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맑은 날보다 더 생동감 넘치고 싱그러운 비오는 날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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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다섯 손가락’은 “비 오는 수요일엔 빨간 장미를” 연인에게 선물하고 싶다고 노래했다. 왜 그랬을까. 비 오는 날 만큼 붉은 장미가 돋보이는 날도 없기 때문이다. 온 세상이 젖어들어 더욱 생생한 빛깔을 뽐내는 날이다. 장미도 이런 날엔 더욱 붉고 소담스럽게 보인다. 이런 날 꽃을 받아들면 설렘은 아마 두 배가 될 것이다.
흔히들 사진 찍을 땐 비 오는 날은 웬만하면 피하고 싶어 한다. 필자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은 대개 하늘이 어둡고 시야가 흐려져서, 사진을 잘 찍기 어렵다. 출장 갔는데 마침 비가 오면 더욱 난감하기 이를 데 없다. 주제에 걸맞은 사진을 빗속에서 찍기란 쉽지 않으니 말이다.
생각이 바뀐 건 몇 년 전 울릉도에 가서다. 하필 비가 줄곧 내리던 때 울릉도로 출장을 가게 됐다. 비가 계속 쏟아지니 바다를 찍기도 쉽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관선 자연 굴 옆 바다 앞에서 비가 잦아들기를 기다렸다. 계속 그 주위를 서성대다 장대비가 이슬비로 변할 무렵부터 카메라 셔터를 누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참을 찍고 들어와 나중에 사진을 들여다보며 ‘생각보다 멋진데!’라고 속으로 감탄했던 게 기억이 난다.
비가 내리는 하늘빛은 흐리기 마련이다. 그 하늘을 반영한 바닷물의 빛깔이 오히려 평소보다 은은하고 아름답게 나온 것이다. 게다가 주변의 돌들은 빗물에 젖어 검고 생생하게, 반대로 바닷물 중간 중간 솟아 있는 바위는 더욱 하얗게 빛나는 모습으로 표현됐다. 바다 표면 위로 군데군데 파문을 그리는 빗방울도 근사했고. 비 내리는 날씨 덕에 뜻밖에도 동양화처럼 몽환적인 바다 사진을 건진 셈이었다.
그 후로도 몇 번은 더 울릉도 출장을 갈 기회가 있었지만 이때보다 더 맘에 드는 사진을 건진 적은 없었다. 쏟아지는 햇살 아래 같은 바다를 찍은 적도 여러 번이었지만, 이 사진에는 항상 못미쳤다. 그래서 기왕 비 오는 날 사진을 찍게 됐다면, 좀더 적극적으로 날씨를 활용해 멋진 사진을 찍어보라고 말하고 싶다.
그럼, 비 오는 날 우중산행을 하면서 사진을 찍을 땐 어떨까. 여러모로 신경 쓸 게 늘어나긴 하지만, 그만큼 더 재미있는 사진을 찍을 기회다. 일단 이런 환경에서 찍은 사진은 꽤 드물다. 잘 찍지 않는 사진인 만큼 눈길을 끄는 사진이 될 수 있다. 몇 가지만 조심하면 평소보다 더 멋진 사진을 건질 수도 있다.
카메라가 젖지 않도록 단단히 준비하자
가장 중요한 건 디지털 카메라가 물에 젖지 않도록 방수대책을 마련하는 것이다. 보슬비처럼 빗방울이 가늘 땐 입고 있는 판초 우의 · 우비로 감싸거나 우산으로 간단하게 비를 막을 수 있겠지만 빗줄기가 굵어지면 얘기가 달라진다. 특히 장마철인 6월 말~8월 초엔 준비를 단단히 해두는 게 좋다. 꼭 필요한 준비물은 방수 카메라 가방, 방수 커버, 방수 팩, 우의, 커다란 수건, 제습제, 삼각대 우산 정도다.
- ▲ 1 파나소닉 DMC-TS4 충격, 방수, 방진, 내한, 위치기록, 방위, 기압, 수심, 고도를 알려주는 기능. 12m 방수. 2 캐논 PowerShot D20 10m 방수. 3 소니 DSC-TX10 5m 방수. 17.9mm의 초 슬림 118g 경량바디로 휴대성 좋음. 4 펜탁스 PENTAX Optio WG-2 12m 방수. 영하 10℃ 내한. 5 올림푸스 뮤 터프 TG-810 10m 방수. 방진설계, 충격흡수 2m. GPS 전자식나침반 탑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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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렌즈·건전지·메모리 카드·충전기 등은 방수 카메라 가방에 잘 넣어 비를 맞지 않도록 한다. 하지만 장시간 비를 맞는다면 아무리 방수가 잘되는 카메라 가방도 100% 습기를 막아주진 못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게 제습제다. 장비를 제습제와 함께 방수 팩에 넣고, 다시 방수 카메라 가방에 넣어 이중으로 습기를 차단하는 것이다.
촬영할 땐 카메라에 방수 커버를 입히고 사진을 찍는다. 이때 카메라에 빗물이 어느 정도는 묻을 수밖에 없다. 미리 준비한 커다란 수건으로 빗물을 중간 중간 닦아주며 촬영하자. 우산도 큰 도움이 되지만, 우산을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만 카메라를 조작하는 것이 번거로울 수 있다.
