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도자기,사찰

무형 문화제[제76 - 100호]

문성식 2011. 2. 11. 11:33

제76호 : 택견  1983.06.01  충북지역

택견은 우리나라 전통무술의 하나로, 유연한 동작으로 손과 발을 순간적으로 우쭉거려 생기는 탄력으로 상대방을 제압하고 자기 몸을 방어하는 무술이다.
고구려시대 고분벽화에 택견을 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미 행하여졌음을 알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 와서 무술로서 기술이 더욱 발달하여 무인들 사이에서 무예로 성행하게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대중화한 경기로 퍼져서 무인 뿐 아니라 일반인들도 널리 행하게 되었다. 택견의 수련은 ①혼자익히기 : 기본자세(품), 서서익히기(품밟기, 활개짓, 발질과 손질), 나가며 익히기(활개짓, 손질, 발질) ②마주메기기 ③견주기(대걸이, 겨눔수)로 나눌 수 있다.

택견의 특징은 첫째, 손발과 몸 동작이 근육의 움직임과 일치하고, 유연하며 자연스럽게 주고 받을 수 있는 전통있는 무술이다. 둘째, 음악적이며 무용적인 리듬을 지니고 있어 예술성 짙은 무예이다. 셋째, 공격보다는 수비에 치중하고 발을 많이 움직인다.
택견은 동작이 유연하고, 자연스러워서 신체단련을 위한 보건체조나 스포츠로도 다각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다.

 

 

제77호 : 유기장(鍮器匠)  83.06.01

우리나라 유기의 역사는 멀리 청동기시대(靑銅器時代)부터 시작되었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도 유전(鍮典)이란 것이 있었는데 국가에서 유기를 전담하는 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시대(高麗時代)의 유기 제작기술은 매우 발달하여 얇고 정교한 유기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조선시대(朝鮮時代) 초기(初期)에는 유기 제작기술이 퇴화한 듯하였으나 말기(末期)부터 안성(安城)유기가 유명해졌다.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전해진 유기 제작기법은 납청(納淸)의 방짜유기와 순천(順天)의 반방짜와 안성(安城)의 주물유기가 있다. 안성의 주물(鑄物)유기는 제작기교가 매우 발달되어 기형이 아름답고 정교하며, 합금(合金)이 우수하여 '안성마춤'이란 속담까지 나오게 되었다.
현재 안성유기의 제작기법을 전통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사람은 김근수(金根洙) 씨로서 당국에서는 1983년 6월에 중요무형문화재(重要無形文化財) 제77호로 지정 보호하고 있다.

 

 

제78호 : 입사장(入絲匠)  1983.06.01 

입사란 금속공예의 일종으로 금속표면에 홈을 파고 금선(金線) 또는 은선(銀線)을 끼워넣어서 장식하는 기법을 말하며 이전에는 ‘실드리다’라는 말로 표현했다. 이러한 입사의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입사장이라고 한다. 입사공예의 유래는 정확하지 않으나, 기원전 1, 2세기경의 낙랑(樂浪) 출토유물에서 처음으로 선보였고, 신라의 고분에서 나온 유물로 보아 신라시대에는 매우 발달했음을 짐작하게 한다.
입사에는 크게 두 가지 기법이 있는데, 하나는 고려시대부터 전해지는 전통방법으로 청동표면에 정(釘) 끝으로 홈을 파고 그 안에 은선을 박아넣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조선 중기 이후부터 전래된 철입사로 바탕 철의 표면을 넓게 정을 이용해 가로 세로로 쪼아 표면이 껄끄러워지면(거스러미) 그 위에 얇은 금·은판이나 선을 놓고 망치로 쳐서 금속에 붙이는 방법이다.

이 중 상감입사는 조각장이 하는 경우가 많았고, 철입사는 대부분 입사장이 담당하였다. 입사하는 문양은 매화, 난, 국화, 대나무, 학, 기린, 사슴, 박쥐, 호랑이, 소나무 등 전통적 소재가 많다.
고대부터 발전한 입사기법은 조선시대의 관영수공업자인 경공장(京工匠)의 입사장들에 의해 전해졌으나, 현대에 와서 그 기법이 사라질 위기에 처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게 되었다. 기능보유자로 홍정실 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제79호 : 발탈(발탈) 1983.06.01

발탈은 발에 탈을 쓰고 노는 놀이이다.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으나 경기도 안성지방의 남사당패가 행하던 꼭두각시놀음이 변형된 것으로 주로 중부지방에서 연희되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발탈놀이의 방법은 처음에는 허수아비 모양으로 만든 인형의 머리부분을 탈꾼의 발바닥에 씌우고 팔은 노끈으로 연결하여 당기거나 놓으면서 조종했다고 한다. 그 후 광무대 시절에 박춘재는 직접 손에 한삼을 끼고 공연하였으며, 남형우는 양팔 끝에 노끈을 연결시켜 위로 올린 것을 대나무에 연결하고 그 대나무를 양손으로 조종하면서 발탈놀이를 하였다. 초대 발탈 예능보유자인 이동안 씨는 두 가지 방법으로 다하여 왔으나 근래에는 손에 한삼을 끼고 하는 것은 손놀음이 불편할뿐 아니라 장시간 공연하기가 어려워 대나무로 양팔을 움직여서 공연하게 되었다.

