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도자기,사찰

무형 문화제 [제51 - 75호]

문성식 2011. 2. 11. 11:14

제51호 : 남도들노래(南道들노래)  1973.11.05

남도들노래란 전라남도 진도지방의 농부들이 농사일을 할 때 부르는 노래를 가리키는데 크게 논일 노래와 밭일 노래로 이루어진다.
모판에서 모를 찔 때에는 모뜨는 소리를 부르고, 논에 모를 심을 때에는 못소리를 부르며 논에서 김을 맬 때에는 절로소리를 부른다. 김매기가 끝나고 농부들이 마을에 들어올 때에는 길꼬냉이를 부른다. 여흥으로 진도아리랑을 부르기도 한다. 농부들이 들일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예로부터 어느 고장에서나 볼 수 있었으나 전라도 서남지역의 노래는 특히 그 종류가 많고 음악성도 뛰어나다.

남도들노래는 향토색이 짙고 가락이 매우 흥겨운 노래이다.

 

제53호 : 채상장(彩箱匠)  1975.01.29

채상장(彩箱匠)은 얇게 저민 대나무 껍질을 색색으로 물을 들여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로 고리 등을 엮는 기능 또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언제부터 채상장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채상은 고대 이래로 궁중과 귀족계층의 여성가구로서 애용되었고, 귀하게 여겨졌던 고급공예품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사대부 뿐만 아니라 서민층에서도 혼수품으로 유행하였으며, 주로 옷·장신구·침선구·귀중품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제55호 : 소목장(小木匠)  1975.01.29

소목장은 건물의 창호라든가 장롱·궤·경대·책상·문갑 등 목가구를 제작하는 목수를 말한다. 기록상으로 보면 목수는 신라때부터 있었고,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때부터 불리웠다. 조선 전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자급자족에 따른 지역적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소목장은 무늬가 있는 나무로 자연스러운 미를 최대한 살린 한국 전통 목공예 기법으로 자연환경과 주택구조 등을 고려하여 한국적인 독특한 조형양식을 만들어 낸 민속공예사적 가치가 높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설석철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대목(大木)이 궁궐이나 불전(佛殿) 또는 가옥과 같은 큰 목조건물을 짓는 목수를 이르는 말인데 반해서, 소목은 장(欌), 농(籠) 사방탁자, 서안(書案), 연상(硯床), 소반 등과 같이 작은 가구 등을 만드는 목수를 말한다.

 

제56호 : 종묘제례(宗廟祭禮)  1975.05.03

 

종묘제례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셔 놓은 사당(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가리키며, ‘대제(大祭)’라고도 부른다.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국가존립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상징물로 정전(19실)과 영녕전(16실)이 있다.
종묘제례는 정시제와 임시제로 나뉘어, 정시제는 4계절의 첫번째 달인 1월, 4월, 7월, 10월에 지냈고 임시제는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 지냈으나, 해방 후부터는 5월 첫 일요일에 한번만 지내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예법이나 예절에 있어서 모범인 의식만큼 순서와 절차는 엄격하고 장엄하게 진행된다.
제례는 크게 신을 모셔와 즐겁게 하고 보내드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절차를 보면 선행절차 →취위(就位) →영신(迎神) →행신나례(行晨裸禮) →진찬(進饌)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철변두(撤변豆) →망료(望僚) →제후처리(祭後處理)의 순서로 진행되며, 종묘제례가 있기 전 왕은 4일간 근신하고 3일간 몸을 깨끗하게 한다.
종묘제례는 예(禮)를 소중히 여긴 조상들의 유교 사회에 있어 예술의 기준이 된 귀중한 의식으로 웅장함과 엄숙함이 돋보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과 더불어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제57호 : 경기민요(京畿民謠)  1975.07.12

경기민요란 서울과 경기도지방에서 전승되는 민요이지만, 여기서의 경기민요는 경기긴잡가를 가리킨다.
잡가는 가곡이나 가사와 같은 정가(正歌)와 대비되는 속가(俗歌)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속가 중에서도 긴형식의 노래를 앉아서 부르는 것을 잡가라 한다.
경기긴잡가의 특징은 경기 특유의 율조로서 대개 서경적 혹은 서정적인 긴사설로 비교적 조용하고 은근하며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서정적인 표현이 많다. 조선시대 서울 장안의 소시민들의 모임장소인 ‘공청’ 또는 ‘깊은사랑’을 통해 12잡가가 발생하였으므로 공청소리문화의 특색을 잘 담고 있는 귀한 문화재이다.
 
