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제2부 교회의 진로와 민족의 수난 -1. 시대의 변화와 교회의 선교 정책(1882-1911년)

문성식 2019. 2. 8. 16:47


제2부 교회의 진로와 민족의 수난


 

1. 시대의 변화와 교회의 선교 정책 (1882~1911년)

 

1-1. 신앙의 자유

 

19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조선의 역사와 교회사는 운양호(雲揚號) 사건을 계기로 일대 전환을 맞게 되었다. 1876년 조선 왕국은 일본과 강화도 조약(병자 수호 조약)을 맺음으로써 외국에 문호를 개방하게 되었다. 그 후 조선은 1882년에 미국과 통상 조약을 체결했고, 유럽의 여러 나라와 조약을 체결하면서 1886년에는 프랑스와도 조약을 맺었다. 이로써 조선 왕국은 세계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함과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최말단에 편입하게 되었다.
조선에 교회가 설립된 18세기 말엽 이래 교회의 최대 관심사는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문제였다. 교회에서는 신앙의 자유가 인간의 기본권으로서 국법에 우선함을 주장해 왔다. 그러나 성리학적 철학을 기초로 하여 성립되고 유지되던 당시 조정에서는 종교나 신앙에 대한 성리학적 가르침을 정부의 의무와 권리로 간주하고 있었다. 이로써 조선에서는 종교와 정치가 일치를 이루고 있거나 종교가 정치에 예속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조선 왕조에서는 신앙이나 사상에 관한 문제도 정치의 일환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정부는 성리학 이외의 종교를 규제했고, 신앙의 자유를 관철하려는 교회와 이를 계속 억압하려는 조정 사이에 마찰이 빚어지게 되었다. 또한 당시 조선 왕조에서는 인간의 기본권에 관한 사상이 발달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은 천주교 신앙을 법으로 금지하고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와 탄압에도 천주교는 신앙의 자유를 축차적으로 성취해 갔다.
한국 천주교회사에서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과정은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 설명할 수 있다. 그 첫째 단계는 순교를 통한 신앙 자유 획득 운동이다. 이 첫 번째 단계는 신앙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시기였다. 박해 시대의 여러 순교자를 비롯하여 수많은 신자가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해 투쟁하였다. 이 시대의 신자들은 신앙의 자유가 인간의 당연한 권리이며, 국법에 우선함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양심법에 근거한 이들의 주장은 당시의 국법으로 말미암아 용납될 수 없었고 오히려 많은 이가 순교하게 되었다. 그들의 죽음은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려는 결의의 표현이었으며, 인간의 양심을 규제하는 그릇된 법에 대한 저항이었다. 이러한 노력은 뒷날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는 데에 아주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두 번째 단계는 개항(문호 개방) 이후부터 시작되고 있다. 이 두 번째 단계는 신앙의 자유를 묵시적으로 인정하는 단계이다. 개항이 신앙의 자유를 보장해 주지는 못하였다. 개항 이후 조선이 외국과 맺은 여러 조약에서도 조선인의 신앙의 자유에 관한 명백한 규정은 없었다. 조선이 외국과 맺은 극히 일부의 조약에 규정된 종교에 관한 조목은 어디까지나 한국에 나와 있는 외국인을 대상으로 한 것이지, 조선인에게도 신앙의 자유를 용인한 것은 아니다.
조선인 신자들에게 신앙의 자유가 묵시적으로 용인된 때는 1882년이었다. 이 해에 교회는 인현서당(仁峴書堂, 韓漢學校)을 설립하였다. 블랑(Blanc, 白) 주교가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으로 취임한 이듬해인 1885년에는 서울과 경상도에 고아원을 설치했고, 서울에는 양로원을 세웠다. 또한 원주 부엉골에 신학당(神學堂)을 세워 조선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처럼 교회는 1882년 이래 조선 사회 안에서 공공연히 봉사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으니, 한국 교회는 교회가 세워진 후 100년 만에 신앙의 자유를 묵인받기에 이르렀다. 신앙의 자유가 묵인된 것은 이처럼 한불 조약(韓佛條約) 체결 이전의 일이다. 한불 조약은 조선에 강요된 불평등 조약의 하나였으나, 1886년 조선과 프랑스 사이에 한불 조약이 맺어짐으로써 프랑스 선교사들의 활동도 부분적으로 보장되어 갔다. 이 조약으로 프랑스인 선교사들은 제한된 지역에서나마 조선 정부가 발행하는 호조(護照: 여행권)를 가지고 여행할 수 있었다. 1888년부터는 선교사들이 상복을 벗고 성직자 옷차림으로 선교하게 된다.
신앙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한 마지막 단계로는 1895년의 정부 사면령을 들 수 있는데, 정부에서는 1866년 박해 때에 순교한 일부 신자들에 대한 사면령을 발표하였던 것이다. 사면 대상인 신자들은 소수에 불과하지만 이는 신앙의 자유를 공인하기 위한 사전 조처로 해석되었다. 또한 이 해에 조선교구 제8대 교구장인 뮈텔(Mutel, 閔德孝) 주교는 고종을 만날 수 있었다. 이때 고종은 1866년의 박해(병인박해)에 대하여 유감의 뜻을 표하며, 뮈텔 주교에게 친선을 제의하였다. 군주 국가의 국왕의 이러한 태도는 천주교 신앙의 자유를 실제로 공인하는 것을 뜻하였다. 뮈텔 주교는 1895년을 마침내 박해가 막을 내린 때로 기록하였다.
이러한 정세 변화가 법적으로 확인된 것은 1899년에 조인된 ‘교민 조약(敎民條約)'에서다. 이 교민 조약은 조선 정부의 관리인 정준시(鄭駿時)와 뮈텔 주교 사이에 체결된 것으로, 이 조약으로 조선에서 신앙의 자유가 법적으로 공인되었고, 신자들도 일반인과 동등한 권리와 의무가 있음이 인정되었다. ‘교민 조약'은 1904년 ‘선교 조약(宣敎條約)'을 체결함으로써 더욱 보완되었다. 이 ‘선교 조약'에 따라 선교사들은 개항장 이외의 다른 지역에서도 토지를 매입하고 건물을 세울 수 있는 권리를 보장받았다. 이와 함께 개항기 교회에서는 신앙의 자유를 확대하기 위한 노력들이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개항기 교안(敎案)의 과정에서도 일부 확인되었다.