탈판의 구조는 검은 포장으로 가로 약 2m, 세로 약 1m 정도의 포장막을 4각으로 짜서 탈꾼은 그 속에 누워 발만 포장 앞으로 내놓는다. 탈꾼은 발의 움직임과 손의 움직임을 기본으로 하여 노래와 춤 그리고 재담 등을 하고, 포장막 밖에 서는 어릿광대가 탈꾼을 상대해 주고, 양옆에서 피리, 젓대, 해금, 북, 장구 등 삼현육각이 반주를 해준다.
발탈놀이는 줄인형극과 장대인형극의 조정형식을 갖춘 인형극적 성격과 함께 가면극으로서의 성격도 가미되어 있다. 또한 이야기 속에는 잔재주나 장난기 뿐 아니라 사회를 보는 비판력과 관찰력이 예리하게 반영되어 있으며, 당시 짓눌렸던 서민들의 애환을 꾸밈없이 담고 있다는 데서 다른 지역의 탈놀이에 담긴 내재적 성격과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제80호 : 자수장(刺繡匠)  1984.10.15

자수(刺繡)는 여러 색깔의 실을 바늘에 꿰어 바탕천에 무늬를 수놓아 나타내는 조형활동이다. 자수의 유래는 직조기술의 발달과 함께 한 것으로 여겨지나 기록상으로는 삼국시대부터 확인되며, 고려시대에는 일반백성의 의복에까지 자수장식이 성행할 정도로 사치가 심해 여러 번 금지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궁수(宮繡:궁중에서 수방나인에 의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수)와 민수(民繡:민간에서 일반적으로 만들어진 수)로 크게 구분되는 뚜렷한 특징을 보이면서 발전하였다.
자수의 재료로는 바늘과 바탕천, 평사(平絲)·합사(合絲)·연사(撚絲)의 색실과 틀 등이 있다. 주요기법에는 돗자리의 표면처럼 촘촘하게 엮는 자릿수, 땀새가 장단으로 교차되게 수놓는 자련수(刺練繡), 수면을 수평·수직·경사 방향으로 메워 가는 평수(平繡), 선을 조성하는 이음수, 수가 놓여진 윗부분에 군데군데 길게 고정시켜 수면이 흩어지지 않게 하는 징검수, 각종 꽃의 술이나 석류 등 작은 씨앗을 표현할 때 쓰이는 매듭수, 사슬고리 모양의 사슬수가 있다. 제작과정을 보면 바탕천을 틀에 고정시키고 밑그림을 그린다.

밑그림에 맞춰 수를 놓고 수가 끝나면 수틀을 뒤집어 먼지를 턴다. 수놓은 뒷면에 가볍게 풀을 칠하여 실밥이 흩어지지 않게 한 후 그늘에서 말린 다음 수틀에서 뗀다.
자수는 단순히 직물의 표면을 장식하는 것이 아니라 각 민족의 생활환경, 풍습, 신앙 등에 따라 독자적 양식을 이루면서 발전하여 왔다. 따라서 자수장은 전통공예기술로서 가치가 크며 기능보유자로 한상수, 최유현 씨가 인정되어 전승하는데 노력하고 있다.

 

 

제81호 : 진도다시래기(珍島다시래기)  1985.02.01

다시래기는 진도지방에서 초상이 났을 때, 특히 타고난 수명을 다 누리며 행복하게 살다 죽은 사람의 초상일 경우 동네 상여꾼들이 상제를 위로하고 죽은 자의 극락왕생을 축원하기 위해 전문예능인들을 불러 함께 밤을 지새우면서 노는 민속극적 성격이 짙은 상여놀이이다. 놀이의 정확한 유래는 알 수 없으나, 고구려의 옛 무덤에서 보여지는 벽화와 고구려·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를 통해 오랜 옛날부터 장례에서 가무가 행해졌음을 알 수 있다.
진도다시래기는 다섯마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째마당은 가상제놀이로 가짜 상제가 나와 상여꾼들과 농담을 주고 받는다. 둘째마당은 봉사인 거사와 사당 그리고 중이 나와 노는데, 진도다시래기의 중심굿으로 민속가면극에서의 파계승 마당에 해당된다. 셋째마당은 상여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만가를 부르는데 다른 지역의 상여소리와 달리 씻김굿의 무당노래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넷째마당은 묘를 쓰며 부르는 가래소리를 하면서 흙을 파는 시늉을 한다. 다섯째마당은 여흥놀이로 이어져 예능인들은 후한 대접을 받는다.
진도다시래기는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장례 때 무당단체인 신청(神廳)을 중심으로 조직된 당골 전문예능인들에 의해 전승된 민속극으로 장례풍속과 민속극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제82호 : 풍어제(豊漁祭)  1985.02.01