제58호 : 줄타기(줄타기)  76.6.30

줄타기는 공중에 맨 줄 위에서 재미있는 이야기와 발림을 섞어가며 갖가지 재주를 부리며 벌이는 놀음이다. 줄 위를 마치 얼음지치듯 미끌어지며 나가는 재주라 하여 어름 또는 줄얼음타기라고도 한다. 주로 음력 4월 15일이나 단오날, 추석 등 명절날에 연희되었으며, 개인의 초청에 응해서 돈을 받고 놀아 주는 경우도 있었다. 놀이의 유래에 대하여는 서역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중국 한나라 때 발생했다는 설이 있으나 우리나라에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줄타기는 조선시대에 두 계통으로 나뉘어 발달했다. 하나는 주로 양반층을 위해 공연되었던 광대줄타기로 순수하게 줄타기로만 구성되어 기술의 종류나 솜씨에서 뛰어났으며 다른 하나는 남사당패의 어름줄타기로 서민들을 위해 공연되었던 만큼 재담이나 오락성이 뛰어났다.
줄타기는 줄광대와 어릿광대, 삼현육각잡이로 편성된다. 줄광대는 주로 줄 위에서 놀고 어릿광대는 땅 위에 서서 재담을 하며 삼현육각잡이는 줄 밑 한편에 한 줄로 늘어앉는다. 줄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3m쯤이고, 길이는 10m쯤 된다.
 
제60호 : 장도장(粧刀匠)  1978.02.23

장도는 몸에 지니는 자그마한 칼로 일상생활이나 호신용 또는 장신구로 사용되었고, 장도를 만드는 기능과 그 기능을 가진 사람을 장도장이라 한다. 고려시대부터 성인 남녀들이 호신용으로 지니고 다녔으며 특히 조선시대 임진왜란 이후부터 사대부 양반 가문의 부녀자들이 순결을 지키기 위하여 필수적으로 휴대했다. 조선 후기부터는 장도가 몸단장을 하는 노리개로서 일종의 사치품이었기 때문에 제작과정이 정교하게 발달하였다.
장도 중에서 몸에 차게 되는 것을 패도(佩刀)라 하고, 주머니 속에 넣은 것을 낭도(囊刀)라고 하며, 이 밖에도 모양과 재료에 따라서 많은 종류가 있다. 칼집장식에 따라 복잡한 갖은 장식과 단순한 맞배기로 나뉘는데, 맞배기에는 칼집이 원통형인 평맞배기와 을(乙)자형인 을자맞배기가 있다. 그 외에도 칼집이 사각형이면 사모장도, 팔각이면 모잽이장도라 부르고, 재료에 따라 금장도, 은장도, 백옥장도 등으로 부른다.
 
제61호 : 은율탈춤(殷栗탈춤)  1978.02.23

은율탈춤은 단오에 2∼3일 동안 행해지고 그 밖에 석가탄신일과 7월 백중놀이로도 행해진다. 약 200∼300년 전에 난리를 피하기 위하여 섬으로 갔던 사람들이 고향으로 돌아올 때 얼굴을 내놓기가 부끄러워 탈을 쓴 데서 비롯되었다고 전해진다. 이 놀이는 사자춤·상좌춤·8목중춤·노승춤·영감과 할미광대춤의 6마당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놀이에 앞서 숲에 모여 탈에 제사를 지내고 공연장소까지 탈과 의상을 갖추고 행렬하는 길놀이를 한다. 상좌·목중·말뚝이·맏양반·둘째양반·새맥시·셋째양반·원숭이·노승·최괄이·영감·할미·무당·사자·최괄이 아들 등 24명의 인물이 등장하며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 일부처첩(一夫妻妾)의 삼각관계와 서민생활상을 보여준다. 다른 탈춤에 비해 호색적인 표현이 심하며, 파계승보다 양반을 모욕하는 대목을 강조하고 있다. 팔목중춤 다음으로 양반춤이 나오는 것은 강령탈춤과 은율탈춤 뿐이다.
은율탈춤은 황해도 탈춤에서 나누어진 봉산탈춤과 해주탈춤의 상호교류와 영향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제62호 : 좌수영어방놀이(左水營漁坊놀이)  1978.05.09

