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3. 식민지 시대의 교회(1910~1945년)

문성식 2019. 2. 8. 16:58

 

3. 식민지 시대의 교회(1910~1945년)

 

3-1. 식민 통치와 선교 정책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전 민족적 저항에도 조선은 1910년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상황은 민족이 독립하는 1945년까지 계속된다. 이 기간 에 일제는 한반도에서 식민 정책을 집행해 나갔다. 그들은 식민 정책의 일환으로 이른바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면서도 종교에 대한 교묘한 규제책을 시행하였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한 1910년 당시 조선 천주교회는 신자 수가 73,517명이었고 성직자는 62명(외국인 선교사 47명, 조선인 신부 15명)이었다. 특히 조선교구의 교구장을 파리 외방 전교회 소속 뮈텔 주교가 맡고 있었다. 그 밖의 선교사들도 교회의 지도층을 이루어 조선 교회를 직접 관장하면서 선교의 방향을 정하였다.
한일 합방 당시 조선에 나와 있는 외국인 선교사들은 광대한 식민지를 경영하던 제국주의 국가 출신이다. 따라서 그들은 제국주의적 불평등 조약의 부당성을 알지 못하였다. 오히려 식민지 지배 권력을 정당한 권력으로 인정하고 있어 일본 제국주의의 조선 지배를 정당한 현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교회는 식민지적 사회 구조의 일부로 자리잡게 되었다. 교회가 식민지 사회에서 합법적 기구로 인정되는 한, 식민지 통치의 기초를 부인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따라서 당시 교회에서 공식적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거나 이를 지지하는 것은 불가하였다.
그런데 일제는 한일합방 이후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약속과는 달리 교회 활동에 대한 각종 통제를 강화해 나갔다. 곧 그들은 ‘사립학교령', ‘신문지법', ‘포교 규칙' 등 각종 법령과 행정 명령을 제정하여 교회의 활동을 실제로 규제하였다. 여기에서 식민지 당국자가 주장하는 ‘종교 자유'의 허구성이 여실히 확인되었다. 식민 당국이 종교계에 대해 간섭하면서 주장하던 원칙도 ‘정교 분리 정책'이었다. 또한 총독부 당국에서는 1915년 ‘포교 규칙'을 제정하여 교회 활동을 직접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포교 규칙에 따라서 선교사나 성직자는 물론 수녀나 공소 회장들까지도 총독부의 허가 없이는 선교를 못 하게 되었다. 성당이나 공소를 신설하기 위해서는 총독부의 허가를 얻어야 했고, 설립 허가를 위해서는 그 설립의 이유와 유지 방법이 충분하다고 인정받아야 하였다. 이 때문에 성당의 설립과 선교에는 상당한 간섭이 따르게 되었다. 일제의 헌병 경찰들은 포교 규칙의 시행 여부를 조사하고 감시한다는 구실 아래 수시로 교회를 출입하며 성직자와 신자들을 괴롭혔다. 그리스도교계 일각에서는 이 규칙의 철회를 요청하게 되었다.
한편 3·1 운동의 결과로 포교 규칙을 폐지한 이후 총독부 당국은 각 교단의 법인화를 추진하였다. 천주교는 1924년 총독부의 승인을 받아 천주교 유지재단을 등록했고, 이에 이어서 개신교의 각 교단도 법인 등록을 하게 되었다. 이로써 식민지 조선의 교회는 총독부 학무국의 관할을 받는 ‘합법적' 기구로 자리 잡았으니, 법의 일정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반면 총독부의 관할과 통제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1920년대 이후의 교회 활동에 대한 총독부의 간섭이 결코 완화된 것은 아니다.
또한 일제는 전시 체제를 강화하면서 1939년 ‘종교 단체법'을 제국 의회에서 통과시켰다. 이 법은 종교 활동에 대한 국가의 감독을 규정하였다. 그리고 모든 종교가 ‘황도 정신'(皇道精神)과 ‘신국 사상'(神國思想)을 강화하는 데에 이바지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정부는 이 규정을 위반하는 종교 단체를 폐쇄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강압적 종교 단체법의 체제 아래 교회는 1939년 이후 민족이 해방되는 1945년에 이르기까지 줄곧 총독부 당국의 감시 대상이었다.

