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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중산행 | 지리산 뱀사골 르포] 비를 기다리던 이무기 뱀사골에서 죽다

문성식 2012. 8. 1. 11:34
[테마특집 우중산행 | 지리산 뱀사골 르포] 비를 기다리던 이무기 뱀사골에서 죽다
성삼재~뱀사골 19km, 길지만 어렵지 않은 명불허전 계곡산행

비를 맞고 싶을 때가 있다. 꼭 우울할 때 그런 건 아니다. 톡! 톡! 토도독! 나뭇잎 위로 떨어지는 생기발랄한 방울방울이 한없이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런 날은 산에 사람이 없다. 사람들 소리로 가득하던 산길을 빗소리가 대신한다. 계곡은 요동친다. 비가 산을 만나면 격렬해진다. 너무 보고팠다며 거침없이 몸을 섞는다. 간혹 산은 거칠어진다. 결합에 조금이라도 방해가 되면 용서치 않는다. 위험하면서도 매혹적인 자연의 정사를 보러 가는 이의 발걸음엔, 평소와 달리 긴장과 설렘이 담겨 있다.


우중산행은 우는 산행이기도 하다. 속 깊이 담아둔 슬픔, 괴로움, 분노를 꺼내 남몰래 빗물 에 흘려보내는 산행이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더 이상 꾸역꾸역 밀어 넣을 데 없는 아픔을 끄집어내 흘려보내는 것이다. 우중산행은 스스로 자신을 도닥거리고 받아들여 내가 나를 되찾는 시간이다. 세상 속에서 나란 존재가 희미해져 갈 때, 우중산행을 권한다.


▲ 뱀의 몸놀림처럼 묘하고 화려한 뱀사골 계곡을 지난다. 계곡 등산로에는 철다리와 데크가 있다.

어머니 산을 찾는 산꾼 자식들


비는 오지 않았다. 우중산행 특집인데 비 오는 산이 없다. 가뭄이다. 마감은 다가오고 산으로 간다. 비가 온다는 지인의 목소리만 듣고 달려간 곳은 지리산이다. 산꾼에게 지리산은 특별하다. 몇 박 며칠씩 대피소에서 자며 종주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유일한 산. 종주에 담긴 많은 추억들. 결국엔 카타르시스가 되어 묵힌 응어리를 풀어준 거대한 자연의 풍경들. 풋내기적 첫 지리산 종주를 마치고 절뚝거리며 마셨던 얼음 막걸리의 잊지 못할 맛. 이것들이 범벅이 된 지리산은 ‘어머니 산’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이미지다.


성삼재로 든다. 비는 그치고 잔뜩 구름만 끼었다. 주말 아침 성삼재에는 등산객보다 관광객이 많다. 종주하려는 산꾼들은 이미 새벽에 다 지나갔을 터다. 성삼재 산행은 편해서 좋다. 한편으론 뭔가 반칙을 하는 것만 같다. 해발 1,100m 능선에서 산행을 시작한다는 뭔가 묘한 죄책감. 화엄사 들머리에 비하면 성삼재는 그만큼 산행이 편하다. 차가 다닐 정도로 넓은 비포장 임도를 따라 오른다.


▲ 삼도봉에서 본 불무장등. 지리산 특유의 부드러운 산등성이가 구름 사이로 뻗었다.

참나무숲에서 진한 냄새가 난다. 나무 냄새, 꽃 냄새, 흙 냄새, 풀 냄새 등 온갖 냄새가 섞여 있다. 깊숙이 들이마시면 산이 사람의 속을 어루만짐을 느낄 수 있다. 마치 할머니 약손처럼 한없이 투박하고 원초적인 자연의 손길이 사람의 병든 속을 치유한다.


보도블록을 정비하고 있어 시끄러운 노고단대피소를 얼른 지난다. 노고단으로 이어진 돌계단이 지리산을 탈 체력이 있는지 묻는다. 걸음으로 답하며 묵묵히 오른다. 두루뭉술한 지리산의 산세가 시원하게 드러나는 노고단에서 먼 산을 본다. 반야봉, 삼도봉, 천왕봉이 구름 속에 묻혔다. 비는 아직 오지 않는다. 노고단의 많은 사람 중에 비가 오지 않음을 안타까워하는 이는 우리들뿐일 것이다.


본격적인 능선 종주다. 시끄러운 관광객들도 안녕이다. 고산답게 능선은 여전히 신록이다. 조릿대가 늘어선 좁은 길을 가볍게 지난다. 옛날처럼 사람 키만 한 대형배낭을 메고 오는 사람은 드물다. 대피소에서 햇반과 물, 라면, 간식을 팔고 담요를 대여해 주니 40리터 배낭만으로도 종주가 가능해졌다. 다만 대피소 예약이 관건인데, 금·토요일만 피하면 대체로 예약 없이도 묵을 수 있다.