좌수영어방놀이는 지금의 부산 동래에 전승되고 있는 놀이로, 어업의 작업과정과 노동요를 놀이화한 것이다. 새해를 맞아 바다에 나가기 전에 굿을 하고 놀이를 벌여 많은 고기를 잡아 만선으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좌수영어방놀이는 어부들이 그물로 고기를 잡으며 여러 가지 노래를 부르는 내용이 중요부분을 이룬다. 즉 어로작업을 하면서 작업과정에 따른 앞소리, 뒷소리, 맞는소리를 맞추며 부르는 것을 말한다.
놀이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물로 고기를 잡기 위하여 줄틀로 줄을 꼬며 부르는 내왕소리, 친 그물을 끌어당길 때 부르는 사리소리, 고기를 많이 잡은 어부들이 풍어를 축하하며 부르는 칭칭소리 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64호 : 두석장(豆錫匠)  1980.11.17

목가구나 건조물에 붙여서 결합부분을 보강하거나 열고 닫을 수 있는 자물쇠 등의 금속제 장식을 총칭하여 장석(裝錫)이라고 하며,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황동(놋쇠) 장석을 만드는 장인을 두석장(豆錫匠)이라고 부른다. 두석장은 엄밀한 의미에서 장식장이라 해야 옳지만, 장식이라는 말이 아주 광범한 뜻을 가진 데다가 금속장식이라 하더라도 황동 이외에 철·은·오동 등 다양한 재료를 포함하고 있어서 장식이란 말 대신 장석이라 표기해 구별하고 있다. 두석장이라는 용어는 『경국대전』 공조(工曹)의 경공장(京工匠) 가운데 포함된 두석장에서 연유한다.
장석재료로는 황동과 백동이 주류를 이루는데 일반적으로 황동이 쓰이며 보다 사치스런 장석으로 꾸미기 위해서는 백동을 쓴다.
 
제65호 : 백동연죽장(白銅煙竹匠)  1980.11.17

연죽(煙竹)이란 일반적으로 담뱃대를 말하며, 백동연죽은 백동으로 만든 담뱃대를 말한다. 백동담뱃대를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백동연죽장이라고 한다.
담뱃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후 일본을 통해 담배가 전래되면서라고 전해지며, 그래서인지 대일무역의 중심지였던 동래가 전통적인 명산지이다. 담뱃대의 구조는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이는 물부리와 담배를 담아 태우는 대꼬바리 그리고 그것을 잇는 가는 대나무 설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제66호 : 망건장(網巾匠)  1980.11.17
망건은 고려말 조선초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으며 갓을 쓰기 전에 머리카락을 여며매기 위해 말총으로 엮어 만든 일종의 머리띠이다. 즉 상투를 틀고 머리를 음접하기 위한 이 머리띠는 한국적인 의관의 일부로서 소중하게 여겨왔는데 개화 이래 삭발에 따라 점차 쇠퇴해버려, 현재는 수요가 거의 없다.
 
제67호 : 탕건장(宕巾匠)  1980.11.17
탕건은 남자들이 갓을 쓸 때 받쳐 쓰는 모자의 일종으로, 사모(紗帽)나 갓 대신 평상시 집안에서 쓰며 말총이나 쇠꼬리털로 만든다. 이러한 탕건을 만드는 기술과 그 기술을 가진 사람을 탕건장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관직자가 평상시에 관을 대신하여 썼고, 속칭 ‘감투’라고도 하여 벼슬에 오르는 것을 일컫는 ‘감투쓴다’는 표현도 여기에서 유래되었다.
 