카메라를 보호하는 방수 하우징
방수를 위한 각종 장비를 사는 비용은 아끼면 안 된다. 비 맞은 카메라를 집에 고이 모셔두었다가는 수리비가 더 나올 수도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 내부에 남아 있는 습기 때문에 메인보드가 부식될 수도 있다. 이를 보완하는 대표적인 장비가 콤팩트 카메라 방수 하우징이다.
방수 하우징 판매사로는 디카팩, 아쿠아팩, 퓨전 FNC가 있다. PVC 소재의 하우징은 수심 10m까지 방수가 되는 데다 버튼 조작도 수월하다. 다만 수심 10m 내에서는 완벽 방수가 되지만 수압이 높은 곳에서는 견디지 못한다. 또 비닐하우징의 특성상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걸리거나 바위에 긁힐 경우 찢길 수 있다.
폴리카보네이트 소재의 카메라 방수 하우징은 방수엔 탁월하지만 대신 가격이 상당히 비싼 데다(50만~500만 원) 무거워서 산행 촬영엔 그리 권하고 싶지 않다.
방수 아웃도어 카메라를 고른다면
요즘엔 아예 방수 카메라를 사려는 사람도 많다. 방수 카메라는 내구성이 뛰어난 제품이 많다. 요즘 콤팩트 카메라는 충격·방수·방진·내한·위치기록·방위·기압·수심·고도를 알려주는 기능까지 갖췄다. 가령 파나소닉의 ‘DMC-TS4’는 12m 물속에서도 방수 기능을 유지하며, 2m 충격에도 지장 받지 않는 등 뛰어난 내구성을 자랑한다. 영하 10℃에서도 안전하고 방진기능은 물론 GPS 시스템을 장착했다.
비 오는 날 산행하면서 촬영할 땐
촬영 방법을 숙지하는 것도 필요하다. 비 오는 날은 어둡다. 그곳이 산속이라면 더더욱 어둡다. 이럴 때 가장 중요한 건 적절한 노출을 확보하는 것이다.
1. 우선 감도를 올리자 초점이 약간 맞지 않은 사진보다 나쁜 건 흔들린 사진이다. 산행할 땐 카메라 감도(ISO)를 800 또는 1600까지 올려 세팅해서 셔터스피드를 충분히 확보하는 게 중요하다. 사진 기자들 사이엔 이런 속설이 있다. ‘셔터스피드는 사용 렌즈의 미리 수를 분수로 바꿨을 때보단 빠르게 조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가령 200mm 렌즈라면 셔터스피드가 1/200초 이상은 돼야 흔들리지 않은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얘기다. 감도를 높이면 샤프 니스가 떨어지는 단점이 있으나 요즘엔 디지털 카메라가 워낙 성능이 좋아서 800에서 1600까지 높여도 봐줄 만하다.
- ▲ 1 빗방울이 맺혀 생동감이 더한 야생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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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될 수 있는 대로 하늘은 화면구성에서 뺀다 비 오는 날엔 하늘이 대부분 하얗게만 나온다. 하늘과 함께 피사체를 담으면 하늘을 제외한 부분은 너무 어둡게 나와 이상한 사진이 된다.
3. 간단한 기념 촬영 땐 플래시를 활용하자 산행하다가 비에 젖은 멋진 풍광을 발견했을 때, 이를 배경으로 기념촬영을 하고 싶다면 플래시를 사용하는 것도 좋다.
4. 촬영은 총잡이처럼 비 오는 날 산에서 촬영할 땐, 빨리 찍는 게 중요하다. 서부의 총잡이처럼 빠르게 카메라를 꺼내 후다닥 찍는다. 카메라를 습기나 물기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다.
- ▲ 2 울릉도에서 비오는 날 얻은 사진. 바위는 더 두드러지고 수면은 더 아름다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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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비와 어울리는 소재를 찾는다 먼 거리의 사물은 비로 인해 흐릿해지기 십상이다. 망원 렌즈를 피하고 광각 렌즈를 많이 활용하는 것이 좋다. 풀잎에 맺힌 물방울, 질퍽이는 등산로를 걷는 등산객의 등산화, 또는 비에 흠뻑 젖은 모습 등을 클로즈업해 가까운 사물을 찍는 것이 좋다.
6. 비가 그친 직후를 노려라 마지막으로 가장 중요한 팁. 사실 사진은 비가 내릴 때보단 비가 살짝 그친 직후, 햇살이 어느 정도 들 때 찍는 게 가장 좋다. 초보자도 이 순간만큼은 방금 물에 빨아 헹군 것처럼 말끔하고 환한 세상을 사각 프레임에 담을 수 있다. 나무는 빗물에 젖어 잎맥과 줄기의 모양 하나하나까지 또렷하게 보여준다. 빗물을 머금은 꽃잎 역시 더욱 유혹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나는 이 시간을 ‘질감의 시간’이라고 부른다.
온 세상이 촉촉하게 싱그럽게 보인다. 모든 물체가 물에 젖은 덕에 자신의 질감을 한층 또렷이 나타낸다. 어떻게 찍어도 세상이 수채화처럼 아름답게 찍히는 순간이기도 하다. 젖어 있는 산의 풍광과 햇살을 함께 카메라에 담을 수 있어, 어느 때보다 생생하고 싱그러운 사진을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