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1호 : 남도들노래(南道들노래) 1973.11.05
남도들노래란 전라남도 진도지방의 농부들이 농사일을 할 때 부르는 노래를 가리키는데 크게 논일 노래와 밭일 노래로 이루어진다.
모판에서 모를 찔 때에는 모뜨는 소리를 부르고, 논에 모를 심을 때에는 못소리를 부르며 논에서 김을 맬 때에는 절로소리를 부른다. 김매기가 끝나고 농부들이 마을에 들어올 때에는 길꼬냉이를 부른다. 여흥으로 진도아리랑을 부르기도 한다. 농부들이 들일을 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은 예로부터 어느 고장에서나 볼 수 있었으나 전라도 서남지역의 노래는 특히 그 종류가 많고 음악성도 뛰어나다.
남도들노래는 향토색이 짙고 가락이 매우 흥겨운 노래이다.
제53호 : 채상장(彩箱匠) 1975.01.29
채상장(彩箱匠)은 얇게 저민 대나무 껍질을 색색으로 물을 들여 다채로운 기하학적 무늬로 고리 등을 엮는 기능 또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말한다. 언제부터 채상장이 있었는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채상은 고대 이래로 궁중과 귀족계층의 여성가구로서 애용되었고, 귀하게 여겨졌던 고급공예품의 하나였다. 조선 후기에는 양반사대부 뿐만 아니라 서민층에서도 혼수품으로 유행하였으며, 주로 옷·장신구·침선구·귀중품을 담는 용기로 사용되었다.
제55호 : 소목장(小木匠) 1975.01.29
소목장은 건물의 창호라든가 장롱·궤·경대·책상·문갑 등 목가구를 제작하는 목수를 말한다. 기록상으로 보면 목수는 신라때부터 있었고, 소목장이라는 명칭은 고려때부터 불리웠다. 조선 전기까지는 목가구가 주로 왕실과 상류계층을 위해 만들어졌으나, 조선 후기에는 민간에 널리 보급되어 자급자족에 따른 지역적 특성이 나타나게 되었다.
소목장은 무늬가 있는 나무로 자연스러운 미를 최대한 살린 한국 전통 목공예 기법으로 자연환경과 주택구조 등을 고려하여 한국적인 독특한 조형양식을 만들어 낸 민속공예사적 가치가 높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설석철이 기능보유자로 인정되어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제56호 : 종묘제례(宗廟祭禮) 1975.05.03
종묘제례란 조선시대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셔 놓은 사당(종묘)에서 지내는 제사를 가리키며, ‘대제(大祭)’라고도 부른다. 종묘는 사직과 더불어 국가존립의 근본이 되는 중요한 상징물로 정전(19실)과 영녕전(16실)이 있다.
종묘제례는 정시제와 임시제로 나뉘어, 정시제는 4계절의 첫번째 달인 1월, 4월, 7월, 10월에 지냈고 임시제는 나라에 좋은 일과 나쁜 일이 있을 때 지냈으나, 해방 후부터는 5월 첫 일요일에 한번만 지내고 있다. 제사를 지내는 예법이나 예절에 있어서 모범인 의식만큼 순서와 절차는 엄격하고 장엄하게 진행된다.
제례는 크게 신을 모셔와 즐겁게 하고 보내드리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 절차를 보면 선행절차 →취위(就位) →영신(迎神) →행신나례(行晨裸禮) →진찬(進饌) →초헌례(初獻禮) →아헌례(亞獻禮) →종헌례(終獻禮) →음복례(飮福禮) →철변두(撤변豆) →망료(望僚) →제후처리(祭後處理)의 순서로 진행되며, 종묘제례가 있기 전 왕은 4일간 근신하고 3일간 몸을 깨끗하게 한다.
종묘제례는 예(禮)를 소중히 여긴 조상들의 유교 사회에 있어 예술의 기준이 된 귀중한 의식으로 웅장함과 엄숙함이 돋보인다.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과 더불어 2001년 5월 18일 유네스코 「인류구전 및 무형유산걸작」으로 선정되었다.
잡가는 가곡이나 가사와 같은 정가(正歌)와 대비되는 속가(俗歌)라는 뜻으로 쓰였으나, 오늘날에는 속가 중에서도 긴형식의 노래를 앉아서 부르는 것을 잡가라 한다.
줄타기는 줄광대와 어릿광대, 삼현육각잡이로 편성된다. 줄광대는 주로 줄 위에서 놀고 어릿광대는 땅 위에 서서 재담을 하며 삼현육각잡이는 줄 밑 한편에 한 줄로 늘어앉는다. 줄의 높이는 일정하지 않으나 대략 3m쯤이고, 길이는 10m쯤 된다.
장도 중에서 몸에 차게 되는 것을 패도(佩刀)라 하고, 주머니 속에 넣은 것을 낭도(囊刀)라고 하며, 이 밖에도 모양과 재료에 따라서 많은 종류가 있다. 칼집장식에 따라 복잡한 갖은 장식과 단순한 맞배기로 나뉘는데, 맞배기에는 칼집이 원통형인 평맞배기와 을(乙)자형인 을자맞배기가 있다. 그 외에도 칼집이 사각형이면 사모장도, 팔각이면 모잽이장도라 부르고, 재료에 따라 금장도, 은장도, 백옥장도 등으로 부른다.