제68호 : 밀양백중놀이(密陽百中놀이)  1980.11.17
밀양 백중놀이는 바쁜 농사일을 끝내고 고된 일을 해오던 머슴들이 음력 7월 15일경 용날을 선택하여 지주들로부터 하루 휴가를 얻어 흥겹게 노는 놀이를 말한다. 이러한 놀이는 호미씻기라 해서 벼농사를 주로 했던 중부 이남지방의 농촌에서는 흔히 볼 수 있다. 밀양에서는 머슴날이라고 하며 지주들이 준비해 주는 술과 음식을 일컫는 꼼배기참을 먹으며 논다해서 꼼배기참놀이라고도 부른다.
밀양 백중놀이는 농신제, 작두말타기, 춤판, 뒷놀이 등으로 짜여져 진행된다.
 
제69호 : 하회별신굿탈놀이(河回別神굿탈놀이)  1980.11.17
서낭제에 탈놀이를 놀았던 곳은 경상북도 안동시 일대에서는 하회동과 병산동이 알려져 왔으나 하회동별신굿은 무진년(1928) 이래 중단되고 하회와 병산의 가면 12종 13개만이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어 남아 있다. 또 연희자도 무진년 하회별신굿탈놀이에 17세 소년광대 각시역을 맡았던 이창희 한 사람만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하회동의 서낭신은 무진생 서낭님으로 17세 처녀인 의성김씨라고 하고 혹은 15세에 과부가 된 서낭신으로 동내 삼신의 며느리 신이라고도 전한다. 이 서낭신에게 해마다 정월 보름과 4월 8일에 올리는 평상제(平常祭)는 동제 또는 제사라고 부르고, 이와는 달리 임시대제(臨時大祭)로 지내는 별신(別神)굿은 대체로 10년에 한 번씩 거행되었다.
 
제70호 : 양주소놀이굿(楊州소놀이굿) 1980.11.17
양주 소놀이굿은 설과 입춘을 맞아 가족의 번창과 풍년을 기원하는 굿으로, 소굿·쇠굿·소놀음굿·마부타령굿으로 불려진다. 양주 소놀이굿의 유래에 대하여는 양주지방에서 산신으로 여기는 감악사(紺岳祠)에서 나왔다는 설과 농경의례의 하나로 풍년을 비는데서 나왔다는 설, 소장수가 잘 되기를 바라는데서 나왔다는 설, 궁중의례에서 나왔다는 설, 굿의 여흥으로 이루어졌다는 설이 있으나 정확한 유래는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소와 말, 하늘을 숭배하는 소멕놀이에 기원을 두고 무속의 제석거리와 마마배송굿 등에서 자극을 받아 형성된 놀이로 보고 있으며, 양주 뿐 아니라 서울과 경기·강원·충청·황해·평안남도 등의 지역에서도 행해져 왔다.
 
제71호 : 제주칠머리당영등굿(濟州칠머리당영등굿)  1980.11.17
제주 칠머리당영등굿은 제주시 건입동의 본향당(本鄕堂)인 칠머리당에서 하는 굿이다. 건입동은 제주도의 작은 어촌으로 주민들은 물고기와 조개를 잡거나 해녀작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며 마을 수호신인 도원수감찰지방관(都元帥監察地方官)과 요왕해신부인(龍王海神夫人) 두 부부에게 마을의 평안과 풍요를 비는 굿을 했다. 부부수호신과 함께 영등신을 맞이하여 소중히 위하는 굿을 했는데, 영등신은 외눈백이섬 또는 강남천자국에서 2월 1일에 제주도에 들어와서 어부와 해녀들에게 풍요를 주고 2월 15일에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내방신(來訪神)이다.
 
