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호 :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 1964.12.07 지정
종묘제례악은 조선왕조 역대 임금 왕후의 신위< 神位 >를 모신 종묘 의 제향< 祭享 >에서 연주하는 음악을 가리킨다.
종묘제례 의식에는 각 절차마다 보태평< 保太平 >과 정대업< 定大業 >이라는 음악을 중심으로 여러 음악을 연주하며 동시에 종묘악장< 宗廟樂章 >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보태평지무< 保太平之舞 >와 정대업지무< 定大業之舞 >라는 일무< 佾舞 >를 춘다.
조선 세종 31년에 세종이 고취악< 鼓吹樂 >과 향악< 鄕樂 >을 토대로 하여 보태평, 정대업, 발상< 發祥 >, 봉래의< 鳳來儀 > 등 많은 음악을 새로 창제하여 보태평에 11곡, 정대업에 15곡을 지었다. 이것에 조종< 祖宗 >의 공덕을 기리는 악장을 얹어 부르게 하였다. 그리고 아악기와 당악기와 향악기를 두루 섞어 편성하여 연주하고 문무< 文舞 >와 무무< 武舞 >를 일무로 추도록 하여 이것을 연향< 宴享 >에서 연행< 演行 >하였다.
세조 9년(1463)에 보태평과 정대업을 개편하여 세조 10년에 처음으로 종묘악장에서 보태평, 정대업이 연주되었다. 종묘제례악은 선조 때 약간 고치기는 하였지만 1946년까지 춘하추동 사계절에 행하는 제향에서 연주해왔다. 그리고 1946년에 중단되었다가, 1971년부터 해마다 5월 첫 일요일에 행하는 종묘대제< 宗廟大祭 >에서 종묘제례악과 악장과 일무가 동시에 연행되고 있다.
종묘제례악은 조선 말기까지 장악원< 掌樂院 > 악사< 樂士 >들에 의하여 전승되었고, 일제 때에는 구왕궁아악부< 舊王宮雅樂部 > 악사에 의하여 전승되었고, 해방 후에는 국립국악원< 國立國樂院 > 악사들에 의하여 전승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보유자에는 성경린, 김기수, 김성진, 김태섭, 김종희, 박영복, 이강덕, 김천흥, 봉해룡, 이석재가 처음 인정받았는데 이들은 모두 구왕궁아악부와 국립국악원 악사를 역임하였다.
종묘제례악은 장엄하고 웅대한 음악이며 500년 전에 전승되던 고취악과 향악이 제례악으로 승화되어 살아남은 소중한 음악이다.
제2호 : 양주별산대놀이(楊州別山臺놀이) 1964.12.07 지정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경기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 놀이이다. 이 놀이는 약 200년 전부터 사월초파일, 단오, 추석 등 크고 작은 명절과 비가 오길 기원하는 기우제 행사 때에 공연되었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양주고을 사람들이 한양의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놀다가 그들이 지방공연 관계로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아지자 고을 사람들이 직접 탈을 만들어 놀기 시작한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놀이는 전체 8과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놀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진하는 길놀이와 관중의 무사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놀이에는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하인 및 늙고 젊은 서민들이 등장하여 현실을 풍자하고 민중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등장배역은 모두 32명지만 탈은 함께 사용하는 것이 있어 보통 22개가 활용된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중부지방 탈춤을 대표하는 놀이로서 해서지역 탈춤과 함께 한국 가면극 중 연극적인 볼거리가 풍부한 가면극이라 하겠다.
제3호 : 남사당놀이(男寺黨놀이) 1964.12.07 지정
조선후기에서 1920년대까지도 ‘굿중패 ’또는 남사당(男寺黨)이라고 부르던 전문적인 유랑연예인들이 우리나라 농어촌을 돌아다니며 민중오락을 제공해 왔다. 그들의 주요 상연은 풍물,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보기(가면극), 덜미(꼭두각시) 등으로 재인 광대의 가무백희(歌舞百戱)의 전통을 이어온 것이었다.