풍어제는 바다를 낀 해안지방에서 마을의 평안과 고기를 많이 잡기를 비는 제사이다. 3면이 바다에 둘러 싸인 우리나라의 해안지방 어민들은 바다에 생명을 걸고 고기잡이를 해왔으며, 험한 바다와 싸우다가 목숨을 잃기도 했다. 어촌마을에서는 풍어제를 지냄으로써 바다에서의 여러 가지 사고를 막고 마을의 평안을 기원했다.
풍어제는 엄격한 유교식 제사와는 다르게 육지 또는 바다위에서 무당이 춤과 노래를 곁들인 굿을 하여 제사를 축제분위기로 이끈다. 또한 마을마다 제사내용과 진행과정이 달라 동해안 별신제와 서해안 대동굿처럼 마을 전체의 공동제사가 있는 반면 배를 갖고 있는 배주인이 벌이는 서해안의 배연신굿이 있다. 굿도 마을산에 신당을 모셔놓고 굿을 하거나 마을을 돌면서 하는 굿, 바다에 빠져 죽은 사람의 집에서 용신과 해신에게 밥을 주는 용왕굿 등 다양하다.
풍어제는 마을주민이 함께 참여해 화목과 협동을 다지며 마을의 평안을 기원하는 마을축제로, 굿판에서 벌어지는 익살스런 대화와 몸짓이 예술성을 띠고 있다.

 

제82-1호 : 동해안별신굿(東海岸別神굿)

동해안 별신굿은 마을의 풍요와 어민들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마을굿으로 부산에서 강원도에 이르는 동해안 지역에서 1년 또는 2∼3년마다 열린다. 풍어제, 풍어굿, 골매기당제라고도 한다.
동해안 별신굿은 어느 특정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이 아니라 마을마다 마을 수호신을 모셔 놓은 당이 있어서 여러 신에게 마을의 풍요와 배를 타는 선원들의 안전을 기원한다. 굿은 집안 대대로 굿을 해 온 세습무당이 하며, 부정굿·골맥이청좌굿·당맞이굿·화해굿·각댁성주굿·천왕굿·심청굿·손님굿·황제굿·부인곤반굿·용왕굿·꽃노래굿·대거리굿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굿을 하는 시기는 마을마다 다르나 대체로 3∼5월, 9∼10월 사이에 주로 거행되며 굿청의 장식이 화려한데 비해 무당들이 입는 의상은 비교적 소박하다.
동해안 별신굿은 굿에서 추는 춤이 다양하고 익살스런 대화와 몸짓 등 오락성이 강하다.

 

제82-2호 : 서해안배연신굿및대동굿(西海岸배연신굿및大同굿)

서해안 배연신굿과 대동굿은 마을의 평안과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으로 황해도 해주와 옹진, 연평도 지방의 마을에서 해마다 행해진다.
배연신굿은 배를 가지고 있는 배주인이 벌이는 굿으로, 배의 안전과 고기를 많이 잡고 집안의 번창을 기원한다. 바다에 배를 띄우고 그 위에서 굿을 한다는 점이 특이하고 놀이적인 요소가 많으며 아기자기하다. 굿은 신청울림, 당산맞이, 부정풀이, 초부정 초감흥, 영정물림, 소당제석, 먼산장군거리, 대감놀이, 영산할아밤·할맘, 쑹거주는 굿, 다리발용신굿, 강변굿으로 진행된다. 대동굿은 음력 정월이나 2·3월에 주로 하며 무당이 하는 굿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큰 굿으로, 마을 사람들 모두의 이익을 빌고 단결을 다지는 마을의 축제이다.

 

제82-3호 : 위도띠뱃놀이(蝟島띠뱃놀이)

위도띠뱃놀이는 부안군 위도면 대리 마을의 풍어제로서 원당제라고도 한다. 대동굿과 형태의 기본이나 진행 절차가 비슷하면서도 또 다른 특성을 지니고 있다. 대동굿에서는 각 가정을 돌며 가정굿을 해주는데 비해 띠뱃놀이의 마을 돌기 굿에서는 마을 요소요소의 처소신(處所神)을 위해주는 내용으로 농악과장이 되고 있고, 특히 바닷가의 용왕굿은 모든 주민이 빠짐없이 참여하여 술과 노래를 함께하는 가무과장을 이루고, 마지막 바다로 띄워 보내는 띠배보내기는 이 굿의 절정을 이루면서 가장 뛰어난 축제과장이 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제82-4호 : 남해안별신굿(南海岸別神굿)

마을의 평안과 장수를 기원하며 어민들이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기를 비는 굿으로, 남해안의 통영과 거제도를 중심으로 2년에 한번씩 열린다.
무당의 노래가 뛰어나고 반주악기에 북이 첨가되는 것이 특징이다. 동해안별신굿과 달리 진행과정에서 무당이 악사와 주고 받는 재담이 극히 드물고 사설이 없으며 굿이 진지하다. 굿 중간에 북을 치는 고수와 이를 지켜보는 마을사람들이 함께 놀이마당을 이루기도 한다. 굿은 들맞이, 당산굿, 일월맞이굿, 용왕굿, 부정굿, 가망굿, 제석굿, 서낭굿, 댓굿, 손굿, 염불굿, 군웅굿, 거리굿으로 진행된다. 춤은 비교적 단조롭고 소박하며 혼자 추는 독무가 많다. 굿의 시작에는 청신악, 끝부분에서는 송신악을 하는데 이때에는 대금으로만 연주한다.

