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자들의 생활
3-1. 신앙생활
박해 시대 신앙의 핵심은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이었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가지고 있던 유일신 하느님에 대한 신앙은 절대적 하느님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었으며, 하느님 이외의 모든 존재를 상대화하는 역할을 하였다. 그들은 당시 사회에서 절대적 존재로 인식되고 있었던 왕권(王權)을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했고, 성리학적 윤리 규범의 권위에 도전하였다. 신자들 가운데 몇몇은 당시 사회를 지탱하는 신분제의 권위를 부정하고 이를 타파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국가의 부당한 명령보다는 하느님의 가르침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이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그들은 천주교를 금하는 국법을 어긴 죄인이 되어 “양반 사대부에게 벌을 받을지언정 하느님께 죄짓기를 바라지 않는다.”며 죽음의 길을 택하였다. 그들은 천주교의 가르침을 사학(邪學)으로 규정하던 지배층에 대항하여, 천주교만이 정학(正學)임을 강변하기도 하였다.
한편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조선이 가지고 있는 그 밖의 정신적 문화적 유산과 자신의 신앙을 조화롭게 해석할 수 있었다. 당시 사회에서 가장 존중되던 가치는 충효였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사육신이나 심청이처럼 죽을 수도 있음을 강조해 왔다. 여기에서 그들은 하느님을 대군대부로 섬기는 충효의 영성을 개발시켰다. 그리고 그들은 섬김의 생활을 통해서 사주구령(事主救靈`: 주를 받들고 자신의 영혼을 구함)의 영성을 실천하였다. 그들은 미래를 준비하는 믿음살이와 살림살이를 통해서 종말론적 영성을 표현하였다.
그런데 당시 집권층에서는 천주교를 불충불효의 종교로 규정했고, 무부무군(無父無君)이라 매도하였다. 이와 같은 표현은 당시의 가치관에 입각하여 볼 때 치명적일 수 있었다. 그러나 박해 시대의 천주교자들은 이에 대한 대항 논리(對抗論理)를 구사하고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이 대충대효(大忠大孝)를 받아야 할 대군대부(大君大父)임을 밝혔다. 이 대항 논리에서 살펴볼 수 있는 것처럼, 그들의 천주교 신앙에서는 충효가 전제되고 있었다. 그들은 충효라는 전통적 가치를 하느님께 적용했고, 하느님의 충신이 되고 효자가 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기꺼이 버릴 수 있었다. 그들은 하느님의 선비와 열녀가 되어서 하느님에 대한 의리를 지키고자 하였다. 이처럼 그들은 조선의 전통적 가치와 그리스도교 신앙을 창조적으로 조화시켜 나갔다.
그들이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실천한 충효는 유교적 가치일 뿐 아니라 불교적·무교적(巫敎的) 가치이기도 하였다. 그들은 당시의 사상에서 적지 않은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신앙을 키워 갔다. 당시 조선 문화는 불교나 도교, 민간 신앙 등 여러 종교 문화 전통을 가지고 있었다. 이 종교 문화 전통에서 논하는 천당이나 지옥, 무소유나 해탈, 무위(無爲)나 해원(解寃) 등의 개념은 초기 교회의 신자들이 자신의 교리를 이해하는 데에 배경적 사상으로 작용하였다. 물론 그들은 전통적 종교와 자신의 신앙을 뚜렷이 구별했지만, 그들의 신앙 안에는 ‘해원'을 비롯한 전통 사상적 요소가 발견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가 창설된 직후부터 조정에서는 천주교 신앙을 금지하였다. 따라서 초기 교회의 신도들은 조정의 탄압을 각오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실천해 갔고 신심 생활을 계속해 갔다. 그들의 이러한 신앙의 실천과 신심 생활의 바탕이 되어 준 것은 교회 서적이었다. 조선 교회는 창설 직후부터 일반 민중을 위하여 한글로 교리서를 번역하였다. 교리서 번역에 가장 앞장 선 인물은 최창현(崔昌顯)이었다. 원래 중인 출신인 그는 일반 신자들을 위하여 한문 교리서를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당시 신자들에게 널리 읽힌 책으로는 「성경직해광익」(聖經直解廣益)을 들 수 있다. 일요일과 주요 축일 때에 읽는 성서가 이 책에 간추려져 있었고, 여기에 부분으로 발췌되어 수록된 성경은 4복음서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분량이다. 당시 신자들은 이와 같이 한글로 번역된 복음서를 읽고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었다.
또한 당시 교회에서는 「성교일과」(聖敎日課),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功課)를 비롯한 여러 기도서가 번역되어 신자들에게 읽히고 있었다. 기도는 신자들에게 중요한 일과 가운데 하나였으며 영적 활동을 뜻하는 것이다. 그들은 날마다 아침 저녁으로 기도를 드리도록 배웠으며, 교회 창설 초기부터 삼종경과 묵주의 기도도 바쳤다. 그들은 천주십계를 기도처럼 외우며 날마다 자신의 생활을 점검하였다. 그들의 이러한 기도 생활은 성사의 은총을 받기 어려웠고 성직자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드물던 당시 사회에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을 지속시켜 주는 원동력이 되었다.