특히 꼭두각시놀음은 주로 남사당패가 오늘날까지 전승하고 있다. 이들 연희자들은 인형극을 덜미라고 부르지만 일반적으로는 꼭두각시놀음, 박첨지(朴僉知)놀음 또는 홍동지 놀음이라고 부른다. 이같은 명칭은 모두 인형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우리나라 인형극은 삼국시대인 고구려 때부터 있었으며 대륙으로부터 중국을 거치거나 북방에서 전래된 서역악(西域樂)의 일종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점은 고구려 무악 중에 서역에서 전래된 가면무악과도 서로 관련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제4호 : 갓일(갓일) 1964,12,24
갓은 조선시대 성인 남자들이 외출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예복중의 하나로 원래는 햇볕, 비, 바람을 가리기 위한 실용적인 모자였으나 주로 양반의 사회적인 신분을 반영하는 용도로 사용되었다. 갓은 넓은 의미로 방갓형과 패랭이형 모두를 말하는데 일반적으로 흑립·칠립·평립이라고 부르며 갓일은 갓을 만드는 과정을 말한다.
갓일은 총모자, 양태, 입자로 나뉜다. 총모자는 컵을 뒤집어 놓은 듯한 갓 대우 부분을 말꼬리털 또는 목덜미털을 사용해 만드는 것을 가리킨다. 양태는 대나무를 머리카락보다 잘게 쪼개서 레코드판처럼 얽어내는 과정을 말하며, 입자는 총모자와 양태를 조립하면서 명주를 입히고 옻칠을 해서 제품을 완성시키는 것이다. 세 가지 과정은 서로 재료가 다르고 솜씨의 격차가 심하기 때문에 생산지를 달리하거나 따로 행해지는 것이 보통이다.
제5호 : 판소리 1964,12,24
판소리는 한 명의 소리꾼이 고수(북치는 사람)의 장단에 맞추어 창(소리), 말(아니리), 몸짓(너름새)을 섞어가며 긴 이야기를 엮어가는 것을 말한다.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조선 영조 30년(1754)에 유진한이 지은 춘향가의 내용으로 보아 적어도 숙종(재위 1674∼1720) 이전에 발생하였을 것으로 추측하기도 하고, 조선 전기 문헌에 보이는 광대소학지희(廣大笑謔之戱)가 토대가 되었을 것으로 보기도 한다. 또한 판소리가 본래 여러 가지 놀이와 함께 판놀음으로 공연되던 것이어서 판놀음이 있었던 신라 때까지 거슬러 올라가기도 한다.
판소리는 느린 진양조, 중모리, 보통 빠른 중중모리, 휘모리 등 극적 내용에 따라 느리고 빠른 장단으로 구성된다. 고수의 반주는 소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면서 “얼씨구”, “좋다”, “으이”, “그렇지” 등의 감탄사를 내는데, 이를 추임새라고 한다.
제6호 : 통영오광대(統營五廣大) 1964,12,24
경상남도 낙동강을 경계로 하여 옛 경상좌도(慶尙左道) 지역인 진주, 가산, 산청, 의령, 마산, 통영, 고성 등에서 놀았던 오광대 놀이는 그 시원지가 초계 밤마리 장터로서 산대도감계통(山臺都監系統)을 이은 탈놀이라는 견해도 있다.
통영오광대는 지금으로부터 약 100년 전에 전문 유랑연희집단(藝人五廣大)인 초계 밤마리의 대광대패의 영향을 받아 통영에서 재구성되었다고 전하며, 19세기 말에 이 지역의 의흥계원(義興契員)들이 시작하였고 그 뒤로 장용기(張容基)가 중심이 된 난사계원(蘭社契員)이 계승하였다가 이후 장재봉(張在奉), 오정두(吳正斗) 중심의 춘흥계(春興契)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제7호 : 고성오광대(固城五廣大)
오광대는 남부지역(낙동강 서쪽지역)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초계 밤마리 마을 장터에서 놀던 광대패들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오광대’란 다섯 광대 또는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 놀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하고, 오행설(五行說)에서 유래된 오(五)에서 온 것이라고도 하는데, 오행설 의견이 유력하다. 전에는 정월 대보름을 중심으로 행해졌으나 현재는 봄, 가을에 오락적인 놀이로 공연되고 있다.