제83호 :  향제줄풍류(鄕制줄風流) 1985.09.01

풍류란 8∼15개의 곡이 연이어 짜여있는 영산회상(靈山會上)을 연주하는 것으로, 풍류라는 이름은 옛날 각 지방의 풍류객들이 영산회상을 연주한 곳인 풍류방에서 비롯되었다. 조용하고 우아하여 상류사회에서 즐겨왔다. 풍류는 현악기를 중심으로 하여 실내에서 연주하는 줄풍류와 관악기를 중심으로 하여 실외에서 연주하는 대풍류로 나뉜다. 줄풍류는 서울과 지방에서 전승되어 왔는데, 서울에서 전승되는 경제줄풍류와 구별하기 위해 지방의 줄풍류를 향제줄풍류라 일컫는다.

 

제83-1호 : 구례향제줄풍류(求禮鄕制줄風流) 

전남 구례(求禮)지방에서 전승되는 현악영산회상(絃樂靈山會相) 이란 기악곡을 「구례향제줄풍류」라 한다. 영산회상은 여러 음악이 조곡과 같이 구성된 합주곡을 가리키는데 일명 「풍류(風流)」라고도 한다. 관악기가 중심이 되는 영산회상을 관악영산회상 또는 대풍류라 하고 현악기가 중심이 되는 영산회상을 현악영산회상 또는 줄풍류라고 한다. 줄풍류에는 서울에서 전승되는 것과 지방에서 전승되는 것이 얼마쯤 다르게 연주되었는데 지방에서 전승되는 줄풍류를 서울에서 전승되는 줄풍류와 구별하기 위해서 「향제(鄕制)줄풍류」라 이른다.
제83-2호 : 이리향제줄풍류(裡理鄕制줄風流)

전라북도 이리시에서 이리정악원 사범으로 있는 율객 강낙승(姜洛昇)에 의하면 이리시 율회(律會)가 조직된 것은 1958년 경에 이리율림계(裡里律林契)가 조직되면서 부터라 한다. 그 조직은 10여명으로 율계를 조직하는데 계장에는 채규환이, 간사에는 강낙승이 맡았다. 이들은 매주 토요일에 율회를 가졌는데 흔히 잔영산에서 굿거리까지 연주하였다고 한다. 이리율림계는 1968년에 도교육위원회에 이리정악원 설립인가를 받았고, 5년 뒤에는 이리율림계원들이 이리정악회를 조직하였다.

 

제84호 : 농요(農謠)  1985.12.01

농민들은 힘들고 바쁜 일손으로부터 피로를 잊고 능률을 올리기 위해 노래를 부르며 일한다. 이러한 노래를 농요라 하는데 들노래 또는 농사짓기소리라고도 한다.
농요의 주제는 농사와 관계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크게 논농사소리와 밭농사소리로 구분한다. 논농사소리에는 <쟁기질소리>, <벼베기소리>, <김매기소리>, <새쫓는소리> 등이 있고, 밭농사소리에는 <밭매기소리>와 <보리타작소리>가 있어 1년간의 주요 농사과정이 잘 나타나 있다. 또, 노동과는 직접 관계가 없지만 정월대보름에 풍물을 치며 집집을 돌아다니며 그해의 풍년을 비는 지신밟기를 시작으로 해서, 흙거름을 나르면서 부르는 <흙거름노래>, 말들이 밭을 밟게 하면서 부르는 제주도의 <밭발리는소리> 등이 있다.
이러한 모든 농요는 전국 어디서나 같은 형태로 불리는 것은 아니고, 지방에 따라서 종류나 노랫말의 내용, 노래부르는 방법 등이 다양하다. 현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는 농요로는 경상도의 고성농요(제84-1호)와 예천통명농요(제84-2호)가 있고, 전라남도 진도의 농요는 <남도들노래(제51호)>라는 명칭으로 지정되어 있다.

 

제84-1호 : 고성농요(固城農謠)

고성농요는 하지 무렵부터 시작되는 농사소리가 주축을 이루며, 등지라고도 한다. 등지란 모내기소리를 뜻하는 경남지방의 사투리이다. 고성지방 농민들은 힘든 일을 할 때 땀방울과 고달픔을 농요를 부르면서 씻어왔고 농요를 통하여 단결심을 강조하여 일의 능률을 올려 왔다고 한다. 조선 후기에 경상감사가 고성 들판을 지나다가 모내기하는 농민들의 등지 소리에 도취되어 행렬을 멈추고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마을에서 밤을 새웠다 한다.