3-2. 식민지 아래서의 교회 상황

합방 직후 교회는 개항기의 높은 신자 증가율에 고무되었으며,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총독부의 공언을 신뢰하였다. 이에 교회는 지속적인 발전을 예견하면서 교구 분할을 시도한다. 1911년 조선교구(vicariatus apostolicus)는 이름을 서울교구로 바꾸고 충청도 이북 지역을 관할 구역으로 삼는 한편, 대구교구가 새롭게 설정되어 프랑스 선교사 드망즈(Demange, 安世華, 1875~1938년)가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대구교구의 관할 구역은 경상 남북도와 전라 남북도 지방이었다.
그러나 교구 분할 이후 신자들의 증가율은 급격히 둔화하고 있었다. 조선 천주교회 신자 수는 한일 합방 이후 10여 년이 지난 1919년 3·1 운동 당시 88,523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시기 신자 수의 연평균 증가율은 2.10%였다. 이는 개항기의 연평균 증가율 6.98%에 비하여 상당히 둔화한 것이다. 1910년 당시 조선의 출생률은 인구 1,000명당 30.94명으로 집계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한일 합방' 이후 3·1운동에 이르는 시기 조선 교회 신자 증가율은 당시 출생률에도 미치지 못하는 저조한 것으로, 실질적으로 신자 수가 감소하는 현상이 드러나고 있었다. 이 시기 이와 같이 신자 증가율이 감소한 이유는 우선 한일 합방 이후 종교열의 감소를 들 수 있다. 그리고 교회에 대한 일제의 규제도 감소의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또한 식민지 현실에 안주하려는 교회 당국의 안이한 태도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 신자 수의 증감에 관해서는 다음의 도표를 검토할 수 있다.

<표 3> 식민지 시대 조선의 천주교회

연도 신자 수 전년대비
증가율 (%)
본당수 외국인
선교사
조선인
신부
신학생
1910 73,517 3.18 54 47 15 41
1915 84,869 2.27 56 50 18 114
1920 89,333 0.88 56 43 30 158
1926 101,648 2.55 81 51 85 230
1930 110,728 3.66 103 97 65 161
1935 141,052 7.82 130 125 95 225
1940 177,038 3.46 177 168 130 228
1944 179,114 2.26 163 107 133 ?


이 표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조선 교회는 1926년에 이르러 신자 수가 100,000명을 돌파하게 되었다. 그러나 1919년 이후 1944년까지 조선 교회 성장률은 연평균 3.00%에 지나지 않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오히려 신자 수가 감소되는 현상이 빚어지기도 하였다. 1941년의 경우에는 신자 수가 모두 183,262명을 기록했지만, 1944년은 179,114명에 불과하여, 3년에 걸쳐 오히려 4,148명의 신자 수가 감소하였다. 선교사의 추방과 연금 때문에 신부가 주재하는 본당의 숫자도 급속히 감소되었다. 한편, 식민지 시대 조선 천주교 신자들이 조선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매우 미미하였다. 우선 한일 합방 당시 조선의 인구는 대략 1,300만여 명으로 추계되고 있는데, 그렇다면 당시 천주교 신자는 전체 인구의 0.56%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1919년 3·1 운동 때에는 천주교 신자가 전체 인구의 0.53%에 머물고 있었다. 해방 직전인 1944년의 경우에도 여전히 0.71%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표 4> 식민지 시대의 복음화율

적 요 1910.12. 1919.12 1944.5.
인구 수 13,128,780 16,783,510 25,133,352
신자 수 73,517 88,553 179,114
비율(%) 0.56 0.53 0.71
비 고 추정인구