제8호 : 강강술래 66,02,15
강강술래는 노래와 춤이 하나로 어우러진 부녀자들의 집단놀이로 주로 전라남도 해안지방에서 추석을 전후하여 달밤에 행해졌다.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왜군에게 우리의 병사가 많다는 것을 보이기 위한 의병술로 마을 부녀자들을 모아 남자 차림을 하게 하고 옥매산을 돌도록 한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원시시대부터 1년중 가장 달이 밝은 밤에 축제를 벌여 노래하고 춤추던 풍습에서 비롯된 민속놀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제9호 : 은산별신제(恩山別神祭) 1966,2,15
은산별신제는 충청남도 부여군 은산면 은산리 마을 사당인 별신당에서 열리는 제사를 말한다.
옛날 은산 마을에 큰 병이 돌아 젊은 사람들이 많이 죽어 나갔다. 어느날 밤 마을 어른의 꿈에 백제를 지키다 억울하게 죽은 장군이 나타나 병을 없애줄테니, 자신과 부하들을 양지바른 곳에 묻어 달라고 했다. 꿈에서 깨어 장군이 말한 곳으로 가 보니 오래된 뼈가 잔뜩 널려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뼈들을 잘 묻고 그들의 영혼을 위해 굿을 했다. 그 후 병이 사라졌고, 마을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마을사람들은 장군과 병사들을 위로하는 뜻으로 제사를 지내왔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날의 은산별신제이다.
제10호 : 나전장(螺鈿匠) 66,6,29
나전(螺鈿)은 고유어로 ‘자개’라 하며, 여러 무늬의 조개껍질 조각을 물체에 붙이는 것을 말한다. 나전칠기는 나전 위에 옻칠을 해서 만들어 낸 공예품을 말하며, 이러한 기술이나 만드는 사람을 나전장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나전칠기 기술은 중국 당에서 전래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칠기는 신라의 고분에서 다량 출토되고 있으며 백제·삼한시대의 칠기도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삼국시대에 이르러 일반적인 생활용기로 널리 사용했던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제11호 : 농악(農樂) 66,6,29
농악은 상고시대의 농경의례의 악(樂)으로 발달하여 마을 단위의 군대조련(軍隊調練)의 방편으로 연주되기도 했으며, 은산별신굿의 신목봉영절차(神木奉迎節次)에 그 잔영이 남아 있다.
오늘날에는 농민의 오락으로 변하여 악사들이 꽹과리, 징, 장구, 북, 소고와 같은 타악기를 치며 의식, 행진, 등놀이, 춤, 노작(勞作) 등을 연행하는 음악을 가리킨다. 본래 농악은 굿, 풍장, 매구 따위로 불리었다.
제11-가호 : 진주삼천포농악(晋州三千浦農樂)
진주삼천포농악은 진주 삼천포 지역에 전래되고 있는 농악으로 영남농악에 속한다.
진주삼천포농악에 쓰이는 악기에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법고가 있으며, 편성은 기수(旗手)와 쇠, 징, 북, 장구, 법고 그리고 양반과 포수로 되어 있다. 모두가 흰바지와 색깔있는 저고리의 농악복에 색띠를 두루고, 모자(상모)를 쓴 채 연주하는데 개인놀이가 비교적 발달하였다. 판굿에서는 채상모놀이가 돋보이며, 군사놀이인 팔진해식진(八陣解式陣)굿이 특이하다. 빠른 가락을 모는 경우가 많아 힘차고 가락이 다채로워 흥겹다.
제11-나호 : 평택농악(平澤農樂)
웃다리농악에 속하는 평택농악은 넓은 소사벌을 배경으로 한 두레농악인 동시에 전문 걸립패적인 연희농악이라는 복합적인 면을 가지고 있다. 농기수, 영기수, 쇄납, 쇠, 징, 북, 장고, 법고, 잡색(무동, 사미, 양반, 농부)으로 편성하되 8잽이(사물), 8법고, 8무동이 기본이다. 쇠, 장고, 법고수는 벙거지(전립)을 쓰며 쇄납, 징, 북수는 고깔 또는 벙거지를 쓴다. 벙거지의 물채엔 나비상을 단다.