제84-2호 : 예천통명농요(醴泉通明農謠)

예천 통명농요는 경북 예천군 예천읍 통명리의 농민들이 매년 모심기를 할 때 힘겨운 노동으로 인한 고달픔을 해소하기 위하여 부르는 농요이며 조선 중기에 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모심기할 때 부르는 <아부레이수나>와 모를 다 심고 논에서 나오면서 부르는 <도움소소리>, 논을 맬 때 부르는 <애벌매기소리>와 <상사듸여>, 그리고 논을 다 매고 나오면서 부르는 <방애소리>·<에이용소리>, 또 논매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부르는 <봉헤이>로 이루어져있다. 또한 부녀자들이 부르는 <삼삼기노래>·<베틀노래>·<도해따기> 등이 있다. 모심기소리나 논매기소리가 모두 느리고, 길게 빼는 음을 많이 쓰고, 노래를 메기고 받을 때에 앞소리의 끝과 뒷소리의 앞을 부분적으로 겹치게 불러 이중창적인 효과를 내는 점은 예천 통명농요의 특징이다.

 

 

제85호 : 석전대제(釋奠大祭)  1986.11.01

석전대제란 공자를 모시는 사당인 문묘에서 지내는 큰 제사를 가리키며, 예법과 음악이 존중되는 국가의 의례이다. 일명 문묘대제, 석전제(고기를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유교가 전래된 기록은 없지만 최초로 태학(유교 교육을 위한 국립중앙대학)을 설립한 것은 고구려 소수림왕 2년(372)으로 석전도 고대 중국의 제사관례에 따라 행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제86호 : 향토술담그기(鄕土술담그기) 1986.11.01

술은 기호식품으로만이 아니라 사용처가 많아 가히 생활필수품이라고 할 만하다. 각종 제사, 의식 등에도 반드시 술을 사용하였다. 일년 내내 각종 행사가 많은 우리의 경우 지방마다 그 지방의 자연환경에 알맞는 향토술들이 다양하게 빚어져왔으며 그에 따라 각 고을마다 특징있는 술들이 그 멋과 맛을 자랑하고 있다.
우리의 술은 삼한시대 이래로 전통적인 비법을 간직한 술들이 빚어져왔는데 특히 조선시대에는 수백여 종에 달하는 술들이 빚어져서 다양하게 발달된 술이 조상들의 생활에 멋과 여유를 더해주고 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의 슬기가 담긴 토속적인 향토술들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급속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일제는 주세정책으로 가정에서 빚는 향토주를 밀주로 단속하였기 때문에 은밀히 빚어졌다. 해방 후에는 서양술들의 급속한 유입과 정부의 단조로운 통제정책에 의해 일반가정에서는 술을 빚는 것이 법으로 금지,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서구식 술들만 활개를 치고 우리의 전통주는 점점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 후 1986년 당시 문화공보부 문화재관리국에서 우리나라 전통민속주의 개발을 통하여 약 126종의 전통 민속주를 조사하여 가치가 있다고 판단되는 민속주 86종을 선발하였다. 그 중 12가지에 대하여 수년간에 걸쳐 현장조사하여 엄격한 심사기준을 거쳐 전통 문화재로 가치가 있는 것만을 선정하여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그 맥을 잇고 있는데 경주교동법주, 면천두견주, 문배주 등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나라 전통 민속주의 종류는 크게 곡주, 약용주 및 증류주로 나눌 수 있다. 곡주란 주로 멥쌀이나 찹쌀을 주원료로 하여 누룩을 사용해서 빚어내는 술로서 우리 전통 민속주의 대부분이 여기에 속한다. 약용주란 일반적인 곡주에 특수한 한약재를 배합하여 빚어내는 술로서 민간요법적으로 사용해온 독특한 술이라고 할 수 있다. 증류주란 전통적인 고리를 사용하여 일반적인 곡주를 증류한 일종의 소주로서 알콜 도수가 매우 높은 술이다.
 