간간이 빗방울이 날려 일행의 얼굴에 미소가 감돈다. 때로는 구름 사이로 햇살이 내리쬐며 일행을 실망시킨다.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산에서 비를 원했던 적이 언제 있었던가. 늘 그 반대였었다. 산에 갈 때만 되면 불청객처럼 따라다니는 것 같았던 빗줄기가 막상 필요하니 없다. 사람이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하늘의 뜻에 맡기고 산에 집중한다. 구름이 안개마냥 점령한 돼지령을 지난다. 예로부터 멧돼지들이 좋아하는 둥굴레가 많이 나는 곳이어서 유래한다. 원추리 뿌리를 캐먹는 멧돼지들의 모습이 자주 목격돼 돼지평전이 됐다는 설도 있다.


▲ 주능선의 철쭉터널을 지난다.

능선에는 조릿대, 철쭉, 신갈나무 등 비교적 작고 빼빼한 수종이 많다. 가끔 발길을 세우는 건 구상나무다. 무게감 있는 진중한 굵기와 곧은 심지에 초록의 이끼가 뒤덮고 있어 신령스러운 분위기다. 산악회 단체들이 식사하느라 떠들썩한 곳은 임걸령이다.


전설에 따르면 임걸령은 사람 이름에서 유래한다. 도적이었던 임걸년은 팔도행상의 물건을 일부만 털었고, 또 그것을 모아 빈민을 구제한 의적이라고 한다. 그러나 실제 임란 당시 어떤 행적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조선 선조 때 남원의 의병장 조경남이 지은 <난중잡록>에는 1594년 6월 ‘이때에 영남사람 임걸년이 도당을 모아 지리산 반야봉에 떼 지어 출몰하며 도적질을 하였다’고 적혀 있다. 임걸년이 와전되어 임걸령이라 한다.


조릿대와 뱀 껍질 같은 비늘의 신갈나무가 흐느적거리는 숲을 올라서자 노루목이다. 반야봉을 다녀올까 고민하다 울릉도에서 다쳤던 무릎 인대가 못미더워 직진한다. 삼도봉에 닿자 피부가 따가울 정도로 힘차게 햇살이 내리쬔다. 우중산행은 포기하라는 으름장이다. 구름 사이로 내려다보는 불무장등과 목통골의 굴곡이 매끄럽다. 누군가 녹색 이불을 덮고 누워 자는 것 같은 모양의 산등성이다.


한참 데크 계단을 내려서서 만나는 화개재가 반갑다. 지리산 능선의 장터로, 경남에서 연동골을 따라 올라오는 소금과 해산물, 전북에서 뱀사골로 올라오는 삼베와 산나물 등을 물물교환하던 장소다. 뱀사골 산행의 시작이다. 뱀사골대피소 자리에는 무인 탐방지원센터가 있다. 일종의 무인대피소다. 이끼 낀 구상나무를 시작으로 고사리와 이끼가 점령한 원시계곡이 모습을 드러낸다. 건기라 물이  말랐나 싶더니 더 내려가자 아기자기한 물줄기가 싱싱한 이끼와 잘 어울린다.


▲ 자연미가 살아 있는 뱀사골 상류.

독약 묻은 옷을 스님에게 입혀


뱀사골은 이름 그대로 뱀이 죽은 골짜기라는 의미라는 것이 관리공단 측의 설명이다. 1,300여 년 전, 송림사라는 절이 있었는데 1년에 한 번씩 스님 한 명을 뽑아 칠월백중날 신선바위에서 기도드리게 하면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 하여 매년 행사를 하였다. 이를 기이하게 여긴 고승이 독약이 묻은 옷을 스님에게 입히고 신선바위에서 기도드리게 했다. 그날 새벽 괴성과 함께 기도드린 스님은 사라지고 용이 되지 못한 이무기가 용소에 죽어 있었다. 이후 뱀이 죽은 골짜기라 하여 뱀사골이라 부르게 되었고 억울하게 죽은 스님의 넋을 기리기 위해 ‘절반의 신선’의 준말로 마을을 ‘반선(伴仙)’이라 부르게 되었다.


너덜과 계곡이 엉키며 길이 희미해지다가 다시 선명해진다. 등산로 곳곳이 사태로 무너졌다. 무너져 내린 바위에 깔린 계곡은 뱀사골의 명성에 오점을 남겼다. 지난해 기록적인 폭우로 골이 망가진 것이다. 하류는 복구작업을 통해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상류는 여전히 폭격을 맞은 것 같은 모습이다.