제72호 : 진도씻김굿(珍島씻김굿)  1980.11.17
진도씻김굿은 무당이 하는 제사 중 하나로, 이승에서 풀지 못한 죽은 사람의 원한을 풀어주고, 즐겁고 편안한 세계로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굿이며, 원한을 씻어준다해서 씻김굿이라 부른다.
진도씻김굿의 음악은 육자배기목(시나위목)을 중심으로 피리와 대금, 해금, 장고, 징으로 이루어진 삼현육각반주로 진행된다. 무당은 흰색 옷에 다홍색 띠를 걸치는 정도의 소박한 옷차림으로 불교적 성격이 짙은 승복과 비슷하며 죽은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지전(紙錢)춤을 춘다. 노래는 홀로 부르는 통절(通節)형식과 선소리를 메기고 뒷소리로 받는 장절(章節)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선율의 부침새와 여러 가지 세련된 목구성을 구사해 매우 흥겹고 아름답다.
진도씻김굿은 죽은 사람 뿐 아니라 산 사람의 무사함을 빌고 불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굿으로 춤이나 음악에서 예술적 요소가 뛰어나고 자료가치가 커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제73호 : 가산오광대(駕山五廣大) 1980.11.17
가산오광대는 경상남도 사천군 축동면 가산리에서 전승되어온 영남형 민속가면극이다.
가산리의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약 2∼3백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라 하지만 문헌이나 기록은 없다. 그러나 현재의 기능보유자 계보를 따져보면 약 100년의 역사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가산은 조선시대 말까지 조창이 있던 곳으로 약 300호의 대취락지이며 항시(港市)였으므로 그때 탈놀음이 있었을 듯싶다. 현재 가산리에 거주하는 한(韓)씨가 정착한 지 11대에 이른 사실과 동제인 천룡제(天龍祭)와 오광대놀이가 밀착되어 있는 것 등을 미루어 오랜 전통을 지닌 놀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제74호 : 대목장(大木匠)  1982.06.01
대목장은 나무를 재목으로 하여 집짓는 일에서 재목을 마름질하고 다듬는 기술설계는 물론 공사의 감리까지 겸하는 목수로서 궁궐, 사찰, 군영시설 등을 건축하는 도편수로 지칭하기도 한다. 대목장은 문짝, 난간 등 소규모의 목공일을 맡아 하는 소목장과 구분한 데서 나온 명칭이며, 와장·드잡이·석장·미장이·단청장 등과 힘을 합하여 집의 완성까지 모두 책임진다. 즉 현대의 건축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목조건축이 발달하여 궁궐과 사찰건물이 모두 목조였다. 따라서 목수에 주어진 벼슬 또한 상당하였다. 통일신라의 관직을 보면 목척(木尺)이 70인이라 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전문직으로서의 목수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목업에 벼슬이 주어졌고 조선시대에는 60인의 목장을 선공감에 두었고, 세종(재위 1418∼1450) 때 서울 남대문 재건기록에 의하면 대목이 정5품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목수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가 없어졌다. 오늘날에는 사찰이나 개인의 집을 목조로 짓는 것으로 기술의 명맥이 전수되어 오는 형편이다.
대목장은 그 기법이 엄격히 전승되기 때문에 기문(技門)이 형성되어 있다. 기문은 기술로서 한 가문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기문에서의 대목장은 절대권위를 누린다. 대목장은 능력에 따라 새로운 기법이 도입되기도 하고 기능이 향상되기도 하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제75호 : 기지시줄다리기(機池市줄다리기)  1982.06.01
충청남도 당진군 송악면 기지시리에 줄다리기가 전승되어 있다. 현지에서는 기지시(機池市)를 틀무시, 틀모시, 틀못이라고 부르는데 틀(機) 못(池)에서 기지(機池)라 기록하게 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전설에 의하면 기지는 풍수적으로 보아 옥녀직금형(玉女織錦型)이라 해서 옥녀가 베짜는 형국이어서 베를 마전하는 시늉으로 줄다리기가 생겼다고 전하기도 하고 또 기지시리의 지형이 지네형이어서 지네 모양의 큰 줄을 만들어 줄다리기를 했다는 설도 있다.
기지시 장터 동쪽에 국수봉(國守峰)이란 구릉이 있는데 이곳 정상에 국수당(國守堂)이 있다. 원래에는 초당(草堂)이 봉록(峰麓)에 있었으나 정상으로 옮겨 새로 지었으며 매년 정초에 길일을 택해서 당제를 지내고 윤년에는 당제 후에 줄다리기를 했다. 당제의 목적은 역질, 재앙, 호환을 막고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데서 거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