제86-1호 : 문배주(문배酒)
문배주는 평안도 지방에서 전승되어 오는 술로, 술의 향기가 문배나무의 과실에서 풍기는 향기와 같아 붙여진 이름이다.
문배주는 해방전에는 평양 대동강 유역의 석회암층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원료는 밀·좁쌀·수수이며, 누룩의 주원료는 밀이다. 술의 색은 엷은 황갈색을 띠며 문배향이 강하고, 알코올 도수는 본래 40도 정도이지만 증류 및 숙성이 끝난 문배주는 48.1도에 달하므로, 이 술은 오래 저장이 가능하다. 보통 6개월∼1년 동안 숙성시켜 저장하는데 문배나무의 과실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도 문배향을 풍기는 특징이 있다.
제86-2호 : 면천두견주(沔川杜鵑酒)
진달래 꽃잎을 섞어 담는 향기나는 술로 진달래꽃을 두견화라고도 하므로 두견주라고 부른다.
두견주는 고려의 개국공신인 복지겸(卜智謙)에 얽힌 전설이 있다. 그가 병이 들어 온갖 좋다는 약을 다 써도 병이 낫지 않자, 그의 어린 딸이 아미산에 올라 100일 기도를 드렸다. 신선이 나타나 이르기를 아미산에 활짝 핀 진달래꽃으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지금 면천초등학교 뒤에 있는 우물)의 물로 빚어 100일 후에 마시고 뜰에 2그루의 은행나무를 심어 정성을 드려야만 효과가 있다고 하였다. 딸이 그대로 하였더니 아버지의 병이 나았다고 한다.
제86-3호 : 경주교동법주(慶州校洞法酒)
경북 경주시 교동에 있는 최부자 집에서 대대로 빚어 온 전통있는 술이다. 경주법주를 처음 만든 사람은 최국준으로, 그는 조선 숙종(재위 1674∼1720) 때 궁중음식을 관장하는 사옹원(司饔院)의 참봉을 지냈다고 한다. 법주를 만들 때에는 최씨 집안 마당의 우물물을 쓰는데, 물의 양과 온도가 사계절 내내 거의 일정하며 옛부터 물맛이 좋기로 이름이 나 있다.
술을 빚을 때는 이 물을 일단 팔팔 끓인 다음 식혀서 사용한다. 법주의 주원료는 토종 찹쌀이고 물과 누룩과 쌀로 빚어지는 순수한 곡주로서, 색은 밝고 투명한 미황색을 띠며, 곡주 특유의 향기와 단맛, 약간의 신맛을 지니고 있다. 알코올 도수는 16∼18도이다. 제조방법의 가장 큰 특징은 밑술을 먼저 빚은 다음 이를 바탕으로 제2차 발효과정을 거쳐서 원래의 술을 숙성시키는 것이다. 따라서 제조하는데 약 100일 정도가 소요되며 온도만 주의하면 1년 이상 보관이 가능하다고 한다.
 

제87호 : 명주짜기(명주짜기)  1988.04.01

명주는 누에고치에서 풀어낸 견사(絹紗)로 짠 무늬가 없는 평직 직물이다. 일반적으로 견사로 만든 견직물을 ‘비단’이라고 하지만 견사 종류와 세직 및 무늬에 따라 종류가 다양하다.
우리나라의 양잠은 그와 관련된 기록이 고조선 때부터 나타날 정도로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정교한 직물을 당나라에 보내기도 하였을 정도로 섬세한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고려시대에는 보다 질이 좋은 견직물이 생산되었고, 조선시대에는 종류가 다양해서 색과 품질로 이름이 붙게 되었다. 그 중 명주가 가장 많이 생산되어 일상적인 옷감재료로 사용되었다. 제직방법과 제직상태, 산지와 원료 등에 따라 각기 달리 불리다가 근래에 명주라는 이름으로 통칭하게 된 것이다.

 

 

제88호 : 바디장(바디匠) 1988.08.01

바디는 베를 짜는 베틀의 한 부분으로 이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바디장이라 한다. 옷은 예부터 사람들의 의·식·주 생활에 있어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해 왔으며, 신석기시대의 유적지에서 실을 뽑은 가락에 끼우는 방추차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미 신석기시대에 베를 짜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바디는 안동과 한산지방에서 제작된 것이 섬세하고 튼튼하여 명물로 인정받고 있으며, 한산 모시는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각종 직조기술이 발달하였다. 또한 한국전쟁 이후 합성섬유의 발달로 바디제작이 많이 쇠퇴하기도 했으나 지금까지 전통이 전해지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제89호 : 침선장(針線匠)  1988.08.01

침선이란 바늘에 실을 꿰어 꿰맴을 말하는 것으로 복식 전반을 만드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옷을 마름질하여 꿰매는 바느질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 더 아름답게 하기 위하여 어울리는 무늬에 수를 놓는 것, 또는 옷에 더하여 장식하는 노리개 등을 만드는 것이다.
사람이 바느질을 한 것은 역사 이전부터였다고 생각되며 이러한 바느질로 증명이 된다. 그러나 이 바늘이 옷감을 꿰매기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 후의 유물로서 지금의 바늘과 비슷한 신라시대 금속제품이 발굴되었는데, 옷을 꿰매는 바늘이 틀림없을 것이다. 고구려벽화를 통하여 보면 삼국시대에는 높은 수준의 침선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문화의 발달과 더불어 침선도 발전하였음은 물론이다. 따라서 장식요소도 늘어나고 구성의 변화도 다양해졌다.