제11-다호 : 이리농악(裡里農樂)
이리농악은 익산(옛 이리)지방에서 전승되는 농악으로 호남우도농악에 속한다. 익산시 새실마을은 예로부터 마을농악이 왕성했고, 김제·정읍 등지에서 전문적인 농악을 배워온 사람들을 받아들여 오늘과 같은 높은 수준의 농악단을 배출할 수 있었다.
제11-라호 : 강릉농악(江陵農樂)
강릉농악은 강원도 태백산맥 동쪽에 전승되어 오는 영동농악의 대표격으로 강릉시에서 전승되고 있는 농악을 가리킨다. 농사풀이농악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농경생활을 흉내내어 재현하는 농사풀이가 있기 때문이다. 유래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농경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 발생한 것으로 추측된다.
강릉농악은 농기, 쇄납(날라리), 꽹과리, 징, 북, 장구, 소고, 법고(불교의식 때 쓰는 작은북) 및 무동(사내아이)으로 편성된다. 연주자들은 흰 바지저고리에 홍·청·황의 삼색띠를 두르고 무동들은 여러 가지 색깔이 섞인 옷을 입는다.
제11-마호 : 임실필봉농악(任實筆峰農樂)
임실 필봉농악은 필봉리에 전승되고 있는 농악으로 호남좌도농악에 속한다. 필봉마을에는 예로부터 당산굿·마당밟기 정도의 단순한 농악이 전승되어 왔는데, 오늘날과 같은 높은 수준이 된 것은 1920년경에 상쇠(패의 지도자 격으로 꽹과리를 가장 잘 치는 사람) 박학삼을 마을로 초빙하여 그의 농악을 배우면서부터라고 한다.
제12호 : 진주검무(晋州劍舞) 67,1,16
진주검무는 진주지방에 전승되는 여성검무로서 검기무 또는 칼춤이라고도 하며 대궐안 잔치 때 행하던 춤의 하나이다. 유래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신라사람들이 나라를 위해 죽은 소년을 애도하는 의미에서 춤을 추었다는 설과 논개의 얼을 달래기 위해 진주기생들이 칼춤을 춘데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있다.
제13호 : 강릉단오제(江陵端午祭) 67,1,16
단오는 음력 5월 5일로 ‘높은 날’또는 ‘신 날’이란 뜻의 수릿날이라고도 한다. 강릉단오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축제로, 마을을 지켜주는 대관령 산신을 제사하고, 마을의 평안과 농사의 번영, 집안의 태평을 기원한다. 강릉단오제가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매년 3, 4, 5월 중 무당들이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3일동안 굿을 벌였다는 남효온(南孝溫)의 문집(『추강냉화(秋江冷話)』) 기록과, 1603년(선조 36년)에 강릉단오제를 구경하였다고 기록한 허균(許筠)의 문집(『성소부부고(惺所覆?藁)』) 등이 있다.
제14호 : 한산모시짜기(韓山모시짜기) 67,1,16
모시는 기호지방에서도 짜는 곳이 여러 곳이나, 예로부터 한산지방의 모시가 이름이 있었다. 한산지방의 부녀자들은 대개가 모시를 짤 수 있는 기능을 지녔고 그와 같은 기술집단 가운데서 문정옥의 솜씨가 두드러진다.
모시는 다년생인 모시나무의 가지를 꺾어 그 껍질을 벗긴 것을 재료로 하여 짠다. 심은 그해나 다음해부터 수확하여 쓸 수가 있으며 5월 말에서 6월 초에 초수(初收)를 하고, 8월 초순에서 8월 하순에 이수(二收)하며, 10월 초순에서 하순에 삼수(三收)하여 한 해에 세 차례를 벤다.