그러나 식민지 시대 조선 교회에서는 교구가 급격히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1920년에는 성 베네딕도 수도회에서 관할하는 원산교구(vicariatus apostolicus)가 설정되었으며, 1937년에는 원산교구에서 연길교구가 나뉘었고, 1940년에는 다시 여기에서 덕원수도원교구(덕원면속구, abbatia nullius)와 함흥교구가 설정되기에 이른다. 1927년에는 미국 메리놀 외방 전교회에서 관할하는 평양지목구(prefectus apostolicus)가 설정되었다가 1939년에 교구로 승격되었다. 1937년과 1939년에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광주와 춘천에 진출하였다. 이와 같이 1920년대와 1930년대에는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선교사들이 대거 입국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서 조선인 성직자들이 교회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점차 높아져 갔다. 조선인 성직자는 1910년에 15명으로 집계되었으나, 1936년에 이르러서는 100명을 상회한다. 그리고 1944년 즈음해서는 조선인 성직자가 132명으로 늘어나 당시 조선에 거주하던 외국인 선교사 102명보다 더 많은 숫자를 기록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현상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미국인 선교사들이 대거 추방된 까닭이기도 하지만, 이후 한국 교회에서 한국인 성직자 숫자는 외국인 선교사 숫자보다 줄곧 우위에 있게 된다.
식민지 시대 조선인 성직자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조선인 성직자가 관할하는 교구의 설정이 요청되었다. 그 결과 1928년에 서울교구장 뮈텔 주교는 황해도 일대에 서울교구에 속하는 준자치적인 감목대리구(地域區, vicariatus foraneus)를 설정하고 감목대리구장에 조선인 성직자를 임명하였다. 이에 황해도 교회에서는 ‘자치기성회'(自治期成會)를 구성하고 교구 독립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조선인 성직자 내부의 불화 등으로 1941년에 감목대리구가 폐지되고 자치 교구 설립은 무산되었다. 한편 대구교구는 1931년에 전주를 중심으로 한 전라도 지역을 대구교구에 속하는 감목대리구로 편성한 바 있다. 이 감목대리구는 1937년에 이르러 전주지목구(prefectus apostolicus)로 발전하였다. 전주지목구 설정은 당시 교황 비오 11세가 추진하던 현지화(localization) 정책과 관련되는 것이다. 전주지목구의 설정으로 조선 교회는 선교사 위주의 교회 운영에서 조선인이 교회를 관리하는 새로운 단계로 넘어가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또한 당시 교회는 자랑스런 전통을 이루고 있는 순교자에 대한 공경이 개항기에도 꾸준히 잇고 있었으니, 이는 일본 제국주의 압제에 맞서 자신의 존재를 재확인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 순교자 공경은 1925년의 ‘조선 순교 복자 79위 시복식' 이후로 더욱 커졌으며, 1931년에는 조선 교회의 뿌리와 전통을 재확인하고 선양하기 위한 조선교구 설정 100주년 경축 대회 행사도 열었다. 1938년에는 ‘조선 순교 복자 현양회'를 발족하여 순교자 신심을 조직적으로 선양하게 된다. 또한 1930년대에 들어와서는 문화 운동을 활발히 진행시켜 나아갔으니, 중앙 출판부를 설치하여 문서 전교와 한국 문화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청년」, 「별」, 「천주교 회보」, 「가톨릭 연구」 등 정기 간행물을 간행, 신자들을 재교육하고 교회의 태도를 밝히는 데에 활용하였다. 또한 ‘가톨릭 운동부'를 두어 적극적인 전교 활동을 하는 한편, 소년 운동, 여성 운동 분야에도 활발히 진출하였다.