 

 

제90호 : 황해도평산소놀음굿(黃海道平山소놀음굿)  1988.08.01

평산소놀음굿은 황해도 평산읍 출신인 장보배(1915∼1991)무녀가 1947년에 월남하여 강화군 파동면에 정착한 뒤 1985년에 이르러 인천에서 이를 재현하여 남한에 알려진 이후 오늘에 이르고 있다.
평산소놀음굿은 양주 소놀음굿과 마찬가지로 경사(慶事)굿에서 놀았다.

농사나 사업장사 등의 번영을 빌거나 자손의 번창을 비는 뜻에서 행해졌는데, 이때는 온 마을의 축제가 되어 이 굿을 통하여 마을의 협동과 화합을 다지며, 개인에게는 희망과 용기를 북돋아주는 놀이였다.

 

제91호 : 제와장(製瓦匠)  1988.08.01

제와장이란 기와를 전문으로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기와는 건축물의 지붕에 빗물이나 습기가 새어들지 못하게 덮어 씌워 침수를 막고 흘러내리게 하여 지붕 밑에 있는 목재의 부식을 방지함과 동시에 건물의 경관과 치장을 돋보이게 하는 것이다. 한때 장식적인 효과와 더불어 권위와 부의 상징이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기와의 역사는 기원전 2∼1세기경 중국 한(漢)대에 대동강 유역으로 먼저 들어와 차츰 전 지역에 퍼져 지금에 이르렀다. 기와는 암키와와 수키와가 있으며, 부속장식 기와로는 암막새와 수막새, 귀면기와, 치미(치尾), 용두(龍頭), 망와(望瓦) 등이 다채롭게 개발되었다.

 

제92호 : 태평무(太平舞) 1988.12.01

태평무는 명무(名舞)였던 한성준이 추었던 공연춤의 하나이다. 태평무가 어느 때부터 전승되어왔는 지에 대하여는 확실히 알 수가 없으나 문헌기록이나 국악인들에 의해 전해 내려온 근거로 보면 약 백년 전부터 추어왔던 춤임은 틀림이 없다.
태평무의 반주음악이 경기도 무속음악의 가락으로 되어 있고 춤 또한 경기도 무속춤의 동작을 엿볼 수 있으므로, 태평무는 경기도 도당굿에서 행하여진 무속음악과 무속춤을 한성준이라 하는 춤꾼에 의해 공연춤으로 재구성한 예술적 춤이라 할 수 있다. 태평무는 그 내용이 왕과 왕비가 풍년과 나라의 태평성대를 기원하는 뜻에서 춤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다.

 

 

제93호 : 전통장(箭筒匠)  1989.06.15

전통(箭筒)이란 화살을 담는 도구를 말하며, 전통장(箭筒匠)이란 화살통을 만드는 사람을 말한다. 옛날에는 화살통을 전실(箭室)이라고도 하였으며 『경국대전』에는 통개장(筒介匠)으로 기록되어 있다. 전통은 화살을 담아서 전쟁을 하거나 사냥을 할 때에 몸에 지니고 다니는 무구의 일종이다.
활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사용하는데 첫째는 활이고, 둘째는 화살이며, 셋째는 화살통이다. 이것을 만드는 사람을 궁시장(弓矢匠)이라고도 한다.

 

 

제95호 : 제주민요(濟州民謠) 1989.12.01

제주도는 흔히 바람과 돌과 여자가 많다고 하여 삼다도라고도 한다. 직업의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 민요도 많이 전해지고 있어 민요의 보물창고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제주도에서 불려지는 토속적인 민요와 통속적인 민요는 민요를 부르는 사람들의 직업 종류에 따라 여러 가지로 나뉘는데, 농사짓기소리, 고기잡이소리, 일할 때 부르는 소리, 의식에서 부르는 소리, 부녀요와 동요, 통속화된 잡요로 나눌 수 있다. 농사짓기소리로는 <사대소리>, <밭밟는소리>가 있고, 고기잡이소리로는 <노젓는소리>, <멸치후리는소리> 등이 있다. 일하면서 부르는 소리로는 <고래소리>, <가래질소리>, <방앗돌굴리는소리> 등이 있으며, 의식요에는 <행상소리>, <달구소리>, <꽃염불> 등이 있다. 부녀요와 동요로는 <시집살이노래>, <애기흥그는소리>, <원님노래> 등이 있다. 잡요로는 <오돌또기>, <이야홍타령>, <서우젯소리> 등이 있다.
제주민요는 일하면서 부르는 노동요가 많고 부녀자들이 부르는 민요가 흔하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노랫말도 특이한 제주도 사투리를 많이 사용하고 있으며, 경기지역 민요보다 구슬프다. 제주민요는 한스러운 느낌을 푸념하듯이 나타내어 색다른 정취를 자아낸다.