은율탈춤은 황해도 탈춤에서 나누어진 봉산탈춤과 해주탈춤의 상호교류와 영향관계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좌수영어방놀이는 어부들이 그물로 고기를 잡으며 여러 가지 노래를 부르는 내용이 중요부분을 이룬다. 즉 어로작업을 하면서 작업과정에 따른 앞소리, 뒷소리, 맞는소리를 맞추며 부르는 것을 말한다.
놀이의 내용을 살펴보면, 그물로 고기를 잡기 위하여 줄틀로 줄을 꼬며 부르는 내왕소리, 친 그물을 끌어당길 때 부르는 사리소리, 고기를 많이 잡은 어부들이 풍어를 축하하며 부르는 칭칭소리 세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석재료로는 황동과 백동이 주류를 이루는데 일반적으로 황동이 쓰이며 보다 사치스런 장석으로 꾸미기 위해서는 백동을 쓴다.
담뱃대를 만들기 시작한 것은 임진왜란 후 일본을 통해 담배가 전래되면서라고 전해지며, 그래서인지 대일무역의 중심지였던 동래가 전통적인 명산지이다. 담뱃대의 구조는 입에 물고 연기를 빨아들이는 물부리와 담배를 담아 태우는 대꼬바리 그리고 그것을 잇는 가는 대나무 설대 세 부분으로 구성된다.
밀양 백중놀이는 농신제, 작두말타기, 춤판, 뒷놀이 등으로 짜여져 진행된다.
하회동의 서낭신은 무진생 서낭님으로 17세 처녀인 의성김씨라고 하고 혹은 15세에 과부가 된 서낭신으로 동내 삼신의 며느리 신이라고도 전한다. 이 서낭신에게 해마다 정월 보름과 4월 8일에 올리는 평상제(平常祭)는 동제 또는 제사라고 부르고, 이와는 달리 임시대제(臨時大祭)로 지내는 별신(別神)굿은 대체로 10년에 한 번씩 거행되었다.
진도씻김굿의 음악은 육자배기목(시나위목)을 중심으로 피리와 대금, 해금, 장고, 징으로 이루어진 삼현육각반주로 진행된다. 무당은 흰색 옷에 다홍색 띠를 걸치는 정도의 소박한 옷차림으로 불교적 성격이 짙은 승복과 비슷하며 죽은 사람의 한을 풀어주는 지전(紙錢)춤을 춘다. 노래는 홀로 부르는 통절(通節)형식과 선소리를 메기고 뒷소리로 받는 장절(章節)형식으로 되어 있으며, 선율의 부침새와 여러 가지 세련된 목구성을 구사해 매우 흥겹고 아름답다.
진도씻김굿은 죽은 사람 뿐 아니라 산 사람의 무사함을 빌고 불교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굿으로 춤이나 음악에서 예술적 요소가 뛰어나고 자료가치가 커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가산리의 고로(古老)들에 의하면 약 2∼3백년의 역사를 가진 것이라 하지만 문헌이나 기록은 없다. 그러나 현재의 기능보유자 계보를 따져보면 약 100년의 역사는 인정할 수 있을 것 같다. 한편, 가산은 조선시대 말까지 조창이 있던 곳으로 약 300호의 대취락지이며 항시(港市)였으므로 그때 탈놀음이 있었을 듯싶다. 현재 가산리에 거주하는 한(韓)씨가 정착한 지 11대에 이른 사실과 동제인 천룡제(天龍祭)와 오광대놀이가 밀착되어 있는 것 등을 미루어 오랜 전통을 지닌 놀이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목조건축이 발달하여 궁궐과 사찰건물이 모두 목조였다. 따라서 목수에 주어진 벼슬 또한 상당하였다. 통일신라의 관직을 보면 목척(木尺)이 70인이라 하였는데, 그 가운데 상당수가 전문직으로서의 목수로 보인다. 고려시대에는 목업에 벼슬이 주어졌고 조선시대에는 60인의 목장을 선공감에 두었고, 세종(재위 1418∼1450) 때 서울 남대문 재건기록에 의하면 대목이 정5품이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 이르러 목수에게 벼슬을 주는 제도가 없어졌다. 오늘날에는 사찰이나 개인의 집을 목조로 짓는 것으로 기술의 명맥이 전수되어 오는 형편이다.
대목장은 그 기법이 엄격히 전승되기 때문에 기문(技門)이 형성되어 있다. 기문은 기술로서 한 가문이 만들어지는 것인데, 기문에서의 대목장은 절대권위를 누린다. 대목장은 능력에 따라 새로운 기법이 도입되기도 하고 기능이 향상되기도 하며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기도 한다.
기지시 장터 동쪽에 국수봉(國守峰)이란 구릉이 있는데 이곳 정상에 국수당(國守堂)이 있다. 원래에는 초당(草堂)이 봉록(峰麓)에 있었으나 정상으로 옮겨 새로 지었으며 매년 정초에 길일을 택해서 당제를 지내고 윤년에는 당제 후에 줄다리기를 했다. 당제의 목적은 역질, 재앙, 호환을 막고 풍년이 들기를 바라는 데서 거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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