제15호 : 북청사자놀음(北靑獅子놀음) 67,03,31
북청사자놀음은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정월 대보름에 사자탈을 쓰고 놀던 민속놀이로, 사자에게는 사악한 것을 물리칠 힘이 있다고 믿어 잡귀를 쫓고 마을의 평안를 비는 행사로 널리 행해졌다. 이 지방에서는 동네마다 사자를 꾸며서 놀았는데 각 동네에서 사자가 모여들어 자연스럽게 경연이 벌어졌다. 관원놀음과 함께 행해진 토성리의 사자놀음이 강세를 보이면서 다른 곳의 사자놀음은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삼국시대 이래 민속놀이로 정착된 가면놀이로, 한국전쟁 이후 월남한 연희자들에 의해 현재는 서울을 중심으로 전승되고 있다.
제16호 : 거문고산조(거문고散調) 67,6,16
산조란 장구반주에 맞추어 다른 악기를 독주형태로 연주하는 것을 말하며, 4∼6개의 악장을 구분하여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 순서로 연주한다. 거문고산조는 거문고로 연주하는 민속 기악 독주곡이다.
고구려의 왕산악이 처음 만들었다고 하는 거문고는 우리 민족 고유의 현악기로 ‘현금(玄琴)’이라고도 한다. 길이 1.5m, 폭 25㎝ 정도 되는 나무통에 명주실로 꼰 6개의 줄을 매어 연주하는 악기이다. 거문고 머리를 무릎에 놓고 왼손가락으로 괘(줄받침)를 짚어 운율을 맞추며 오른손으로 가느다란 대나무로 만든 술대를 쥐고 줄을 쳐서 소리를 낸다.
제17호 : 봉산탈춤(鳳山탈춤) 67,6,16
탈춤이란 한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이 가면으로 얼굴이나 머리 전체를 가리고 다른 인물, 동물 또는 초자연적 존재(신) 등으로 분장한 후 음악에 맞추어 춤과 대사로써 연극하는 것을 말한다. 탈춤은 조선 전기까지 각 지방에서 행해지던 가면놀이이다. 17세기 중엽에 이르러 궁중의 관장하에 “산대”라 불리는 무대에서 공연되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형태로, 인종 12년(1634)에 궁중에서 상연이 폐지되자 민중에게 유입되어 전국으로 전파되었다.
봉산탈춤은 약 200년전부터 매년 단오와 하지날 밤에 행해졌다. 놀이는 4상좌춤·8목중춤·사당춤·노장춤·사자춤·양반춤·미얄춤의 7과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놀이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와 제사를 지낸다. 등장인물은 상좌·목중·거사·사당·노장·신장수·원숭이·취발이·샌님·서방님·종가집 도련님·말뚝이·영감·미얄·남강노인·무당·사자 등 모두 36명이며, 탈은 27개가 사용된다. 서민들의 가난한 삶과 양반에 대한 풍자, 파계승에 대한 풍자, 그리고 일부다처제로 인한 남성의 여성에 대한 횡포를 보여준다. 피리·젓대·해금·북·장구 등으로 구성된 삼현육각으로 연주하는 염불과 타령·굿거리곡에 맞추어 추는 춤이 주가 되며, 다른 가면극에 비해 중국 한시구절의 인용과 모방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제18호 : 동래야류(東萊野遊) 67,12,21
야류(들놀음)는 경상남도 내륙지방에서 행해지던 오광대가 바닷길을 따라 수영·동래·부산진 등에 전래된 것으로, 야류란 이름은 넓은 들판같은 곳에서 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라고 한다. 오광대가 전문연예인에 의해 행해진 도시가면극이라면 야류는 비직업적인 연희자들, 즉 마을사람들에 의해 토착화된 놀이이다.
동래야류는 정월 대보름 저녁에 벌어졌는데, 그 해 농사를 점치거나 풍년을 기원하는 의미로 행해졌다고 한다.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약 100년전 인근 수영야류를 보고 시작되었다고 전해지며, 근래에는 대중오락적인 놀이로 공연되고 있다. 놀이는 문둥이춤·양반과 말뚝이의 재담·영노춤·할미와 영감춤의 4과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렬하는 길놀이를 한다.