 

제96호 : 옹기장(甕器匠)  1990.05.08

옹기는 질그릇(진흙만으로 반죽해 구운 후 잿물을 입히지 않아 윤기나지 않는 그릇)과 오지그릇(질그릇에 잿물을 입혀 구워 윤이 나고 단단한 그릇) 을 총칭하는 말이었으나 근대 이후 질그릇의 사용이 급격히 줄어들면서 오지그릇을 지칭하는 말로 바뀌게 되었다. 옹기장은 옹기를 만드는 기술 또는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옹기는 상고시대부터 관·제기·식기·솥 등에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삼국사기』에 의하면 신라에서는 와기전(瓦器典)이라 하여 옹기의 생산을 담당하는 기관을 두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도 서울과 지방에 100여 명의 옹기장을 두었다.
옹기점의 시설로는 수비장(질 좋은 흙을 얻기 위한 시설), 움(작업장), 물레(그릇제작용 받침틀), 송침(건조시설), 찬간(저장시설), 가마(그릇 굽는 시설) 등이 있으며 가마의 형태는 경사진 곳에 길게 비스듬히 축조한 등요가 일반적이다.

 

제97호 : 살풀이춤(살풀이춤)  1990.10.10

예로부터 우리나라 사람들은 그해의 나쁜 운을 풀기 위해 굿판을 벌였는데 그곳에서 무당이 즉흥적으로 나쁜 기운을 푸는 춤을 춘 것을 살풀이춤이라 하며 ‘도살풀이춤’‘허튼춤’이라고도 한다. 원래는 수건춤, 산조춤, 즉흥춤 이라는 이름의 수건춤이었으나 춤꾼 한성준이 1903년에 극장공연에서 살풀이란 말을 쓴 데서부터 살풀이라는 이름이 비롯되었다.
살풀이춤은 살풀이 가락에 맞춰 슬픔을 품어 환희의 세계로 승화시키는 인간 감정을 아름다운 춤사위로 표현하는 예술적 가치가 큰 고전무용이다. 살풀이춤은 경기도 지방에 전승된 김숙자류의 춤과 전라도 지방에 전승된 이매방류의 춤이 있는데, 김숙자류의 춤이 섬세하고 고운 면을 가지고 있다면 이매방류의 춤은 구수하면서도 화끈한 멋을 가지고 있어서 대조적인 멋을 보이고 있다.


 

제98호 : 경기도도당굿(京畿道都堂굿) 1990.10.10

도당굿은 서울을 비롯한 한강 이북지방과 수원·인천 등지에서 마을의 평화와 풍년을 목적으로 매년 혹은 2년이나 그 이상의 해를 걸러 정월초나 봄·가을에 정기적으로 행해지는 굿을 말한다. 경기도 도당굿은 경기도 일대의 한강 이남지역에 전해져 오는 마을굿으로, 지금은 부천의 장마릉에서만 완전한 형태의 경기도 도당굿을 볼 수 있다. 경기도 도당굿의 정확한 기원은 알 수 없지만 마을 동산의 소나무 숲속에 300년이 넘은 도당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모신 당가리가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를 통해 대대로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제99호 : 소반장(小盤匠)  1992.11.10

소반(小盤)이란 음식을 담은 그릇을 받치는 작은 상으로, 한국의 식생활에서 부터 제사의례에 이르기까지 여러 용도로 쓰이는 부엌가구이다. 이것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 장인(匠人)을 소반장이라 한다.
고구려 각저총·무용총 등의 고분벽화에는 여러 유형의 소반이 나타나고 있으며, 『삼국사기』, 『별사 (別賜)』, 『경국대전 (經國大典)』등의 기록에 의하면 국가에 소속된 상을 만드는 기관이 분업화되어 생산을 담당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이념의 영향으로 겸상보다는 독상이 주로 사용되었고, 제례·혼례 등 크고 작은 많은 행사들로 인하여 여러 용도의 상이 필요하게 되어 자연히 소반제작이 발달하게 되었다.

 

제100호 : 옥장(玉匠)  1996.02.01

옥(玉)은 동양 문화권에서 발달된 보석류로 옛부터 돌 중에 아름다움이 있을 뿐 아니라 음양오행의 오덕인 인(仁)·의(義)·지(智)·용(勇)·각(角)을 상징하는 장신구로 쓰여 왔다. 또한 방위신(方位神)에 예(禮)를 베푸는 예기(禮器)를 비롯하여 사회계급의 신분을 구분하는 벽(璧)과 종(琮)·규(圭)·장(璋)·호(琥)·황(璜)과 6단(六端), 병기(兵器), 수상옥(隋喪玉) 등 패식(佩飾)뿐만 아니라 악기(樂器)인 옥경(玉磬)을 비롯하여 약재 및 의료용구 등 여러가지로 쓰여지고 있다.
옥공예품은 중국을 비롯하여 조선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옥제품을 지닐수 있는 계층은 왕족계열(王族系列)과 특수계층에 한하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매우 귀한 공예품이다. 귀한 공예품이란 점에서 옥공예를 다루는 공인들도『경국대전(經國大典)』에서 밝힌 바와 같이 10명에 한하고 있듯이 국가에서 장인의 숫자를 제한하고 있으므로 자연히 옥공인의 수가 희소함도 그 이유중 하나이기도 하며 재료확보에도 힘들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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