골은 내려설수록 물이 불어나며 제 미모를 뽐낸다. 많은 철다리가 있어 골을 왼쪽 오른쪽 건너다녀야 한다. 다리를 건널 때마다 드러나는 뱀사골의 맑고 깊은 매력에 놀란다. 보기에도 시원한 청록색 소는 간장소다. 건기라 물이 부족한데도 특유의 청순미가 살아 있다. 옛 소금상인들이 하동 화개장터에서 화개재를 넘어오다 소금을 빠뜨려 간장이 되었다는 이야기와, 소의 물을 마시면 간장까지 시원해진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 참나무숲 사이로 난 지리산 주능선을 걷는다. 우리나라 산꾼들이 좋아하는 고전적인 종주길이다.

국립공원만 아니라면 홀라당 벗고 풍덩 뛰어들고픈 소가 널렸다. 하류로 내려서자 데크길이 아예 기찻길처럼 계곡 위로 길게 뻗어 있다. 소박한 계곡, 화려한 암반, 아름다운 소… 계곡은 수식어가 모자랄 정도로 길고 다양한 미모를 뽐낸다. 실로 비가 잦은 한여름에 찾는다면 누군들 반하지 않고선 배겨내질 못할 것이다.


협곡 사이에 있는 제승대의 은밀한 풍경과 탁용소의 넓고 깨끗한 암반을 눈에 담는다. 큰 뱀이 목욕한 후 허물을 벗고 용이 되어 승천하다 이곳에 떨어져 100m나 되는 비늘 자국이 생겨나고, 이 자국 위로 흐르는 물줄기가 용이 승천하는 모습과 닮았다고 해서 유래한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긴 뱀사골의 끝이 보인다. 화개재에서 9.9km를 내려서자 지리산국립공원 북부사무소다. 우중산행은 이루지 못했다. 대신 죽은 뱀이 남긴 교태 넘치는 계곡이 발바닥을 뜨겁게 달군다.


▲ 지리산 뱀사골 개념도

산행 길잡이 뱀사골은 오르는 데만 4시간이 넘게 걸리는 긴 골이다. 깊은 소도 많지만 데크정비가 잘 돼 있어 여간 많은 비가 내리지 않고선 통제되지 않는다. 다만 상류로 갈수록 수해에 무너진 계곡가 바위 더미가 많아 주의해야 한다. 편의성으로 보면 성삼재를 들머리로 하고 뱀사골을 날머리로 하는 것이 편하다. 10명 중 9명은 성삼재를 들머리로 택한다.


19km로 당일산행치곤 길지만 완만하거나 내려가는 길이 많아 어렵진 않다. 다만 8시간 정도 걸리므로 시간 안배에 신경 써야 한다. 국립공원답게 길 찾기는 쉽지만 뱀사골 상류는 길이 약간 희미해 주의해야 한다. 뱀사골대피소 자리에 무인대피소가 있어 만약의 경우 자고 갈 수 있다.


교통 구례공용터미널에서 성삼재행 버스가 1일 8회(03:30, 6:00, 08:20, 10:20, 11:40, 13:40, 15:40, 17:40) 출발한다. 30분 정도 걸리며 4,000원이다. 뱀사골에서 남원시내로 가는 버스가 1일 10회(06:45, 07:30, 08:50, 10:20, 12:05, 13:25, 13:45, 16:05, 17:10, 18:25) 출발한다. 1시간 정도 걸린다. 택시로 갈 경우 구례구역에서 성삼재까지 3만~4만원 정도 받는다. 뱀사골에서 남원이나 구례로 택시를 타고 갈 경우 4만~5만원 정도 받는다. 문의 구례 엄광준 기사(011-610-9803), 콜밴 정희승 기사(010-6643-1177). 수도권 기준 3~4명이 성삼재로 간다면 남원역에서 택시를 타고 가는 것이 유리하다. 전화로 미리 요금을 조율하는 것이 좋다. 남원 김회택 기사(010-5655-9449).


숙식(지역번호 063) 뱀사골 입구에 뱀사골산채식당(626-5600), 중앙식당(625-8906), 지리산식당(625-8800), 뱀사골식당(636-3356) 등이 있다. 숙소로 지리산뱀사골랜드(625-2600), 뱀사골산장(625-0515), 통나무산장가든(626-3791) 등이 있다. 노고단대피소의 경우 지리산 주능선의 대피소 중에서 가장 여유 있는 편이다. 그러나 국립공원관리공단 홈페이지(www.knps.or.kr)에서 미리 예약해야 한다. 예약자는 저녁 7시까지 입실해야 하며 늦을 경우 미리 전화(061-783-1507)해야 한다. 평일은 자리가 여유 있지만 간혹 단체 예약에 의해 자리가 없는 경우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