제19호 : 선소리산타령(선소리山打令) 68,4,18
선소리는 애초에 사당패놀이에서 발생했다. 산타령(山打令)은 여러 소리꾼이 소고를 들고 늘어서서 소고를 치고 발림하며 합창하는 민속가요를 가리키는데 소리꾼들이 서서 노래한다고 하여 선소리 또는 입창이라고 하며 또 소리말(가사, 歌詞)이 산천경치(山川景致)를 그리는 노래라는 뜻으로 산타령(山打令)이라고도 한다.
제20호 : 대금정악(大금正樂) 68,12,21
정악(正樂)이란 궁정이나 관아 및 풍류방(각 지방의 풍류객들이 모여서 음악을 즐기던 장소)에서 연주하던 음악으로, 우아하고 바른 음악이란 뜻이다. 대금정악은 정악을 대금으로 연주하는 것을 가리킨다.
제21호 : 승전무(勝戰舞) 67,12,21
승전무는 경남 통영(충무)에서 전승되어 온 북춤으로, 궁중에서는 ‘무고(북춤)’라 하여 기녀와 춤을 추는 사내아이들에 의해 전승되었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이충무공이 장수와 병졸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사기를 북돋우기 위해 추게 하였으며, 전쟁에 이긴 후에는 축하의 의미로 추게 하였다. 본래 통영지방의 잔치에서 행하던 무고, 검무(칼춤) 등의 모든 춤이 군대가 있던 곳에서 추던 것이라는 뜻으로 승전무라 하였는데, 이 가운데 1968년에 ‘무고’만이 승전무라는 이름으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가 1987년에 검무를 추가하였다.
제22호 : 매듭장(매듭匠) 68,12,21
매듭장이란 끈목(多繒)을 사용하여 여러 가지 종류의 매듭을 짓고, 술을 만드는 기술 또는 그러한 기술을 가진 사람을 가리킨다. 끈목은 여러 가닥의 실을 합해서 3가닥 이상의 끈을 짜는 것을 말하는데, 그 종류에는 둘레가 둥근 끈으로 노리개나 주머니끈에 주로 쓰이는 동다회와 넓고 납짝한 끈으로 허리띠에 자주 사용되는 광다회가 있다. 복식이나 의식도구 장식으로 사용되는 매듭은 격답·결자라고 한다.
제23호 : 가야금산조및병창(伽倻琴散調및倂唱) 68,12,21
산조란 장구반주에 맞추어 다른 악기를 독주형태로 연주하는 것을 말하며, 4∼6개의 악장을 구분하여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 순서로 연주한다. 가야금으로 연주하는 산조를 가야금산조라 하고, 직접 가야금을 타면서 노래부르는 것을 가야금병창이라 한다.
제24호 : 안동차전놀이(安東車戰놀이) 69,1,7
안동 차전놀이는 정월 대보름을 전후하여 안동지방에서 행해지던 민속놀이의 하나로 동채싸움이라고도 부른다. 유래에 대하여 정확한 기록은 없으나 후백제의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의 싸움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 전해진다.
안동 차전놀이는 남자들의 집단놀이를 한층 세련되게 향상시킨 모의전투놀이이며, 우리민족의 흥겨운 민속놀이로 안동지방 특유의 상무정신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동부가 이기면 동부에 풍년이 들고, 서부가 이기면 서부에 풍년이 든다고 믿어 농경민의 풍년기원을 바탕으로 한 농경의례놀이라 할 수 있다.
제25호 : 영산쇠머리대기(靈山쇠머리대기) 69,2,11
영산 쇠머리대기는 일종의 편싸움 놀이로, 마을을 동·서로 갈라 두 패로 편을 짜는데 이긴 편 마을에는 풍년이 들고 진 편 마을에는 흉년이 든다고 해서 농경의식의 하나로 전해져 왔다. 영산지방에서는 나무쇠싸움<목우전(木牛戰)>으로 많이 불리우며, 정월 대보름에 행해지던 민속놀이였으나 현재는 3·1 문화제 행사의 하나로 줄다리기와 함께 행해지고 있다. 유래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으나 영산의 영축산과 작약산(함박산)의 형상이 마치 두 마리의 황소가 겨루고 있는 것 같다 해서 산의 나쁜 기운을 풀어주고, 불행을 막는다는 의미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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