또한 박해 시대의 교회에서는 「성녀 아가타」, 「성녀 빅토리아」와 같은 로마 시대 순교자들의 전기를 읽으며 신앙을 증언할 용기를 길렀으며, 「성녀 데레사」와 같은 성인전을 통하여 종교적 열정을 본받고자 자신을 불태우고 있었다. 또한 그들은 여러 종류의 묵상서를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의 수난을 묵상하며 예수 성심에 관한 깊은 신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윤지충을 비롯한 한국 순교자들의 기록을 소중히 간직하며 순교자들을 자신의 모범으로 삼고자 하였다. 1801년에 순교한 이순이 ‘누갈다'(Lutgarda)의 애절한 편지를 필사하여 서로 돌려 보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성모 신심, 예수 성심 신심, 순교자 신심 등을 특별히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신심은 박해의 고통을 이기게 하여 주었으며, 죽음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순교자가 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
그들은 복음의 증인이기도 하였다. 구원에 대한 희망과 열정을 가지고 그들이 터득한 기쁜 소식의 기쁨을 이웃과 나누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천주교를 엄하게 금한 당시 이웃에 천주교 신앙을 전한다는 것은 죽음을 각오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의 기쁨으로 죽음의 공포를 잊을 수 있었기 때문에, 자신의 신앙을 고백하며 한 형제가 되기를 이웃에 권하였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이 미사에 참여한다는 것은 특별한 은혜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주일과 축일이면 신자들은 공동 집회를 비밀리에 열었으며, 여기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숫자도 해를 거듭할수록 늘어 갔다. 초기 교회의 신자들은 주일과 대축일뿐만 아니라 일반 축일에도 수시로 모여 공동 기도를 드렸다. 그리고 이러한 집회에 참여하지 못한 신자들은 대송(代誦)으로 성로신공(聖路神功, 십자가의 길)을 하거나, 주님의 기도 66번 또는 성모송 99번을 바쳤다. 이와 같이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기도 중심의 신앙생활을 하였다. 그들은 현세의 가치를 거부하고 내세에 대한 간절한 소망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
3-2. 신앙과 사회의식
신자들은 유일신이며 삼위일체적인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터득하고 실천하였다. 이들이 터득한 이와 같은 하느님의 존재는 조선의 사상계에 종전에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가르침이었다. 물론 선교의 초기에는 보유론적 관점에서 ‘천주', 곧 하느님을 설명하며, 유교와 천주교의 조화로운 관계를 설정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그러나 보유론의 입장과는 전혀 다르게 천주교의 천주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신자들이 초기 교회부터 출현하고 있었다.
교회 창설 당시의 신자들은 ‘창조주 천주'의 존재를 중심으로 하여 신관(神觀)을 인식하였다. 그리고 중보자(中保者)에 대한 이해를 강화해 나갔다. 이러한 새로운 신관은 새로운 인간 이해의 실마리가 되었다. 그들은 인간을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평등한 존재로 이해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인간관의 터득은 새로운 인간 관계에 대한 규정으로 이어졌다.
교회 창설 초기부터 신자들은 인간관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인간이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태어난 존귀한 존재라는 가르침에 감격하였다. 그들은 인간의 마음에 하느님께서 부여해 주신‘마음법'[良心法]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사람된 위(位)', 곧 인격을 가지고 있는 존재임을 확인하였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느님 앞에 모든 이가 평등함을 행동으로 드러냈다. 세례를 받고 신자가 되면 그들은 서로가 한 형제로 뭉쳐 나아갔다. 신자들이 이룩한 신앙 공동체 안에는 양반도 중인도 없었다. 양인이나 노비, 백정들도 양반과 함께 서로를 ‘신앙의 벗'[敎友]으로 부르며 평등하게 지냈다. 남성과 여성, 남편과 아내가 상하 수직적 관계가 아닌 수평적 관계임을 알았고, 서로가 인간으로 존중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1790년대에 영세 입교한 백정 출신 황일광(黃日光, 1756~1802년)은 입교 후 교우들한테 받은 평등한 대우에 감격하여, 자신은 지상 천국에 살고 있다고 고백하기도 하였다. 또한 ‘유군명' 등과 같은 신자들은 천주교에서 ‘인간 평등'을 가르치는 것으로 해석하여 영세 직후 자신이 거느리던 노비들을 해방시켰다. 우리나라에서 사노비가 해방된 때는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 때이다. 이보다 1백 년을 앞서 천주교 신앙은 노비를 해방시키는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여기에서 당시의 천주교 신앙은 ‘종교적 복음'임과 동시에 일종의 ‘사회적 복음'으로 인식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사회적 복음에 대한 인식 때문에 1790년대 이후의 교회에서는 신분이 낮은 민중들이 신자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박해 시대의 신자들은 교우촌을 형성하여 모듬살이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1791년의 박해를 피해 다른 지역으로 이주한 신자들이 모여 살게 됨으로써 시작되었다. 1801년의 박해 때에 황사영이 피신했던 배론의 경우에도 내포의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서 모여들면서 형성된 곳이다. 이것이 교우촌의 초기 형태로 배론 이외에 전라도 차돌백이, 경상도 신나무골 등은 대표적 교우촌이다. 교우촌은 회장의 지도 아래 생산과 소비를 공동으로 영위하기도 하였다. 박해 시대 교우촌에서 재산을 공유하였다는 증언도 있다. 개항 직후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지 않은 시기에 조선에 들어왔던 한 프랑스 선교사는 이 교우촌을 사도 시대의 신앙 공동체에 비유하였다.
“신입 교우들의 협동심은 감탄스럽습니다. 그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 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이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 교회에 와 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애찬을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이곳의 예비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1889. 4. 22. 보두네 신부의 편지).
신자들은 박해 때에도 어려운 이웃과 부모 잃은 어린이를 힘써 돌보았다. 또한 죽을 위험에 놓여 있는 사람들을 만나면 힘써 대세(代洗)를 주어 그들의 영혼을 구제하고자 하였다. 1852년 이래 성영회(聖찾會)를 조직하여 고아들을 위탁 양육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선의 중요함을 터득한 조건 없는 사랑의 실천자였다. 초기의 신자들이 천주교 신앙을 갖게 된 배경에는 이와 같은 사회적 특성도 작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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