를 실제로 관리하는 성직자 대 신자의 관계로 이어지면서 그 밖의 여러 복합적 요인들과 결부되어 당시 형성된 성직자의 권위주의라는 폐단의 한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하였다.
개항기 조선 교회는 순교 전통에 대해 자부심을 가졌고, 순교자들의 시복을 위한 노력을 전개하였다. 또한 개항기 교회는 마리아 신심이나 예수 성심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고 있었다. 1888년 로마에서는 조선 교회를 예수 성심께 바치는 봉헌식이 성대하게 거행되기도 하였다. 1890년 블랑 주교는 조선 교회를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였다. 당시 교회는 예수와 마리아의 성심에 대한 신심이 깊었고, 성체에 대한 돈독한 신심을 드러내 주었다. 그리하여 매월 첫 목요일과 금요일, 토요일에는 이러한 신심을 돈독히 하며 특별한 기도와 의식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물론 당시에 고아들을 돕기 위한 성영회(聖찾會) 등과 같은 교회 단체도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회의 신심 운동이나 신심 단체들은 주로 개인 구원을 지향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심 운동 단체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성의회(聖衣會)가 있다. 교회에서는 연옥 영혼을 구하기 위한 기도가 간절히 바쳐졌다. 신자들은 전대사(全大赦)와 한대사(限大赦)를 얻기 위한 성사 배령(拜領)과 기도에 열심이었다. 교무금 제도가 시행된 것도 이 시기로, 당시 대부분의 농촌 교회는 추수 후 성탄 판공성사 전에 교무금을 받아들였다. 이 과정에서 성교사규(聖敎四規)에 규정된 연 1회 부활 전 의무적 고해성사가 한국 교회에서는 성탄과 부활 전 연 2회로 규정되었다. 그리고 판공성사 때에는 성사표를 발부해서 효율적으로 신자들을 관리하기 위한 방안이 추진되었다.
교회는 한글 활자를 비치하고 일본의 나가사키에 설치된 성서 활판소를 1886년 서울로 이전해서 교회 서적을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로써 조선 교회는 저렴한 활판본 책자를 간행하게 되었다. 이때 「천주성교 십이단」, 「백문답」 등 기도서와 교리서가 간행 보급되었다. 한편, 이 시기에는 샤를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1874년)가 간행되었고, 조선에 파견된 프랑스 선교사들의 노력으로 「한불자전」(韓佛字典, 1880년), 「한어문전」(韓語文典, 1881년) 등이 간행되었다. 이 책자들의 간행으로 유럽 여러 나라가 한국을 올바로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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