3-3. 전시 체제와 교회

1930년대에 이르러 일제는 대륙 침략 정책을 강화하면서 전쟁 수행에 대한 협조를 조선 교회에 강요하였다. 일제는 자신들의 침략 전쟁으로 조선 교회의 정신적 기초를 파괴하고자 하는 것은 물론 인적·물질적 손실을 강요하였다. 이 전쟁으로 조선 교회가 받은 정신적 피해로는 신사 참배의 강요를 들 수 있다. 당시 일제가 이른바 ‘성전'(聖戰)의 총후(銃後)에서 전쟁 수행을 지원하는 정신 전력과 ‘일본 정신' 강화를 강요하는 과정에서 조선 교회는 국민 정신 총동원 연맹의 일환으로 편입되어 갔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총독부의 방침에 따라 ‘일본 정신 발양 주간'을 설정하고, ‘애국일'을 정하여 총후보국(銃後報國)을 강조하였다. 전국 성당에서는 황군의 무운장구를 기원하고 침략 전쟁의 전사자를 위한 위령 미사를 거행하였다. 이렇게 침략 전쟁에 대한 병적 찬양이 진행되면서 순교 정신마저 타락하여 갔으니, 교회 출판물을 통해 순교 정신으로 ‘순국'해야 한다고 강조하기까지 하였다. 한술 더 떠 일제는 전쟁 수행에 필요한 인적·물질적 자원을 공급해 줄 것을 교회에 요구하였다. 지원병제 실시를 ‘축하'하는 데에 교회의 참여를 요구하였고, 젊은 성직자를 비롯해서 전쟁 기간에 많은 신자에게 징집과 징용을 강요하였다. 교회 시설은 침략 전쟁의 도구로 징발되었다. 평양의 주교좌 성당을 비롯해서 대전, 연안, 양양, 신계 성당 등이 군용으로 징발되었다. 그리고 성당의 종을 비롯한 각종 철물을 전쟁 물자로 징발해 갔다. 군용 비행기 헌납 운동을 전개하도록 강요하고, 전쟁 비용을 마련하기 위한 특별 헌금이 교회에서 진행되었다.
일제는 1941년 태평양 전쟁 직후 ‘적성국'으로 규정된 미국 메리놀 외방 전교회 선교사들을 추방했고, 이로써 평양교구는 일대 공백을 맞게 된다. 또한 광주교구와 춘천교구에서 활동하는 아일랜드인 선교사들을 구금하는가 하면,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도 제약하면서 서울교구장직과 대구교구장직 사임을 강요하는 한편, 일본인 교구장으로 교체할 것을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뮈텔 주교의 뒤를 이어 서울교구장에 취임한 라리보(Larribeau, 元亨根, 1883~1974년) 주교와, 드망즈 주교의 뒤를 이은 대구교구의 무세(Mousset, 文濟萬, 1876~1957년) 주교가 교구장직을 사임하게 되었다.
이처럼 전쟁 수행을 위한 일제의 식민 정책이 강화되자 서울교구는 조선인 주교가 임명되도록 노력 한 결과, 1942년 조선인 노기남(盧基南, 1902~1984년) 신부가 서울교구의 주교로 서품되어, 최초의 조선인 교구장(vicarius apostolicus)이 되었다. 한편 대구교구에서는 일반 성직자와 신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일본인 하야사카 구베에(早坂久兵衛, 1887~1946년) 신부가 주교에 취임하였다. 광주교구도 일본인 와키다 아사고로오(脇田淺五郞) 신부가 교구장 대리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조선 교회가 로마 교황청과 비밀리에 교섭한 결과 1944년 홍용호(洪龍浩) 신부는 평양교구장에 서품될 수 있었다. 조선인 주교의 출현은 전시 체제라는 비정상적 상황에서 전개된 일이다. 그러나 1930년대를 전후하여 조선 교회는 박해와 시련을 거치면서 조선인 성직자가 직접 관할하는 교구를 가질 정도로 성장해 갔다. 이 성장을 기반으로 하여 1940년대 조선인 주교가 임명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일제는 교회가 반전 사상을 선전한다는 혐의를 씌우고, 성당에서 바치는 공식 기도마저 일본어로 하도록 강요하였다. 교회 출판물 역시 일본어로 간행하는가 하면, 1939년에는 ‘조선 순교 복자 현양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1944년에는 예수 성심 신학교를 폐교시키고, 1945년 초에는 조선 천주교회 기관지 「경향잡지」를 폐간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