 

1-2. 개항기 선교와 정교 분리 정책

 

개항기 조선 선교를 담당하고 있던 선교회는 프랑스의 파리 외방 선교회였다. 선교사들은 조선 사회에 정교 분리론을 적용하고 있었다. 그런데 제국주의 침략이 강화되던 시절, 선교 지역의 정교 분리 정책은 두 가지 상이한 특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가톨릭 선교 발전과 제국주의의 확산이 가질 수 있는 상호 관계를 단절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주장하던 정교 분리 정책은 비인간적 식민지 통치에 대한 종교계의 반발을 사전에 봉쇄하기 위한 시도로도 강조되었다. 교회의 정교 분리 정책은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 정책에 교묘하게 이용당하고 있었다.
한편 정교 분리론은 성속 이원론(聖俗二元論)과 일정한 관계를 맺으며 전개되었다. 당시 프랑스 교회의 보수적 신학 사조는 성속 이원론의 경향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 신학 사조는 조선에 주재하던 프랑스 선교사들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미쳤는데, 그들은 성과 속, 현세와 천국을 뚜렷이 가르고 교회는 성(聖)의 영역을 관장하고 정부는 속(俗)의 영역을 관장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당연한 결과로 선교사들은 조선의 정치 상황보다는 영혼 구제에 우선적 가치를 두게 되었다.
그런데 한일 합방을 전후하여 일본의 식민지 당국자들은 ‘정교 분리 원칙'을 내세워서 ‘선교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대신 정치 문제에 관한 종교의 관여를 사전에 차단하고자 하였다. 일본 식민지 당국자들은 조선의 침략에 대한 국제 여론의 악화를 막기 위해 조선 주재 선교사들에게 ‘선교의 자유'를 약속하면서 회유하였다. ‘한일 합방' 당시의 선교사들은 가톨릭이나 개신교를 막론하고, ‘선교의 자유'만을 보장해 준다면 어떠한 정치적 상황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선교의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일본 식민지 당국자들의 약속을 믿었다. 교회는 식민 당국이 선교 자유에 관한 자신의 기득권을 인정해 주겠다는 공언에 안심하였다. 또한 선교사들은 조선 왕조의 전제적 통치보다는 일본 식민지 당국의 개명된(?) 통치가 신자들에게 유리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당시의 선교사들은 신앙의 보편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으로 복음 선포에 유리한 조건만을 찾았다. 그들은 신앙의 보편성만을 강조한 나머지 선교 지역의 정치 사회 문화적 개별 조건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타종파의 선교사와 비교해 볼 때 선교 지역의 복음 선포에도 성공하지 못하였다.
일제 침략이 강행되던 단계에서 선교사들은 개항기 이래 강조되어 오던 정교 분리 원칙에 따라 조선에서 일본 식민 통치를 합법적인 것으로 용인함은 물론, 독립운동을 정치 활동의 일환으로 인식하여 신자들의 독립운동도 ‘정치 활동'으로 확대 해석하였으며, 신자들의 이러한 ‘정치 활동'이 선교의 자유를 저지하거나 교회 성장을 저해할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들은 조선인 천주교 신자들의 합방과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반대 여론을 적극적으로 무마하고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저지하려 하였다. 이로써 그들은 또 다른 ‘정치적 행동'을 감행하는 자기 모순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